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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버트 Oct 28. 2015

트립 투 뉴욕 얼론 - 5

Day2. 소호, 매디슨 스퀘어 가든, 브루클린 브리지 야경


쇼핑을 하려면 소호를 꼭 가길래 소호는 오히려 일정에서 빼놓은 상태였는데(?) 브라이언트 파크에 오래 앉아있기 너무 추워서 지하철 노선을 뒤져 다음 행선지를 찾았다. 한국에 비하면 정말 후지다고밖에 할 수 없는 뉴욕 지하철 때문에 길 찾는데 애를 많이 먹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했지만 일단 노선 변경 자체가 잦고 구간 폐쇄 등도 길에 붙은 벽보로 다 알아채야 한다. 로컬과 익스프레스 구분도 헷갈려서 올바른 지하철을 탔다가도 졸아서 내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다만 어느 정도 시스템을 파악하고 난 후에는 지하철이 위아래로 가는 방향이 맞는지 먼저 확인하고, 지하철에 붙어있는 노선표에 이름이 없더라도 street number가 오름/내림차순으로 움직이면 그러려니 기다리고 앉아있었다.

가장 치명적인 것은 전화도 인터넷도 터지지 않아 지금 내가 제대로 가고 있긴 한 건지 도무지 파악이 안된다는 것이었다.
소호에 갈 때도 한번 정도는 제대로 가고 있는 건지 확실하지 않아 중간에 내렸는데 알고 보니 제대로 가고 있었다. 울고 싶었다.

 





나는 기본적으로 쇼핑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 아니 정확히 말하면 쇼핑을 잘 못하는 사람이라 소호에서 큰 감흥을 느끼지는 못했다. 한국에 비해 물건이 크게 다른 것도 잘 못 느꼈다. 가격은 더욱 마찬가지였다. 어차피 물건이란 할인해서 싼 것은 안 예뻐서 사기 싫고 예뻐서 사고 싶은 건 내가 사기엔 너무 비싸다. 이 만고불변의 진리는 미국에서도 통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호에 방문한 것은 이미 소호라는 공간의 이름이 그 자체로 브랜드를 형성하고 일종의 대명사처럼 여겨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전날 만난 중국인 쿤은 '소호에 가면 자기가 어떻게 보이는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신경 쓴 사람들이 많지'라고 했는데 그 말에 백 퍼센트 공감했다. 핫한 쇼핑 플레이스 그 자체였다. 확실히 관광객만 많은 타임스퀘어에 비해 깨끗했고 예쁘고 잘생긴 백인들도 많았으며 우리가 드라마에서 보았던 것처럼 빳빳한 쇼핑백을 든 사람들이 바쁘게 걸음을 옮겼다.
한국에서 쉬이 살 수 없는 청바지라도 하나 살까 싶어 리바이스에 들어갔는데 의외로 리바이스 청바지가 거기서도 짧아서 실망스러웠다. 자라는 너무 미국 미국 하여 여기서는 예뻐도 한국에 돌아오면 입지 못할 옷 투성이었고 에이치앤엠은 사람이 너무 많아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그나마 망고에서 괜찮은 옷 두 벌을 발견해 피팅도 해보고 계산을 하러 계산대 앞에 갔다.

해외에 나간다고 신용카드를 따로 만들지는 않았다. 기존에 쓰던 우리은행 체크카드가 비자카드로도 사용이 가능해서 어차피 카드는 많이 쓰지 않을 테니 수수료 좀 물지 뭐 하는 생각으로 들고 갔다(사전에 전화해서 확인하는 것이 필요함, 다른 우리은행 신용카드는 마스터카드였는데 이건 또 해외에서 사용이 안된다고 했다) 계산하려고 하니 여권을 보여달라 하고(관광객에게는 신분증 요구하는 경우가 종종 있음) 핀코드를 입력하라길래 입력했다.

그런데 응? 핀코드가 갑자기 틀리다는 것이다.
그럴 리가 없는데 싶어 다시 눌렀더니 또 안됐다.

출국 한 달 전 카드를 새로 만들었기 때문에 핀코드를 잘못 기억할리 없었다. 다른 번호를 눌러보려 하니 점원이 나를 제지했다. 핀코드를 여러 번 잘못 입력하면 카드가 막힐 수도 있는데 한번 너희 나라에 전화를 걸어보는 게 어떻냐며 패닉이 온 나를 친절하게 달래줬다. 바로 우리은행과 우리 카드에 전화를 했으나 돌아오는 대답은 지금 한국 시간으로는 새벽이고 전산점검 중이어서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는 것이다. 당장 지낼 돈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해외출금까지 신청해서 고이고이 들고 온 카드를 못쓴다니 황당하고 불안했다.

얼마나 당황했냐면 소호에서 구경하다가 숙소로 빠르게 다시 돌아왔다. 옷가지를 챙기려 다시 들어오려 하긴 했으나 멘붕이 온 탓이 컸다.


숙소 근처 현금인출기 앞에서 오류라고 뜨는 핀코드를 세 번 정도 더 입력했다. 마지막 한방만 남았다. 핀코드를 다섯 번 잘못 입력하면 카드 자체가 먹통이 되기 때문에 우리은행 지점을 방문하지 않으면 전화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말만 계속됐다. 모르겠다 전산점검 중이라 확인이 불가능하다는 말만 반복하는 여러 응답원들에게 짜증이 났다. 그들에게 짜증내 봤자 달라지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걸 알면서도... 화를 꾹꾹 참으며 마지막으로 우리 카드에 전화를 걸었을 때 상담원 왈.
우리은행이 오늘 전산시스템 점검이라 새벽 6시, 뉴욕 시간으로 오후 5시까지 체크카드 시스템이 마비된 것으로 알고 있으니 혹시 5시 1분에 인출 또는 결제를 시도해보시고 정 안되시면 이틀 후 월요일에 한인타운에 있는 우리은행을 방문해보라는 것이다. 그 전화를 4시 40분쯤 걸었는데 5시 1분까지의 20분이 영원한 세월처럼 느껴졌다. 나중에 엄마에게 이 일을 이야기하니 그게 뭐라고 그렇게 신경을 썼냐 어이구 라고 말하긴 했으나... 그게 뭐였다.... 혼자 카드를 들고 해외로 나간 건 처음이라 식은땀이 뻘뻘 났다.


결론은 됐다.
여기서 잠깐 우리은행 시스템에 대한 불만을 털어놓자면 정기적인 점검임은 알겠으나 우리나라 시스템을 새벽에 점검한답시고 해외 신용카드, 체크카드까지 전부 막아버리니 한창 카드 쓸 시간인 해외에서는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홈페이지에도 그저 전산시스템으로 인해 현금인출이 안된다는 말만 간단하게 적혀있을 뿐이었는데 어쨌든 해외 가맹점이나 신용카드 서비스를 함께 제공하는 이상 이와 관련한 멘트도 같이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아 그리고 참고로 카드 비밀번호는 4자리인데 도대체 6자리의 핀번호는 어떻게 입력하라는 거냐는 글도 많이 봤는데(20분간 수십 개의 게시물을 본 듯) 핀번호를 자신이 설정하지 않은 이상 보통 카드 비밀번호 4자리 뒤에 00을 붙이면 핀번호 6자리가 된다고 한다.

 







이와 같은 멘붕의 여정 동안에도 여전히 지하철이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걷고 걷고 또 걸었다. 소호에서 일단 돈은 나중에 생각하자 싶어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내렸다. 위시빈을 이용해서 30분 단위로 짜 놓았던 일정은 사실상 말짱 도루묵이었다. 지하철 역을 찾지 못해 정처 없이 걷다 보면 어느새 내일 또는 내일모레 방문하려고 했던 스폿을 지나쳤다. 어디 가서 길 찾아가기로는 꿇리지 않아 남의 나라에서도 당연히 무리 없을 줄 알았는데 결코 아니었다. 덕분에 명품에 관심 없어 재껴두었던 5번가를 여행 내내 가장 자주 지나쳤다.


 






뉴욕에서 먹었던 몇 안 되는 맛있는 음식 중 하나. 매디슨 스퀘어 가든도 구경하고 쉑쉑 버거도 먹을까 해서 앞을 지나가는데 도저히 기다릴 엄두가 안나는 줄이 늘어서있었다. 원래 줄 서서 먹는 것을 싫어하고 햄버거가 그래 봤자 햄버거지 싶어 쉑쉑 버거는 포기하고 yelp를 켰다. 가고 싶은 음식점이 몇몇 있었는데 휴일이라 쉬길래 근처를 돌아보다가 CHOP'T를 발견했다.
한 단어 요약하자면 샐러드 가게다.

풀어 이야기하자면 서브웨이처럼 안에 들어가는 재료들을 고르면 찹찹 섞어주는 가게다. 기본적으로 몇 개의 좋은 조합이 메뉴판에 적혀있으나 다른 재료들을 마음껏 첨가하거나 소스를 바꿀 수도 있다. 이전에 미국에 와서 채소를 먹을 수 있다는 게 반가웠다는 포스팅이 기억났다. 무엇을 먹겠냐고 묻길래 마법의 주문..... 나 여행객이니까 네가 추천해주라 를 시전 하니 경쾌하게 웃으며 오케이 했다. 가게는 전반적으로 싱그러운 초록색이 가득한 인테리어를 자랑했다. 어머니들 김장김치 담그실 것 같은 큰 양푼에 채소와 고기 등을 넣고 마구 섞는다. 그걸 옆사람이 넘겨받아 어마 무지하게 생긴 작두로 철썩철썩 썰어냈다. 소스를 팍팍 뿌려 버무린다. 그걸 사람 머리통만 한 그릇에 담아주었다.

웰빙과 다이어트 식품이라 생각하며 먹겠으나 이 양과 소스의 꾸덕함으로 보아서 결코 다이어트 자체에 도움이 될 것 같진 않은 음식이었다.
가게에서 먹으려다가 포장해 나와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 앉았다. 촌스럽게도 진저에일을 이번에 미국 가는 비행기에서 처음 마셔봤는데 부담스럽게 달지도 않은 것이 딱 입맛에 맞았다. 사람을 전혀 무서워하지 않는듯한 청설모가 뛰어다니는 거리에서 혼자 열심히 샐러드를 퍼먹었다. 말 그대로 참 맛난 샐러드였으나 양이 어마 무지해 반만 먹고 반은 남겨두었다. 남은 샐러드는 숙소 냉장고에 넣어두었다가 다음날 아침 든든하게 먹을 수 있었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 하키였나 야구였나 럭비였나 어쨌든 펜스테이션 앞에서 꽤 큰 이벤트가 진행되고 있었다. 뭔지도 모르지만 사람들이 많이 모여있어 일단 사진은 찍어두었다.

카드도 일단 해결되었고.... 저녁에는 브루클린 브릿지로 야경을 보러 갈까 해서 옷을 단단하게 챙겨 입었다. 일교차가 심한 것이 여행객에게 얼마나 번거로운 일인지를 톡톡히 느꼈다. 가방이 무거워 지갑조차 빼고 다니고 싶은 상황에서 카디건까지 하나 챙겨 다니려니 죽을 맛이었다. 배낭을 메고 다니는 것이 현명할 뻔했는데 쫄보라 혹시 누가 배낭 열어갈까 봐 그러지도 못했다. 나중에 보니 외국인 관광객들은 다 야무지게 배낭 메고 다니던데 내가 오버하였던 것 같다.


 





브루클린 브리지 위에서 야경을 볼 때는 시청 쪽에서 브루클린으로 건너오거나 브루클린에서 뉴욕 내로 건너오는 방법이 있는데 후자를 택했다. 브루클린에 내리는 사람들을 졸졸 쫓아가다 보니 어느새 다리 입구가 나왔다.

 












운 좋게 노을 지는 시간에 맞추어 다리를 방문했다. 붉어지는 하늘과 어두워지는 강물 위에서 다리가 빛났다. 저마다의 언어를 쓰는 사람들이 사랑하는 사람들과 또는 사랑하는 자신과 다리를 건넜다. 정신없이 사진을 찍다가 또 잠깐은 멈추어서 야경을 바라보기만 했다. 여기저기서 전 세계 언어가 들렸다.
청승맞게 눈물이 날뻔했다.








소올직히 말하자면 야경이 아름다웠던 것은 사실이지만 브루클린 브릿지에서 보는 야경이 특별히 다른 도시 또는 다른 장소에서 보는 야경보다 아름다웠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서울의 한적한 곳에서 혼자 봤던 야경에 비해 각기 다른 곳에서 온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보고 있다는 점이 꽤 인상적이었다.

 











많은 이들이 살고 있다. 내가 모르는 내가 처음 방문한 낯선 곳에서. 각자 자신의 이야기를 품은 채로 바쁘게 살아간다. 세상의 중심이라 여겨지는 이 도시에서. 그리고 지금 내가 그곳에 와있다. 모두가 가보고 싶어 하는 도시에 와있다. 그곳에서 모두가 보고 싶어 하는 풍경을 보고 있다. 그게 기분이 참 묘했다.
하나의 불빛 불빛. 취업준비를 하며 남산에 올라 매일같이 야경을 볼 때, 나는 나의 생을 찬미하고 싶었다. 그리고 곧 바쁘게 야근하는 저 빛에 속할 수 있을 것이라고, 그러고 나면 지금 이 모든 괴로움과 번뇌는 사라질 것이라고 깜빡거리는 희망을 품었다. 휴가를 받아 찾아온 도시에서 불빛을 보면서 나는 이제 무엇을 희망으로 삼아야 하는 것인지, 또는 무엇을 사랑하며 살아야 하는 것인지 혼란스러웠다. 그래서 그냥 걸었다. 계속 걸었다.






말은 이리했지만 사실 지나가는 사람들한테 사진 찍어달라고 구걸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혼자 하는 여행의 최대 단점. ㅠㅠ


브루클린 브릿지: 바람의 다리..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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