비겁한 남자 그대 이름 무뢰한
무뢰한 스포 정말 많습니다.
주말에 무뢰한을 봤다. 그저 그런 통속 멜로일까 봐 볼 생각은 하지 않고 있었는데, 몇 주 전 영화 소개 프로그램에서 혜경이 영준에게 '진심이야?'라고 묻는 표정이 계속해서 아른거렸다.
혜경은 마치 주광성 때문에 빛으로 달려들지 않고는 못 배기는 불나방 같다. 혜경의 이러한 습성은 위에서 언급된 장면에서도 드러나지만 계단에 앉아있는 영준을 대할 때부터 나타난다. 나풀나풀거리는 말투로 영준에게 오늘은 그만 집으로 가라고 이야기하고 사라져 버리지만, 이내 몇 번의 구두굽 소리가 들리기도 전에 그녀는 다시 돌아온다.
설마 정말 갔을까, 설마 진짜 간 건 아니겠지, 설마 진짜 가버리지는 않겠지.
묘한 설렘과 걱정. 그러나 집에 들어가 보라는 말에도 요지부동 없는 영준의 뒷모습을 보는 혜경의 얼굴에는 안도감이 스친다. 이후 영준을 집으로 초대하고, 세상에 둘도 없을 가벼운 몸짓으로 영준의 몸을 어루만진다. 그리고 다음날, 부질없음을 알면서도 영준에게 묻는다.
진심으로 나랑 살고 싶어? 진심으로 날 사랑해줄 수 있어? 진심으로 날 이곳에서 구해줄 수 있어?
떨리는 동공으로 재차 확인을 거듭하는 혜경은, 이미 다른 누군가의 수많은 거짓말을 겪어왔기에 의심을 버릴 수가 없다. 그러나 동시에, 다른 누군가의 수많은 거짓말을 겪어왔기에 이번에는 더욱 절박하게 믿고 싶다. 그걸 믿냐는 영준의 말에, 혜경은 온몸이 비어버리는 표정으로 잡채를 삼킨다. 자신 있게 요리한 맛있는 잡채는 입안에서 뻣뻣하게 맴돈다. 돈을 구해줄 테니 알아서 하라는 영준의 말에 그를 한번 쳐다보지도 못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박중길을 향한 사랑과 영준으로 인해 흔들리는 감정은, 상대방을 향한 애정인 동시에 이 삶을 탈출하고 싶다는 갈망이다. 그래서 혜경은 자꾸 믿는다. 혜경이 마음을 주고 마는 사내들은 혜경에게 애정이자 희망 그 자체이기 때문에. 더 이상 사람을 믿지 않는 것도 쉽지 않지만, 희망을 믿지 않는 것은 더더욱 쉽지 않다. 혜경의 절박함은 '마지막으로 <이 사람>을 믿어보자' 보다는 '마지막으로 이 사람을 <믿어보자>'에 가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혜경의 인생은, 텐프로에서 단란주점으로, 단란주점에서 마약 중독자의 애인으로, 자꾸만 나락으로 나락으로 떨어지게 되는데 이 모든 것이 오히려 이곳을 탈출하고 싶은 욕망에서 비롯되는 결과다. (그래서 더 처절하게 느껴진다)
혜경이 약점이라며 달콤한 눈빛으로 발목을 잡아채던 영준도 결국은 같은 사람, 무뢰한일 뿐이다. 다음날 아침 차가운 이불만 남기고 말 한마디 없이 떠나버릴 사람. 벌써 가버리지 말라는 혜경의 말에, 전화를 마친 영준은 다시 돌아와 보잘것없는 보금자리에 눕지만, 결국은 또 마찬가지다. 영준은 뒤에 있는 혜경을 잠시 돌아볼 수는 있으나 방향을 바꾸고 뒤를 돌아 혜경의 옆에 서지는 않는다. 지금까지의 모든 이들이 그랬듯. 그래서 혜경은 또 희망에 버림받고 만다.
재곤은 결국 밑바닥까지 떨어진 혜경의 곁에서 그림자처럼 선다.
그녀를 구하러 왔을까, 또는 그녀에게 용서를 구하러 왔을까. 혜경은 그에게 화를 내지도, 소리를 지르지도 못한다. 그저 한 번 노려보고, 지나칠 뿐이다. 그러나 끊임없이 인지하고 있다. 겨울날 파리하게 비를 맞고 서서, 이전보다 더 고독한 얼굴로 서있는 그를 인지하고 있다. 그는 과연 혜경에게 또 다른 희망을 주러 왔을까. 이번에는 영준이 아닌 재곤이라는 이름으로. 과연 그녀는 재곤을, 또는 재곤이 줄 희망을 믿었을까.
마지막 장면에서 혜경이 재곤을 포옹과 함께 칼로 찌르는 장면은 사람마다 해석의 차이가 있는듯하다. 아마 본인의 경험이나 평소에 사랑에 대해 갖고 있는 생각이나, 관계를 맺을 때 상대방을 생각하고 그에게 행동하는 방식 등이 반영되어 각기 다른 이유로 이해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나는 혜경의 행동이, 재곤의 변명에 대한 분노와 그런 재곤, 아니 영준을 결국 믿고 또 마음을 주고 말았던 본인에 대한 실망, 분노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여겼다.
재곤은 변명한다. 나는 형사고, 너는 범죄자의 애인이고, 나는 내가 할 일을 했던 것이지 너를 배신한 것이 아니라고. 혜경을 향해 쏟아 뱉는 말들은 결국 자신의 죄책감을 덜기 위한 비겁한 달음박질이다. 혜경의 입장에서 이제 재곤은 혜경이 사랑했던 남자를 죽인 사람이자, 책임지지 못할 희망을 심어준 사람이 되었다. 그는 책임지지 못할 희망을 잔뜩 뿌려놓았지만 그 영토를 파스랗게 불 질러 놓고 떠나버렸다.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는 잔인한 황무지를 만들어놓고 떠나버렸다. 그리고 다시 나타났다.
그리고 이제는 모든 것을 하얀 재로 날려버렸다.
이제 모든 것을 포기한 듯한 표정으로 세상의 그 어떤 풍파도 조용히 흘려보낼 것 같던 혜경은 그렇게 자리에서 일어난다. 칼을 들고 재곤을 안는다. 재곤은 다른 이들을 보내고 혼자 자리를 떠난다. 혜경은 자리에 주저앉아 몸을 떨며 서럽게 운다.
마지막 재곤의 대사로 미루어보건대, 아마 재곤은 본인 딴에는 그것이 면죄부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나는 재곤이 혜경을 너무나 사랑했기 때문에 잊지 못하고 찾아간 것이라고 단언할 수 없었다. 결국은 재곤 자신이, 본인을 갑갑하게 옥죄고 있는 그 모든 생각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자행한 일이다. 이제 재곤은 범죄현장에서 우연히 만난 가정폭력 희생자 여인의 팔목에서도 혜경을 향한 죄책감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악에 받쳐 낮은 자존감과 높은 자존심으로 '나 김혜경이야'를 외치던 여자, 그 여자를 밑바닥까지 끌어내리고 그녀의 밑바닥을 보았다. 그것을 다시 하수구로 처박는다.
그리고 여자의 단죄를 받았다. 이 과정을 통해, 이제 재곤에게 혜경은 '자신이 아프게 한 인물'이 아닌 '자신이 한때 만났었던' 여인으로 재 호칭된다.
재곤은 웃는다. 죄책감을 덜기 위한 자신의 행위가 목적을 달성한 것에 기뻐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