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님은 나에게 남자 앞에선 술을 마시라고 말했다

1편.

by 이작가야


교수님은 나에게 남자 앞에선 술을 마시라고 말했다.



그때의 나는 그 말에 의미를 정확히 알지 못했다. 연기 전공임에도 1년에 다섯 번 술을 마실까 말까 했었고 눈치껏 교묘히 잘 빠져나가는 학생이자 동기들에겐 다소 무서운 언니, 누나였기에 억지로 마실 필요가 없었다. 유일하게 마시는 술이라곤 '크루저 파란색병.' 그마저도 다 마시고 나면 얼굴과 몸이 온통 빨개졌기에 되도록 술은 입에도 대지 않았다. 그러나 교수님이 '내 앞에 앉은 날'은 피할 수 없는 날이었다. 그땐 어쩔 수 없이 마셔야'만' 했다. 특히 공연 뒤풀이날에는 마시는 '척'이라도 해야만 했다.


맥주 한 잔에 슬슬 몸이 따뜻해지기 시작하며 알콜이 돌고 있음이 느껴졌다. 연기에 대해 이런저런 잔소리를 하던 교수님은 갑자기 나를 빤히 바라보더니 "너는 남자 앞에선 술을 마셔야겠다."라고 말했다. 나는 나의 상태를 모르기에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시간이 지나서야 그 말이 성희롱이나 마찬가지였음을 깨닫는다. '늘 꼿꼿한 네가 술을 마시니 좀 유해지는 것 같다. 그러니 술을 마셔봐라.'라고 말했다면 이야기는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남자 앞에서' 술을 마시라고 했던 그 사람의 말은 술기운에 풀려버리는 나의 눈빛에 대한 말이었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소위 처녀였기에 교수의 성추행으로부터도 벗어날 수 있었다.


미투사건이 터지며 그동안 쉬쉬하였던 연극계의 수많은 사건들이 터져 나왔다. 연기과에선 이미 비일비재한 일이었지만 미투 사건으로 인해 '너희 학교도? 우리도!' 하며 말도 안 되는 상황에 대해 공감하는 일들이 넘쳐났다. 동기들이 모이면 가끔씩 이야길 나누곤 한다. 지금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우리 교수도 만약 잘 나가는 인물 중 하나였다면 아마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었을 거라고. 그 당시에도 우리가 알고 있던 게 다가 아닌 어마어마한 역사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술에 취하면 더더욱 여학생들에게 하는 스킨십이 심해졌었고 나중에는 그걸 당연시 여기는 분위기가 되었다. 정확히 말해 이상하다는 걸 알면서도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를 몰랐다. 이제는 그런 말이 성희롱이고 그런 행동이 성추행이었다는 걸 정확하게 인지하게 되었지만 그때 우린 갓 스물, 스물하나에 사회에 막 나온 풋내기 학생이었을 뿐이었다.


'연기를 잘하기 위해선 연애를 해야 한다'며 내게 늘 연애를 권했던 그분은 동기들에겐 연애금지령을 내려도 나에겐 연애자유권을 부여해 주었다. '여기서 이런 애들과 연애를?'이라는 오만한 생각과 오로지 편입에만 꽂혀있던 나는 교수의 말을 잔소리 마냥 무시하고 좋은 학점 받기에만 열중했다. (내 인생 제일 열심히 살았던 첫 시기가 이때이지 않을까 싶다)


졸업공연 연출을 맡으며 어쩔 수 없이 교수와 대면할 일이 많아져갔다. 늘 팀이 나뉘어있었으나 졸업공연은 모든 인원이 총동원되었기에 교수의 관심 역시 한 작품에만 집중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날은 자취하는 여자 동기들 집에 모여 수다를 떨고 있던 참이었다. 네 명이 두 명씩 나뉘어 양쪽집에 나란히 살고 있었기에 모이기도 쉬웠다. 그런데 갑자기 아무런 예고도 없이 교수가 찾아왔다. (교수는 그 동네 살고 있긴 했지만 아이들이 집을 알려준 적은 없었다. 다른 동기들에게 물어 찾아온 것이었다) 그리곤 바로 옆집 문을 열어달라고 하더니 나에게 "대본 들고 와."라는 말을 하곤 옆집으로 들어가 버렸다. 물론 이유는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 위함'이었다. 뭔가 껄끄럽고 불편했으나 작품 때문에 연출인 나에게 오라 하는데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나마 그동안 나에게 실수한 적은 없었기에 '설마' 하는 마음으로 옆 집으로 건너가게 되었다.


대자로 뻗어 누워있던 교수는 대뜸 자신의 팔을 톡톡 치더니 베고 옆에 누우라고 했다. 대충 웃으며 작품에 대해 궁금한 것들을 물어보았으나 본인은 술을 마셨기에 누워서 이야길 나누자고 말했다. 나는 이게 편하다 했으나 역시 통하지 않았다. '옆에 누워있다 이상한 짓 하면 어떻게 하지?' 괜스레 불안한 감정이 몰렸왔다.


그런데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 동기이자 입시부터 함께 했던 친구가 대본을 들고는 본인 연기를 봐달라고 온 것이었다.


연기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폭력을 써가며 가르치는 교수였다. 그래서 굳이 연습시간이 아닌 이상 먼저 연기를 봐달라 하는 아이들은 많지 않았다. 특히나 그 친구는 메인 역할이라 늘 혼나는 일 밖에 없어 이미 주눅이 잔뜩 들어있는 상태였기에 연기를 봐달라는 건 말이 안 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등장으로 나는 한시름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물론 여자 둘이 나란히 양 옆 팔을 베고 누워 볼에 억지로 뽀뽀를 해야 하는 이상한 상황은 일어났지만..) 역시나 예상처럼 친구는 교수가 나에게 혹여 나쁜 짓이라도 할까 일부러 와준 것이었다. 그녀 덕분에 나는 자칫 위험했을 수도 있는 상황은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학생들을 향한 성희롱은 계속해서 이어졌고, 은연중 나에게 '네가 남자만 만났어도'라는 말을 하곤 했다. 그 말을 들은 친구들은 내가 대학에서 연애를 하지 않은 것이 어쩌면 다행인 것 같다 우스갯소리로 말했다.


교수는 그 이후 어떠한 사건으로 인해 우리를 마지막으로 대학을 떠나야만 했다.







그 사건이 이유도 원인도 되지는 않지만 나는 나의 첫 경험만큼은 내가 원할 때, 내가 원하는 사람과 하고 싶다는 생각을 더 확고히 하며 살아가게 되었다. 그러나 어느덧 사람들이 말하는 보편적인 기준에서 벗어나 버린 나는 문제아가 되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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