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자'를 위한 애정어린 변명
(스포일러 엄청많습니다.)
1. 서른두살이 너무 늦은거라면, 저한테는 아무 것도 없는 거예요.
수년전 취업준비생 시절, 밤마다 KBS에서 방영하는 <동행>이라는 프로그램을 봤던 적이 있었다. 나보다 훨씬 힘든 환경 속에서, 꿈조차 사치인 그들이 그럼에도 '선함'을 놓지않고 꿋꿋하게 살아가는 모습이 힘이 되기도 하고 슬프기도 했던 것 같다. 당시 유행했던 SNS인 트위터에 "왜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모두 착한걸까"라는 식의 글을 끼적거리기도 했던게 기억난다.
영화 <밀리언달러베이비>의 주인공인 매기 역시, '착하고 힘들게 살아가는' 여자다. 어려운 가정환경에서 별다른 지원을 받지 못하고 자란 그는, 서른두살이라는 늦은 나이에 복서가 되겠다는 꿈을 꾸며 살아가고 있다. 음식점 서빙을 하며 손님이 남긴 음식으로 끼니를 떼우고, 동네 허름한 체육관을 드나들며 코치도 없이 혼자서 연습을 하곤한다. 힘든 상황에도 매기는 정직하게 돈을 벌고, 하루도 연습을 게을리하지 않는 것이다. 매기는 체육관을 운영하고 있는 전직 코치 프랭키에게 가르침을 받고 싶어하지만, 프랭키는 나이를 들먹이며-사실 나이보다도 더 이상 선수에게 상처받기 싫은 프랭키의 마음이 더 큰 이유였지만- 매기를 제자로 받기를 거부한다. "누구도 서른 살에 발레리나가 되려하지 않는다"며 거절하는 프랭키에게 매기는 화를 내며 자신의 본심을 전한다. "문제는 그럼에도 복싱이 너무 좋다는 거예요. 서른 두살이라는 나이가 늦다면 저한테는 이제 아무 것도 없는 거예요." 매기의 본심은 통했고, 프랭키는 그를 제자로 받아들인다. 착하고 성실하게 노력해왔던 주인공에게 드디어 기회가 열린 것이다.
2. 복서로 살면서 스스로를 온전히 보호한다는 것의 모순
프랭키는 '타이틀전'에 대한 악몽이 있는 코치다. 그가 키웠던 선수들이 타이틀전에서 회복불가능한 상처를 입고 패배한 것에 대한 트라우마 때문에, 타이틀전 데뷔를 두려워한다. 결국 복서로 성공을 꿈꾸는 제자들은 결국 프랭키를 떠나고말고, 프랭키는 새로운 제자가 된 매기에게도 늘 '자신을 보호할 것'을 최우선으로 강조한다. 그리고 이 '스스로에 대한 보호'는 단순히 물리적인 상처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영화 <밀리언달러베이비>에는 '복싱'이라는 스포츠를 인생에 비유하는 대사가 많이 등장한다. 가려고 하는 방향과 반대로 가야할 때가 많고, 위험이 닥치면 피하는것보다 그 위험 안으로 파고드는게 도움이 된다는 것 등의 대사는 의미심장하다. 그 중에서도 가장 핵심적인 비유는, 온 몸을 이용해 싸우면서도 몸을 보호해야 하는 복싱의 아이러니가 마치 온갖 부정과 부도덕함으로 얼룩진 사회에서 혼자 꼿꼿한 도덕심을 지키며 살아가려고 하는 이들 인생의 고단함과 닮아있다는 점일 것이다.
매기 역시 크고 작은 경기에서 승리를 거머쥐고, '몸값'을 높여가는 과정에서 자본만을 좇으려는 유혹에도 직면(파이 가게에서 미키 맥을 만나는 장면)하고, 반칙의 욕구에 스스로를 맡기기도(푸른곰 빌리의 취약점인 엉덩이를 심판몰래 연타하는 장면) 한다. 사실 복서로 성공하고 싶다는 '꿈'은 필연적으로 '세속적이고 사회적인 성공'에 대한 야심으로 치환되는데, 그것이 순수한 열정만으로 이루어지기란 극도로 어렵다는 것이 인생이라는 링위의 우리 모두가 겪게 되는 '함정'이기도 하다. "언제나 자신을 보호하라"는 프랭키의 말이 '어떤 상황에서도 타락하지말라'는 말로 읽히는 이유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끊임없는 길'에도 노력이 필요한 것은 당연하다. 프랭키는 게일어를 공부하고, 예이츠의 시를 손에서 놓지 않는다. 노년의 나이에 이르러서까지 성품을 함양하기를 게을리하지않는다는 증거다. 그는 부유하지도 않으면서 돈 안되는 선수를 키우고, 심지어 자기 돈을 내가며 선수를 육성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이쯤되면 "돈 되는거 빼고 다 한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다. 영화 속 프랭키의 딸이 그와 연락을 끊은 이유는 끝내 나오지 않지만, 아마도 프랭키의 이같은 현실감없는 삶의 태도와 그것에서 기인한 경제적 어려움도 한몫하지 않았을까 하는 짐작이 가는 것은 이런 대목들 덕분이다. 딸은 아마도 보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아버지'를 바랐을 것이다. 그리고 영화의 말미에, 이 모든 이야기는 '아버지가 이런 사람이었다는 것만은 알아달라'는 부탁으로 써진 글이었다는 점이 밝혀지면서, 영화 <밀리언달러베이비>는 사회적 시선으로 바라본 '패자'에 대한 애정어린 변명이라는 점이 분명히 드러난다.
3. "이런 사람들은 스스로를 잘 용서하지 못해요"
매기도 결국 '패자'가 된다. 매기는 타이틀전에서, 동독의 창녀출신이며 반칙경기를 일삼는 '푸른곰빌리'를 만나 고전한다. 하지만 프랭키와의 환상적인 호흡으로, 승리를 목전에 둔 상황에서 빌리의 반칙공격으로 매기는 온몸에 큰 상처를 입고 쓰러지고 만다. 이때 병원에 실려간 매기가 내뱉는 탄식이 기가 막히다.
매기는 "손을 내리지 말았어야 했어요", "뒤돌아보지 말았어야 했어요"라며 후회하는데, 빌리로 인해 자신의 인생이 완전히 '망해'버렸음에도 그를 욕하고 원망하는 대신 '언제나 스스로를 보호하는 것이 먼저'라는 프랭키의 지침을 지키지 못한 자신을 탓하는 것이다. 이처럼 매기 같은 류의 사람들은, 스스로를 잘 용서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스스로를 잘 용서하지 못해요"라는 말은, 프랭키가 매주 찾아가는 성당의 목사가 매기의 안락사를 고민하며 찾아온 프랭키에게 해준 말이기도 하다. '스스로(의 도덕성을)를 보호하며 사는 이들은 이처럼, 자신의 도덕적 흠결을 견디기 힘들어한다.
반면 매기의 상대역이자 그의 삶을 죽음으로 내몰게 된 동독 창녀 출신인 '푸른곰 빌리'는, 매기와는 완전히 다른 인물이다. 그는 프랭키와 매기의 시선으로 봤을 때 분명 '스스로를 보호하지 않는 일'일 것임에 분명한 사창가 출신이며, 복서로 전향 후에도 반칙을 일삼으며 단지 승리만을 목표로 한다. 푸른곰빌리에 대한 설명은, 계속되는 독백에서 등장하는 이 한마디로 설명이 가능하다. “살인도 눈깜빡하지 않고 저지를 여자였어” 이 대사는, 승리(사회적인 성공)을 위해서라면 가장 극악무도한 죄까지도 저지를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는 푸른곰을 두고 '그러니 인기가 있을수밖에'라고 하는 설명은, 세속적인 성공에 대한 클린트이스트우드 감독의 생각을 잘 드러내는 대목인것처럼 보인다.
4. 레몬파이와 모쿠슈라, 그리고 밀리언달러베이비
결국 매기는 짧은 생을 병원에서 마감한다. 영화 <밀리언달러베이비>는 '꿈'에 대한 영화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확실히 그 꿈을 이룬다는 '결과'에 집중하는 영화는 아니고, 정말로 결과에 상관없이 '과정'이 중요하다고 말해주는 영화다. 클린트이스트우드감독의 시선에서는 반칙으로 승승장구하는 '빌리'보다는 정정당당한 승리로 인해 얻었던 사람들의 환호를 기억하고, '모쿠슈라(나의 소중한 혈육)'라는 애정어린 호칭으로 불리며 영원히 잠든 '매기'가 진정한 인생의 승리자인 것이다.
매기가 진정한 인생의 승리자인 이유는, 그는 '스스로를 지키는 삶'을 살다갔기 때문이다. 가족들에게 상처를 받은 날, 매기는 프랭키를 어릴적 자주갔던 맛있는 레몬파이집에 데리고 간다. 그 레몬파이를 맛본 프랭키는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겠군"이라는 말을 한다. 삶은 스스로를 지키며 살때만이 의미가 있으며, 그저 살아있는 동안에 '죽어도 여한이 없을만큼 소중한 순간들'을 모으며 충실히 살아가는게 중요하다. 영화 제목인 '밀리언달러베이비'는 잘알려진대로, '싸구려 물건을 모아놓는 가게에서 발견한 백만달러의 값어치가 있는 물건'이라는 뜻인데, 프랭키와 매기가 서로를 만나고 알아보고 함께한 시간은 말 그대로 '밀리언달러베이비'였을 것이다.
영화의 말미에서는, 체육관 동료들과의 장난같은 싸움에서 패한 후 체육관을 떠났던 데인저가 돌아온다. 이제는 프랭키 대신, 그리고 매기 대신, 데인저가 새로운 꿈을 키워나갈 것이라는 암시다. 그 꿈이 이루어질지 아닐지는 아무도 모르지만-그의 실력과 프랭키의 부재, 매기의 전철 등을 생각해보면 해피엔딩이 아닐 가능성이 커보이긴 하지만- 힘든 현실 속에서 좌절하지 않고 꿈을 키워나가는 데인저의 삶은 스스로는 누구보다 행복할 것이다.
이쯤되면 위에서 말한 '착한 사람들은 모두 힘들게 산다'는 말도 사실은, 그저 악착같이 성공과 생존만을 좇는 이들의 잣대를 그대로 답습하는 어리석음의 발로일지도 모른다. 영화 속에서 매기의 고통을 보며 힘들어하는 프랭키에게 에디는 "접시를 닦는 많은 사람들은 그저 '기회가 없었다'고 말하지, 자네는 매기에게 그 기회를 준거야"라는 말을 한다.-영화 속 에디의 존재는, 이런 이들에게 응원을 보내는 신의 존재라고 보아도 극의 흐름에 아무 지장이 없는 것 같다. - 그런 기회를 만들어주는 체육관이야말로 허름한 동네의 '밀리언달러베이비'가 아닌가 싶다. 그 곳을 운영한 인생을 '실패한' 인생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 땅의 삶이 끝나고 하늘로 돌아갔을 때, 신은 세속적 성공을 거둔 이들보다 프랭키같은 이들의 삶을 칭찬해줄지도 모를 일이다. (프랭키가 매기를 두고 하는 말인 '모쿠슈라'는, 신은 매기나 프랭키같은 이들을 혈육-하나님의 자녀같은?으로 여긴다는 의미도 담고 있는 것 같다. 클린트이스트감독의 종교는 기독교라고 알고 있다) 물론 '스스로를 잘 용서하지못하는이들'에게는 그 어떤 것보다 스스로의 만족이 중요하기에, 아무도 칭찬해주지않는다해도, 전혀 상관이 없겠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