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제이 칼럼 ; 이번 주말에는 이 전시회가 어떨까요)
이른 시간 현관문을 나서는 가장의 뒷모습이 쓸쓸하다. 양복을 입고 넥타이를 맨 가장에게서 매일의 권태와 살육의 희생양이 되지 않으려는 셔츠 깃의 날 선 빳빳한 긴장감를 느낀다. 최전선으로 향하는 용사가 군복을 입고 나서는 모양새다. 가정의 유지와 존속을 위해 사회인 최전선 노동의 현장에서 보이지 않는 피를 흘리며 언제 목이 달아날지 모르는 간담이 서늘한 위기를 모면하며 숨막히는 일터에서 하루하루를 버텨낸다. 통장을 스쳐 지나갈뿐인 월급날을 위해 하루, 한 달, 몇 해를 살아낸다. 양복 아래에 숨겨둔 수류탄과 보이지 않은 총을 장전한, 무력한 현대인의 군상, 그들의 이름은 무장한 가장이다.
무장가장 武裝家長
작가 허보리는 작가노트에서 이렇게 말한다
"전투정신을 말하되. 어떠한 상처도 줄 수 없는 무기력한 무기들의 질감으로 그 아이러니함으로 표현하고자 했다. 더 격렬하게 쓸모가 없는 무기들이다."
작가 허보리는 대상에 대한 해학적인 해석을 통한 위트있는 세계관을 캔버스에 구축하는 작업을 해왔다. 2009년 ‘생활의 발견’이라는 주제를 시작으로 주변 사물을 대하는 시선을 작품에서 꾸밈없이 드러냈다. 이 시점의 작품들은 물적 특성을 지닌 일상적 소재를, 비슷하지만 동일한 사물이 아닌 새로운 사물로 재창조 해 내는, 초현실적 기법이 돋보였다. 양육자로서 여성의 성정체성을 고심했던 흔적이 보석반지, 냄비나 하이힐 등의 여성적 전유물 통해 드러나며, 출산, 가사노동과 육아의 경험을 통한 자아적 표출욕구를 캔버스 안으로 그대로 이동시켜 놓는다. 이런 여러가지 시도들은 정물화에서 풍경화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보여진다.
이전작이 개인의 시선을 사물에 동일시한 은유적 대입 기법이었다면, 2012년부터 그녀의 작품은 좀 더 확장된 자아와의 소통을 꾀하는 사유의 흔적을 보여준다. 기존의 페인팅 작품이 출산과 양육에 부딪힌 현실의 한계를 벗어나려는 에고ego적 일상의 투덜거림이었다면, 이후는 자아의 재귀적 ‘해방解放적 비상구'를 찾으려는 새로운 움직임을 모색하게 된다. 작가의 대학시절 바느질을 이용한 설치 미술 작업의 경험을 되살려 3차원(현실세계)에서 그녀의 분신으로 투영된 개체들은 기존의 캔버스라는 2차적 한계공간에서 벗어나 좀 더 능동적으로 표현되는데 <줄줄이 소세지를 피한 은둔>은 가변적 설치 구조물을 통해 자기애적 배출행위를, <나무집>은 외부와의 일시적인 단절을 통한 도피성 자기 고백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오랫동안 시도해온 사물의 변형을 꾀한 기발하고 재치있는 발상의 전환의 내공때문인지 작가의 작품은 제목처럼 결코 삭막하거나 부정적이지 않다. 오히려 감상자에게 박애주의적인 메시지를. 따스한 유대감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이후 '마음의 포수’라는 주제의 연작을 선보이게 되는데 필자는 작가 허보리의 2013년 이후의 캔버스와 붓이 소재가 된 작품에 주목한다. 그녀의 분신이자 표출욕구를 지닌, 해방되고 싶은 자아는 붓이나 캔버스로 투영되는데, 부화를 통해 알에서 깨어나 스스로 걸어나온 캔버스가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해야만 한다'는 데미안의 아브락사스를 떠올리게 했기 때문이다.
캔버스는 날개가 생겨 날아오르기도 <A Flying painting >, 풍선에 의해 수동적으로 날기도 하고 <A Floating Painting> ,산에 올라 휴식을 취하거나 <정상에 오르다_휴> , <정상에 오르다_ 야호> 소리내며 생동한다. 발을 얻은 캔버스는 빨간 샌들을 신거나 등산화를 신은 그녀(그)가 때로는 <A climibing Painting> 의 제목으로 즉, 산으로 가는 그림이다. 이는 마치 속담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 를 연상시키며 미소를 자아낸다.
<점진적 트레이닝>을 받으며 끊임없이 정진하는 캔버스는 <용기있는 자는 영원히 기억 될 거에요>에서 화려하고 과감한 색채가 입혀져 영광의 트로피가 된 순간에도 땀을 흘리듯 뚝뚝 물감을 벗어낸다.
무색의 원시상태로 온전히 머물고 싶은, 작가 허보리의 욕망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그녀가 그림을 그리는 행위 자체의 종착지는 덧칠로 보여지는 채색된 캔버스가 아닐런지도 모른다.
<맨발의 순결한> 캔버스는 자신이 캔버스화 시켜버린 그 화려한 벽 앞에 우두커니 앉아있다. 회귀의 '무' 로 돌아간 캔버스의 여백은 감상자에게 갑갑한 세속에서도 숨쉴수 있는 조그마한 틈을 내어준다. 역설적이게도 비어있는 캔버스를 보며 비로소 순간의 자유를 느낀다.
좌측 상단의 몽환적인 한줄기 빛이 탁자의 사물을 비추고, 철모위에 부유하는 먼지들이 내려앉아 정체된 무한한 시간. 그 옆에는 곧 재가 되어 사라질 담배 한개피 만이 즉물적인 시간성을 부여한다. 가장자리가 헤지고 이리저리 얽힌 바느질이 비죽이 나와있는 천으로 덧대진 무기들은 전쟁터에 사용 할 수 없는, 무가치 용물이다. 그러나 이런 무용성은 겉에 둘러싸인 부드러운 넥타이 천 안에서 새로운 사물로 부활한다. 이 무기의 허울은 화이트 칼라의 상징이었으나 본질은 부드러운 천조각으로 무기의 기능을 제거시킨 해체된 넥타이다. 종내는 죽음으로 점철될 인간사의 헛된 삶 마저 부드럽게 껴안으려는 작가가 가진 특유의 긍정적 체념이 드러난다. 실소가 터지려는 일순간 감상자들에게 갑갑한 일상의 일각의 여유를 선사해주는 것이다.
그녀가 구축한 화폭 안에서 사물은 결코 발버둥치는 자아극복의 오기나 집념, 세상을 바꾸려는 완벽주의적 강박은 없이 본래 주어진 기능이나 용도에서 일탈하는 자율성을 획득한다. 따라서 감상자는 자유의 예속이라는 구속된 설정에서 벗어나 편안함을 느끼는 것이 자연스럽다. 피할 수 있다면 도망치고, 숨고, 스스로를 보호하려는 약한 본능과 마주하고, 푹신푹신한 <나무집>으로 올라가 다시는 내려오지 않을것처럼. 누워있다는 이 상상만으로 소박한 평온이 밀려들어온다.
참고:
작가 허보리 <부드러운 정물> 원작은 17세기의 네델란드의 하르멘 스텐베이크의 [인간 생활의 허영] 정물화로 바니타스; 즉, 인생무상과 죽음을 직면한 삶의 허영을 직시하며 관람자들이 부질없는 삶을 부유하는 수동적 인간임을 자각하게 된다는 정물화이다. 허보리 작가의 ‘부드러운 정물’은 바니타스의 정물화를 그녀가 천착해온 익숙한 정물로 대치한 일종의 오마쥬이다.
2016년에 이르러 그녀의 작품은 '무장가장'을 통해 삶의 근원적인 노동의 생태를 표현한 이전 작품을 발판 삼아, 공동체 의식(식구)로 이동하는 듯하다. 생계적 노동의 원인인 양육과 그 노동의 결과물인 먹잇감 (육식의 상징,고기)을 화두로 <채끝살 니들 드로잉>과 <4인 삽탁>이라는 작업을 선보였다. 그녀의 기발한 재치와 위트가 버무려져 식탁에 올려질 음식이 기대가 된다. 마치 아기새가 어미가 물고 오는 먹이를 기다리듯.
글 : 이윤진 (YoonJ)
작가 허보리 전시회 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신한 갤러리 역삼 공모 5주년 기획전 : 5인의 HIGH NOON>
http://www.shinhangallery.co.kr/yo/index
참여작가 : 김유정, 이들닙, 임영주, 최병석, 허보리
전시 일정 : 2017-01-19~2017-03-16
오시는 길 :
참조 작품 출처 : 작가 허보리의 홈페이지 http://www.hurbore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