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1. 달라스BBQ(타임스퀘어), 타임스퀘어, 6번가
비행기에서 많이 자지 않는 터라, 그래도 혹시 하루 만에 시차 적응할 수 있지 않을까 내심 기대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정확히 4시에 눈이 떠졌다. 다시 잠들려고 노력하다가도 아예 이대로 깨어있다가 밤에 잠드는 게 낫지 않을까 싶어졌다.
첫날은 숙소에 짐을 풀자마자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왔다. 처음 며칠 같이 방을 쓴 언니들은 친절하고 말도 잘 통해서 이것저것 물으며 도움을 많이 받았다. 가장 창가 쪽에 있는 언니는 심지어 뉴욕이 벌써 6번째 방문이라고 했다. 뉴욕과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밝고 살갑고 화려했다. 다른 언니는 이 언니와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조용하고 친절하면서도 차분했는데 이 언니도 그 도시와 어울리는 것 같았다. 워낙 이것저것 섞여 있다 보니 이 사람도 어울리고 저 사람도 어울리는 것 같았다.
민박집 사장님에게 잠깐 설명을 듣고 저녁을 먹기 위해 타임스퀘어로 향했다. 5개의 공연을 예매해왔다고 하자 다들 제법 놀라는 눈치였다. 사실은 그냥 공연 보러 온 거나 다름이 없어서요 라고 말하자 누구나 자기만의 목적을 품고 찾아오는 곳 아니겠냐고 말해주었다.
조금의 틈도 없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건물들이 신기했다. 차선이 전부 일방통행인 것도 새로운 풍경이었다. 교통체증이 어마어마했고 누구나 신호를 무시했으며 클랙슨 소리도 신경질적으로 거리를 채웠다. 사람들은 너무나 자유롭게 도로에서 담배를 태웠다. 꽁초는 길바닥에 버리거나 쓰레기통에 버린다. 그렇게 많은 사람이 담배를 피우는 것에 비해 길거리에 꽁초는 뜻밖에 많이 없는 편이었는데 자세히 살펴보니 아침저녁 할 것 없이 도로를 치우는 꽤 많은 인력이 있었다(물론 그런다고 해도 거리는 너무 더럽다.) 도로 곳곳에 쓰레기통이 꽤 빈번하게 보였다. 길에 침 뱉는 사람도 많았다.
홈리스들은 문구가 적힌 보드를 들고 자리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말을 걸거나 자신의 세계에 빠져있었다. 타임스퀘어로 가는 길인데도 뜻밖에 동양인을 포함한 유색인종이 길에 많지 않아 약간 긴장했다.
펜 스테이션에서 타임스퀘어는 지하철을 이용하면 5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지만, 첫날이고 길을 파악하는 게 좋겠다 싶어 도보를 이용했다. 나중에야 길이 눈에 익어 가까운 거리로 느껴졌지만, 외국인들로 가득 찬가득찬 거리를 혼자 걷고 있자니 불안한 마음이 컸다. 계속해서 구글맵을 활용했다. 구글맵은 중간중간 내 위치를 못 잡아 헛걸음을 시키기도 했지만, 실시간으로 교통정보를 제공해주고 온갖 길을 다 알려주었기 때문에 생명 판 역할을 했다.
무게 때문에 어깨가 아프긴 했으나 제 몫을 톡톡하게 해준 샤오미 보조 배터리는 산소호흡기나 다름없었다. 길을 걷다 보면 많은 관광객이 나침판마냥 구글 지도를 켜고 제 자리에서 빙글빙글 도는 모습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나도 그중 하나였다. 나 같은 경우 구글 맵과 yelp는 아예 바탕화면에 꺼내놓고 시도 때도 없이 접속했다.
길마다 번호가 매겨져 있고 전부 다 직선으로 뻗어있기 때문에 사실 도시의 구조를 이해하면 쉽게 길을 찾을 수도 있었겠으나, 그 지역 사람이 아닌 다음에야 아무리 번호가 크게 쓰여 있어도 헷갈리는 것이 부지기수였다.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나는 마지막까지 동쪽, 서쪽, 북쪽, 남쪽 등의 숫자와 방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그냥 구글맵을 켜고 죽어라 걷곤했다.
립 바베큐를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미국에 왔으니 미국 음식 먹어봐야 하지 않겠냐고 첫 식당으로 정한 곳이 댈러스 비비큐였다. 우리나라로 치면 TGI 금요일 같은 느낌이 강했다. 뜻밖에 관광객만큼 현지 사람들도 많은 느낌이었는데 한 3층짜리 대형 삼겹살집 가는 것과 비슷할까 싶었다. 큰 닭 다리와 삶은 감자, 카스텔라, 등 갈비 쪽이 나왔다.
솔직히 말하면 썩 훌륭한 맛은 아니었다. 그냥 우리나라에서 먹는 입술립 맛이었고 빵은 왠지 이 번쩍거리는 분위기와 다르게 금욕적인 맛이었다. 치킨은 우리나라에서 먹는 치킨보다 오히려 통닭 뜯는 느낌이 강했다. 다들 자기 얼굴만 한칵테일을 마시고 있었는데 첫날부터 알딸딸해지고 싶지 않아서 그냥 콜라만 마셨다. 그 큰 음식점에 동양인도 별로 없고 혼자 온 사람은 여자 남자 통틀어서 나 혼자였다. 오른쪽에 카메라를 짊어진 것이 마치 '저 여행객입니다. 반가워요. 웰컴 미' 라고 말하는 것 같아 쑥스러웠다.
토익책에 나오는 발음의 외국인들과 말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는데 다른 발음을 가진 할아버지가 서빙을 받자 얼굴이 빨개지며 한참을 뻘뻘 거리게 되었다. 팁 문화는 항상 익숙하지 않아서 계산기를 두드리기 일쑤였다.
대망의 타임스퀘어.
금요일 초저녁에 방문했는데도 사람이 많았다. 서울이나 도쿄에 사람이 많았던 것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전반적으로 도시의 몇몇 면모는 오히려 북경과 비슷하다는 생각도 많이 했다.
뉴욕을 다루는 많은 글들이 이야기하듯, 타임스퀘어는 우리나라의 명동같은 존재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굳이 놀러갈때 명동에 가지 않는것과 별개로 현지 사람들도 관광객 친구가 오지 않는한은 굳이 시간내어 방문하지 않는 곳이라고 했다. 중간중간 이야기를 나눈 관광객들 중에서도 타임스퀘어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좋았다. 뉴욕에서 가장 좋았던 장소 중 하나를 꼽으라면 어김없이 타임스퀘어를 꼽을 것이다. 바깥 사람들에게 보여지는 미국의 이미지가 응축되어있는 공간처럼 다가왔다. 잠들지 않는 거리, 화려한 전광판, 다국적 기업의 광고들과 셀수없이 모여든 사람들. 낮이고 밤이고 제 위용을 자랑하는 전광판을 바라다보며 누구나 고개를 쳐들고 있었다. 바닥에 가득 들어찬 지저분한 쓰레기들과 계속되는 호객행위, 번쩍거리는 하늘과 땅바닥 전부 다 내가 생각한 미국 그리고 뉴욕 그 자체였다.
집을 나설 때는 날씨가 너무 좋아 차마 상상도 하지 못했는데 갑자기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원래 우산을 잘 쓰지 않는 편이라 웬만한 비는 맞으려고 했는데 갑자기 폭우가 쏟아졌다. '미국은 비 내리는 규모도 다르네!'라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의 폭우였다. 급한 김에 디즈니 가게 옆에 MAC 지붕에 서서 비를 피했다. 어느새 우산 파는 사람들이 등장해 관광객들에게 바가지를 씌우고 있었다. 관광객들은 기꺼이 바가지를 썼다. 그런 공간이려니 싶었다.
처마가 나와 있는 곳은 이 화장품가게밖에 없어 많은 사람이 마치 연회장처럼 지붕 밑에 서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비가 오는 와중에 셀카를 시도하려는 나에게 어떤 중국인이 말을 걸었다. 제 몸만 한 카메라 삼각대를 지니고 있어 당연히 같은 관광객이라고 생각했다. 비가 오는데 셀피 찍기 힘들지 않냐며 사진을 찍어주겠단다. 그 자리에 서서 비가 오는 동안 20분 정도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름은 쿤이었다.
우리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에도 많은 사람이 지붕을 오갔다. 한국인 아저씨와 아주머니들도 나에게 말을 많이 걸었다. 차마 혼자 왔다고 생각하지는 못했었다며 한 아주머니는 계속해서 조심하라는 말을 반복했다.
쿤은 뉴욕에서 일하면서 취미로 사진을 찍는다고 했다. 중국인이었지만 이미 뉴욕에서 생활한 지는 4년 정도 되었다며 이것저것 관광지에 대한 논평을 덧붙여주었다.
어느정도 비가 그치고 길을 다시 나서려 하자 셀피 말고 사진 찍어주겠다고 해 함께 거리 밖으로 나왔다. 아이폰으로 찍은 사진인데 꽤 멋졌다. 바닥에 아직도 물이 촉촉하게 남아있어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는 간판 불빛이 정신없이 반사됐다. 땅바닥이 반사판이니 사진이 못나올수가 있나. 찍고 나서는 나도 놀라울 정도의 사진이 나왔다. 연신 감사하다고 이야기하며 사진을 보는 와중에 쿤이 내 핸드폰을 가리키며 '어!' 라고 말했다.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포스터 중 하나, 월터가 타임스퀘어를 걷고 있는 장면을 핸드폰 배경으로 해놓았었는데 자기도 이 영화를 가장 좋아한다며 심지어 월터의 옆 거리에 자신이 살고 있다는 것이다. 혹시 이 영화에 있는 장면들도 방문해보았냐며 바로 이 옆인데 이렇게 가면 된다고 친절하게 구글맵까지 켜서 보여주었다.
비도 그쳤겠다 멋진 사진도 건졌겠다 이것저것 알려주기도 한 것이 고마워서 옆의 스타벅스에 들어가서 커피를 한잔 샀다. 여기서 5분 거리에 월터 미티의직장이 있는데 한번 가보겠냐고 묻길래, 친척 진경이를 만나기 전에 시간이 남아 그러자고 했다. 중국에서 3개월 지내며 그래도 아직 희미하게 기억에 남아있는 언어 몇 개를 사용하며 이야기했다. 꽤 즐거운 시간이었다. 6번가를 돌아 집까지 가면 딱 시간이 되겠다 싶어 젖은 거리를 걸었다.
어마어마한 건물숲이 등장했다. 6번가라고 했다. 신문과 뉴스를 지나가며 접했을 사람들도 다 알만한 유명 기관들과 회사들이 저마다 하늘로 쭉쭉 뻗어있었다. 타임스퀘어에 비해 관광객은 적어 보였지만 양복을 입은 직장인들이 많이 지나갔다. 도로가 넓고 컸다. 사람들은 여전히 신호를 무시했다.
그렇게 한 5~10분을 걷다보니... 응????
우와!!!!!!!!!!!!!!!!
처음 욘사마를 보러 오신 니혼진 어머니들께서 남이섬을 보셨을때 이런 기분이었을까... 놀라워하는 나를 보며 쿤은 '이게 바로 뉴욕의 매력인듯' 하고 짚어주었다. 그 점은 여행 마지막까지도 진심으로 인정하고 공감했다. 사실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이 영화는 나에게 있어 단순히 감동적이었던 영화를 넘어서서 많은 의미를 가진 영화다. 취업준비생때 친구와 이 영화를 극장에서 봤는데 몇몇 장면에서 말그대로 뜨거운 눈물을 흘렸던 기억이 난다. 뉴욕으로 출발하기 전 나주에서 서울로 올라오면서도 한 번 더 봤었다. 뉴욕으로 향하는 비행기에서도 게속해서 OST를 돌려들었다. 그 공간이 눈앞에 있다! 와!
이 요상하게 생긴 지붕 밑을 오가면서 월터는 일상과 비일상, 상상과 현실 사이를 쉼없이 뛰어다닌다. 마침내에는 stop dreaming, start living을 실천하게 된다.
사실 그냥 사무실들이 널린 공간으로도 볼 수 있겠지만 영화나 개인적인 경험과 결합하니 뭐랄까 이 공간 자체가 소중하게 느껴져서, 며칠 후 다시 한번 더 걸어서 방문했다.
생중계로 뉴스가 진행되고 있었다. 뒤에서 얼쩡거리면 나오지 않을까 했는데 한 3분정도 서성였지만 찍히지는 않았다.
지나가는 길에 우연히 보게 된 뉴욕 타임즈 건물.
고마웠다며 굿바이 인사를 나누고 집에 왔다. 숙소에서 보는 뷰는 저녁이 더 멋졌다. 루프탑에 올라가기는 시간도 애매하고 비에 젖었을 것 같아 방에서 짐 정리를 좀 하다가 진경이가 숙소 근처로 와서 내려가서 만났다.
지금 뉴욕에서 로스쿨에 재학중인 사촌동생은 예전에 한국에서 외국인학교를 다니거나 둘다 학생일때만 해도 방학때마다 볼 수 있었는데 이제 둘다 서로 보기가 힘들어졌다. 신정때도 보지 못해 1년을 훌쩍 넘겨 겨우 만난 기분이었다. yelp를 검색했더니 주변에 괜찮은 맥주집이 있다고 해서 들어갔다. 나초를 시켰는데 완전 미국의 맛. 짜고 달고 살찔 것 같은 이 어마어마한 맛에 정신이 다 혼미했다. 쌉사래한 맥주와 정신없이 들이키다보니 어느새 밤이 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