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리포터 스튜디오에서 너무 많이 걸었던 탓일까 아침에 일어나니 다리가 아팠다. 침대에서 조금 더 늦장을 부리고 싶었지만 첫 번째 일정이 콜롬비아로드 꽃 시장이었기에 천근만근인 몸을 이끌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날씨가 너무 좋아 숙소에서 조금 먼 버스정류장에서 출발하자는 게 길을 헤매 30분이나 넘게 근처를 헤매고 말았다. 30분 정도를 걷고 걸어서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콜롬비아 시장은 각종 꽃과 식물, 원예와 관련된 장비들을 판매하는 전통 있는 꽃 시장이라고 한다. 토요일 오전 8시부터 오후 3시까지만 오픈하기 때문에 발걸음을 서둘렀다. 버스정류장에서 내려서 걷다 보면 '이 길이 맞나' 싶을 정도로 평범한 주택가를 만나게 된다. 정말 이 골목 안에 시장이 있을까 의심하지만 어느새 주변을 둘러보면 꽃을 한 아름씩 안고 가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그때쯤 되면 제대로 된 길을 가고 있구나, 안심이 된다.
시장 초입에 들어섰을 때 '헉 예상했던 것보다 사람이 너무 많은 걸'이라고 생각했는데 이건 시작에 불과하다. 본격적인 꽃 시장에는 길 양 옆으로 진열대에 꽃이 가득한데 그 꽃들보다 사람이 더 많다. 런던에서 갔던 그 어떤 곳보다도 사람이 많아서, 제대로 걷지 못하고 사람들에 쓸려 다녔다.
심지어 이것보다도 더 많다... 길에 사람이 빼곡하게 들어차서 도저히 걸을 수가 없는 상태.
그래도 열심히 팔을 쳐들고 지나가며 만날 수 있는 화분, 꽃을 찍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이 저마다 꽃을 한아름씩 들고 가는데 정말 보기 좋았다. 그리고 생각보다 꽃이 저렴해서 놀랐다. 혹자는 이 마켓에서 파는 꽃들이 도매로 판매하는 꽃들이기 때문에 저렴하다고는 하지만 런던을 돌아다니는 내내 슈퍼에서도 저렴한 가격의 꽃다발들을 만날 수 있었다.
한국에서의 꽃, 화분 가격을 생각해보면 정말 싸다. 그래서 그런지 사람들이 자주 많이 사가는 모양이었다. 레몬이 대롱대롱 달린 레몬 나무를 싸안고 가는 사람도 봤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그득그득 풀을 싸안고 간다. 여기서부터는 녹색 감상을 잠시 하시죠.
나도 꽃을 한 다발 사고 싶어서 앞을 한참이나 서성였다. 뒤에 특별한 일정이 없이 카페에서 책을 읽을까 했기에 들고 다니는데도 큰 무리가 없어 보였다. 결국 분홍색 튤립을 한 다발 샀다. 한 다발에 6천 원 꼴인데 세 개 사면 만 삼천 원이니까 한국에 비하면 정말 싸다.
박스를 늘어놓고 파는 할아버지도 계시길래 그 근처에 가서 보니 각종 구근을 팔고 있었다.
생각보다 구근들도 너무 예쁘게 잘 정돈되어 있어 놀랐다.
한참을 사람들 속에 치여 걷다 보니 배가 고파졌다. 꽃 시장을 지나고 나면 공원 앞에서 간단한 요깃거리를 판다. 사람들이 꽤 길게 줄 서 있는 천막을 보니 달걀빵도 아닌 것이 너무나 맛있어 보여서 일단 하나 샀다. 잔디밭 여기저기 사람들이 앉아있길래 나도 주저앉았다. 알고 보니 계란을 반숙으로 삶고 그 주변을 다진 돼지고기로 감싼 후 빵가루 입혀 튀긴 스카치 에그라는 요리.
굵게 뿌려준 소금과 후추가 신의 한 수였다.
조금 한적한 골목길 틈으로 젊은이들을 따라가다 보면 많은 관광객들이 추천하는 브릭 레인 마켓이 나온다.
그런데 솔직히 난 브릭 레인 마켓은 별로였다.
스티커를 보며 맥북에 붙이고 싶다 생각하는 나는 병자다.
이미 콜롬비아 로드 마켓에서 너무나 많은 사람들을 지나쳐야 해서 진이 빠졌던 데다가 길 여기저기서 판매하는 기념품들도 특이해 보이지 않았다. 다만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는 가판대들이 정말 많았고 정말 컸다. 사람들도 정말 많았고 여기저기서 파는 길거리 음식들의 종류도 다양했다. 이날 너무 피곤해서 그랬지 아마 런던에 처음 오는 사람들이라면 모두 좋아할 것 같기는 했다.
거리 자체가 멋스러웠고 파는 물건들도 깔끔한 빈티지 상품이 많았다. 그런데 솔직히 빈티지 알못이라.
사람 구경만 열심히 하다가. 밥 먹는 것도 깜빡했다. 사람이 많아서 도저히 줄 서서 음식 살 기운이 없었다.
세계 음식을 어디서나 파는 영국(?)
브릭 레인 마켓이 일요일에만 열린다고 해서 일부러 그렇게 루트를 짰는데, 평일에 이곳을 들러보지 못한 게 아쉽다. 길거리에 가득한 상점들은 보지 않아도 괜찮으니, 보다 더 한적한 분위기에서 다양한 그라피티와 그림들을 보는 게 더 좋았을지도 모른다.
관광객이 많다 보니 혼자 거리에 서서 사진을 찍거나 핸드폰을 들여다보면 다른 관광객들이 와서 말을 걸기도 했다. 철저하게 혼자였던 런던 여행에서 아마 누군가 말을 걸었던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것 같다. 부담스러운 인사말들은 제쳐두고 승아, 허 기자님의 추천으로 받은 LONDON'S BEST COFFEE 앱을 켰다. 유료 앱인데 각 지도상에 커피 전문가들, 커피 애호가들이 꼽은 좋은/멋진 커피숍을 소개하는 정보가 빼곡하게 담겨있다. 걸어서 20분 거리에 '워크숍 커피'라는 곳의 커피맛이 좋다고 해서 일단 걷기 시작했다.
붐비는 거리를 지나 한참이나 걷다 보니 어느새 도착했다. 일요일이기도 하고 워낙 번화가에서 떨어진 곳이라 그런지 한적한 분위기가 제법 마음에 들었다.
창가 테이블에 자리 잡고 커피를 한 잔 시켰다.
고소한 커피맛. 리디북스 페이퍼를 켜고 조지 오웰의 '버마 시절'을 읽었다. 조지 오웰을 좋아해서 몇 번이나 읽어본 1984를 또 읽을까 했지만, 왠지 새로운 책을 도전하고 싶어 '버마 시절'을 켰다. 이 책을 안 읽었다면 다음 며칠 간의 런던 여행이 약간 섭섭했을 정도로 재미있는 책이었다.
역자 해설을 바탕으로 책의 내용을 요약해보자면, '버마 시절'은 조지 오웰이 젊은 시절 버마에서 겪은 영국 식민주의 정책을 비판하는 소설이다. 작가는 이 소설에서 영국의 식민주의 정책을 반대하고 대영 제국주의의 허구성과 억압상을 증오하지만 이 이데올로기에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못하고 살다가 절망하고 마는 주인공을 그렸다. 백인 식민주의자들이 참석하는 클럽과 그 클럽을 둘러싼 원주민들의 이야기로 이루어진다. 책의 주인공들은 내내 백인우월주의로 대변되는 생물학적 법칙을 주장하고 제국주의를 제창한다. 그렇다고 선/악 구도가 백인들과 원주민들로 극명하게 나뉘는 것은 아니어서 더 흥미로운 책이었다. 역자 해설의 마지막 문단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결론적으로 '버마 시절'은 버마 원주민들에게 가하는 영국 제국주의 정책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인 동시에, 그러한 제국주의가 인간의 보편적 삶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을 탐색하는 날카로운 시선이다. 즉 피지배자들은 물론 지배자 자신들조차 자기 파멸료 연결된다는 것이다. 무력하게 죽어 가는 플로리처럼 제국주의라는 정치 메커니즘에 항거를 하는 이든, 혹은 클럽 회원처럼 그 메커니즘에 봉사해 권력을 휘두르는 이든, 거기에 속한 인간 개개인의 삶은 어떤 식으로든 파멸하거나 타락한다는 사실이다. 나아가 여기서 묘사되고 잇는 제국주의라는 현실 세계는 지금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지만, 그 본질은 또 다른 모습으로 오늘날 이 순간에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음을 우리는 깨달아야 할 것이다.
월요일부터의 일정은 대부분이 박물관과 미술관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이 지겨울 정도로 엄청난 유산 집합(?) 들을 보면서 여행 중에 '버마 시절'을 읽어 차라리 다행이었다고 느꼈다.
그리고 놀랍게도 영국에서의 첫 맥주였다.
한참 책을 읽고 있을 때 점원이 와서 일요일이라 여섯 시에 문을 닫는다 했다. 벌써 숙소로 들어가기는 아깝고 무엇을 하면 좋을지 고민하다가, 버스를 타고 패딩턴으로 가서 다음 날 옥스퍼드에 갈 표를 미리 구입하기로 결심했다. 날씨는 여전히 좋았다. 조금 쌀쌀했다.
한 번 정도 버스를 갈아타고 패딩턴 역에서 내렸다. 사람들이 적어놓은 것보다 훨씬 더 웅장하고 크게 느껴지는 역이라 깜짝 놀랐다. 역에 들어가면 곳곳에 파란색 자판기가 있는데 자판기를 이용하면 아주 쉽게 표를 구입할 수 있다. 잘 모르겠을 땐 옆에 있는 역무원들에게 물어보면 굉장히 친절하게 알려준다.
원래 옥스퍼드에 갈 계획은 없었다. 뉴욕에 있을 때도 뉴욕 보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없어 브루클린까지도 내려가지 않았었다. 그래도 옥스퍼드는 꼭 가보는 게 좋다는 나리님의 추천에 급하게 일정을 변경했었는데 안 갔으면 정말 후회할 뻔했다. 사실 이때 표 뽑을 때만 해도 내일 옥스퍼드를 가는 게 정말 좋을지 긴가민가했었다.
아주아주 친절하게 왕복표를 끊으면 됨. 인터넷으로 싸면 훨씬 더 싼데 시간 많은 쫄보는 직접 사는 것으로...
집에 오는 길에는 딱히 식당에 가서 먹고 싶은 게 없어 또 PRET을 샀다.
방에 꽃을 꽂아두긴 아쉬워 사장님에게 선물로 드렸더니 크게 좋아해 주시면서 부엌에 꽃을 꽂아두셨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런던 더 하우스' 민박집 진짜 최고다. 이날은 사장님과 앉아 한참이고 수다를 떨다 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