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질병

by 이작가야


나에겐 오랜 고질병이 있다. '소화불량'이라는 점잖은 표현보다는 '체한다'는 말이 훨씬 잘 어울리는 증상인데, 문제는 체하고 나면 두통이 세트 메뉴처럼 반드시 따라온다는 것이다. 속만 더부룩하면 그나마 봐줄 만하겠지만 내 몸은 그런 자비 같은 걸 모른다. 체하면 반드시 머리가 아프고, 머리가 아프면 일상이 멈춘다. 신경성으로도 체하고, 추운 곳에서 뭔가를 먹어도 체한다. 겨울엔 특히 자주 체하는데 아마도 움직이길 극도로 싫어하는 내 몸이 스스로의 게으름에 항의하는 방식인 것 같다. 그래서 우리 집엔 소화제와 두통약이 항상 구비되어 있다.

그냥 소화제는 잘 듣지도 않는다. 환으로 된 소화제가 그나마 효과적이고, 그것만으로도 해결이 안 되면 타이레놀까지 추가해야 비로소 '살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내 몸은 단품 메뉴를 거부하고 꼭 풀코스를 요구한다.


나름 계획이 있었다. 우체국에 들러 서류를 보내고 카페에 가서 밀린 일을 처리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러나 이틀째 이어진 편두통이 그 계획을 조용히 박살 냈다. 이동하는 내내 아무것도 하기 싫어졌고 근처 병원을 검색하던 나는 왜인지 모르겠지만 생뚱맞게도 한의원을 선택했다.





소화제를 먹고도 도저히 안 될 때 꺼내드는 극약처방이 있다. 바로 손 따기.

의사들이 TV에 나와 "손 따기는 효과가 없습니다, 2차 감염을 조심하세요"라고 경고하지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예로부터 내려온 민간요법은 생각보다 신비롭다. 왜냐? 어린 시절부터 내 몸에 먹혔으니까. 알코올 솜과 1회용 주사침만 잘 갖춰두면 뭐가 문제겠는가. 아! 딱 하나 있다. 아프다는 것. 그래서 나는 고통이 최종 단계에 이르지 않으면 최대한 손을 따지 않는다. 아픔에도 나름의 기준이 있다.


체혈기가 없던 시절엔 바늘로 양쪽 엄지손가락을 땄다. 엄마가 등을 두드리며 피를 손 쪽으로 모을 때면 두통 때문에 골이 울리곤 했다. 실로 엄지손가락을 둘러맨 뒤 소독한 바늘로 엄지 끝을 찌른다. 한 번에 제대로 안 찔리면 피가 날 때까지 두세 번은 더 찔러야 한다. 그러면 정말로 검은 피가 흘러나온다. 꽉 체함의 기준은 늘 '검은 피'였다. 체혈기를 쓰는 요즘은 원샷원킬이 가능하지만, '열 손가락을 다 따야 효과가 있다'는 엄마의 강요(?)에 양손에 피를 모두 봐야만 끝이 난다. 꽉 체했을 땐 발가락까지 따야 하니 이건 진정 최후의 수단으로만 꺼내야 한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한의원에서도 손을 따줄 거라 기대했다. 그러나 자연치유를 중요하게 여긴다는 한의원은 한약을 한 잔 주시더니 진맥을 하고는 "위장부터 대장까지 막혀있고, 좌우 골반도 틀어져 있네요"라는 진단을 내리셨다. 며칠 전부터 아파온 오른쪽 발목도 골반이 틀어진 탓이라며 1차로 다리에 침을 놔주셨다.

가만히 누워있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아프고 속이 울렁거렸지만 15분을 참았다. 그다음엔 몸을 뒤집어 목부터 척추, 허리, 종아리까지 침과 부항을 적절히 섞어 치료해 주셨다. 당장 손가락을 따달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이럴 때마다 I 성향이 극도로 강해지는 나는 좌우로 머리를 눕혀가며 조용히 참았다. '나아지고 있는 건가? 머리가 덜 아픈가?' 반쯤 자기 최면 같은 생각들을 반복하다 치료가 끝났다. 허리 물리치료도 해주시겠다 했지만 우선 당장 일어나고 싶어 거절했다. 그게 끝이었다. 뒤통수에 침을 놓거나 내 손가락을 따주며 트림과 함께 소화가 되는 극적인 장면 같은 건 일어나지 않았다. 한의사 선생님도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그렇게 나는 그냥, 한의원 가서 침 맞고 온 사람이 되었다.



그래도 다행인 건 두통이 조금은 나아진 것 같다는 것이다. 아니, 솔직히 모르겠다. 한의원을 나오자마자 1층 약국으로 내려가 환으로 된 소화제와 마시는 약을 함께 챙겨 먹었다. 좀 살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고 아무것도 하기 싫던 나는 다시 키보드를 두드릴 수 있는 상태로 돌아왔다.

이만 원 가까이 치료비를 냈는데 한의원 효과가 전혀 없다고 생각하고 싶진 않다. '그냥 오늘 내 몸이 침 치료를 받고 싶었나 보지..' 계속 아팠다면 한의원에 대한 원망만 늘었겠지만 이제야 좀 살 것 같으니 이 정도 너그러운 평가는 가능하다.


어쩐지 이틀 동안 먹고 싶은 게 없더라니. 난 또 요즘 최고 몸무게를 갱신한 내 몸이 스스로 정신을 차리고 있는 중인 줄 알았다. 그러나 내 몸은 고질병을 알아채고 스스로 살기 위해 방어막을 친 것이었다. 체했으니 그만 먹으라는 거다.


지금도 고통이 사라지고 나니 돌아오는 건 아쉬움뿐이다. 그동안 위 관리를 못 한 것에 대한 아쉬움? 아니다. 원래 가려던 카페의 초콜릿케이크 — 맛있다는 후기를 보고 잔뜩 기대했건만 — 그 케이크와 커피를 포기하고 티 한 잔으로 합의한 것에 대한 아쉬움이다. 그래도 하루쯤은 몸에게 져줘야 하지 않겠나. 환 소화제 대신 한의원을 선택한 것보다도 큰 아쉬움이다.


아무래도 이 고질병, 사라지지 않는 게 아니라 사라지지 못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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