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설의 '오늘의 잇컬러'
한가한 주말 오후였어요.
침대에 누워 늦게까지 유튜브를 보다가
우연히 월레스와 그로밋을 보게 되었어요.
주인공 월레스는 집에 치즈가 떨어지자
“달은 치즈로 만들어졌다”고 믿고
로켓을 타고 달로 출발합니다.
그리고 달 표면을 잘라
치즈를 비스킷 위에 얹어 먹어요.
그 장면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보았습니다.
입에 침이 고이면서
나도 먹고싶다!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바로 근처 마트에 가서
버터 하나를 사서, 갓 구운 토스트 위에
듬뿍 발라 먹었습니다.
물론 월레스가 먹은 것은 치즈예요.
하지만 그 장면을 보고 떠올린 색은 치즈의 단단한 노랑이 아니라
버터처럼 부드러운 옐로우였어요.
고소한 풍미가 입안 가득 퍼졌고
토스트를 두 장 넘게 먹었어요.
그날 이후로 저의 주말 루틴이 되어버렸어요.
버터를 바르면서도 계속 겹겹이 더 바르고 싶어져요.
느끼할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쉽게 포기할 수가 없었어요.
당장이라도 빵에 발라 먹고싶은 작품이 있습니다.
프랑스 사실주의 화가 Antoine Vollon이 19세기에 그린 버터 더미(Mound of Butter)입니다.
이 작품에는 우아한 꽃이나 과일, 반짝이는 식기가 등장하지 않습니다.
실온의 탁자 위에 무심히 올려진 커다란 버터 덩어리 하나가 전부입니다.
형태는 어딘가 무너져 있고 윤기는 과장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이 그림은 콕 찔러 만져보고 싶고, 당장이라도 먹고 싶다는 감각을 불러옵니다.
미술사에서 볼롱의 정물화는 사물의 외형적 아름다움보다
질량감과 재료가 지닌 물질적 존재감을 강조한 작업으로 평가됩니다.
이 그림 속 버터 옐로우는 보이는 색이라기보다 만지고 싶은 색에 가깝습니다.
눈보다 촉각이 먼저 반응하는 색처럼 느껴집니다.
따뜻하고 고소한, 손에 닿을 것 같은 따뜻한 버터 옐로우입니다.
중세 유럽에서 버터의 색은 생활 조건의 차이, 신분을 드러내는 단서였습니다.
풀을 먹고 자란 소의 우유에는 베타카로틴(beta-carotene) 성분이 풍부해 버터가 자연스럽게 짙은 노란색을 띠었는데, 이는 자연 방목이 가능했던 농민과 시골 지역에서 먹었던 버터의 특징이었습니다.
반대로 도시와 귀족 계층은 관리된 축사에서 곡물 사료를 먹인 소를 사육하는 경우가 많았고, 만들어진 버터는 색이 연하거나 거의 흰색에 가까웠습니다.
이렇듯 버터의 색과 질감만 보아도 그 사람이 어떤 환경에서 살았는지,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자연스럽게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버터 타워’라는 말을 들어보셨나요?
이름만 들으면 왠지 버터로 만든 커다란 건물이 떠오르지 않나요?
아마 은연중에 알고 계실지도 모릅니다.
인상주의 화가 클로드 모네가 그린 루앙 대성당 연작 때문입니다.
이 성당에는 실제로 ‘버터 타워(Tour de Beurre)’라는 별명이 붙은 탑이 있습니다.
중세 가톨릭 사회에서 버터는 금식 기간에 금지된 음식이었습니다.
특히 14세기 이후, 흑사병이 퍼지며 교리가 더욱 엄격해지자, 버터는 단순한 식재료를 넘어 사회적 논쟁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이 시기 교회는 사순절 동안 고기뿐 아니라 버터와 크림 같은 동물성 지방도 욕망을 자극하는 음식으로 보고 금지했습니다. 하지만 축산업이 삶의 기반이던 북유럽 지역 사람들에게 버터를 완전히 끊는 일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습니다.
결국 교회는 금식 기간에 버터를 먹는 죄를 돈으로 용서해 주는 방식, 즉 ‘버터 면죄부’를 허락합니다.
프랑스 북서부 지역의 루앙 교구는 이 면죄부로 막대한 수입을 얻게 되었고, 그 재원으로 루앙 대성당에 탑을 증축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이 탑을 자연스럽게 ‘버터 타워’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이렇듯 버터는 그저 빵에 발라 먹는 음식이 아니라, 사람들이 포기할 수 없었던 삶의 일부였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제 곧 한 해가 끝나갑니다.
돌아보면 이 한 해도
크고 작은 일들로
꽤 바쁘게 지나온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오늘,
한 해의 마지막 브런치 스토리를 쓰면서
기억에 남는 것은
거창한 일이 아니라
주말 늦은 오후에
토스트에 발라 먹었던
버터 한 조각이었습니다.
유튜브를 보다가
문득 버터가 먹고 싶어졌고,
먹다 보니, 그 색에 담긴 이야기까지
천천히 따라오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소소한 일상 속에도
저마다의 의미와 이야기가 숨어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느끼게 됩니다.
‘오늘의 잇컬러’가
앞으로도
이런 작은 순간들에
조용히 스며드는 이야기로
여러분 곁에 머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컬러 하나하나에 깃든 의미처럼,
여러분의 하루하루도
다채로운 색으로 채워지길 바랍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