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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aka Oct 31. 2024

아이가 세상을 살아가는 법

[인생의 단상]


초등학교 6학년 말,

엄마가 떠나가던 그 해.

특별히 혼란일 것도 없었다.

아이는 이미 예상했던 걸까?

울고 불고 난리 치는 일도 없었다.

지겹도록 부모의 싸움을 보고 자란 아이는

이미 오래전, 스스로 부모와의 정서적 이별을

끝냈었는지도 모른다.

문제를 일으키는 부모 밑에서

나마저 문제를 일으키면

정말 답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걸까?

문제아 아빠와 엄마를 둔 아이는

다행스럽게도 문제아가 되지 않았다.


지금 돌이켜 보면

사이코패스가 아닌가 할 정도로

아이는 차분하게 일상을 이어나갔다.

엄마가 떠난 현실을 부정하지 않고

냉철하게 인지했다.

이제 스스로 밥을 해 먹어야 했고

도시락도 싸야 했다.

홀로서기 위해 가장 먼저 떠올렸던

도전 과제는 장보기.

그때 아이가 가졌던 생각이

또렷이 기억난다.


'혼자 장보기도 할 줄 모르면
넌 앞으로 혼자 아무것도 못하는 거야.'


아파트 상가에 입점한 야채 가게로

장을 보러 갈 때면 잔뜩 긴장했다.

늘 온 가족이 또는 엄마랑 가던 가게다.

눈은 야채를 고르고 있었지만

온 신경은 가게 아줌마를 향해 있었다.

늘 엄마나 아빠가 물어보던 야채 가격을

자신이 묻자니 어색했다.

어른이 묻던 것을 아이가 물으니

혹여 엄마 없는 내 상황을 눈치챌까 봐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가게에 들어설 때마다

아무 일 없다는 듯 보여야 한다는 생각이

뇌를 지배했다.

그렇게 보이기 위해 할 수 있는

뚜렷한 방법이 없는데도, 강박 그 자체를

방법으로 삼았던 것 같다.


어느 날은 매일 장 보는 프로 주부들처럼 굴었다.

사지도 않을 청양 고추 가격은 얼마인지,

500g에 천 원 쓰여 있는 콩나물을

오백 원에 절반만 줄 수 있는지 흥정을 하며

아무 일 없는 아이처럼 보이려 애를 썼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상황을 알아챈

가게 아줌마의 눈빛을 읽을 수 있었다.


'아줌마가 눈치챘구나.'


창피했다.

무슨 잘못이라도 한 것처럼.

하지만 감추고 싶은 수치스러움이 드러났다고 해서

발길을 끊지는 않았다.

중고교 시절 내내 가게를 드나들었다.

하긴 늘 어른과 함께했던 아이가

몇 달도 아닌, 6년 이상을 혼자 장을 보는데

눈치 못 채는 게 이상한 일이다.


그래도 이 첫 도전 과제를

나름 뚝심 있게 해 나간 덕분에

이후 많은 것들을 스스로 해나가기가 수월했다.

학교를 빠지거나 나쁜 아이들과 어울리는 일 없이

수업 참여도도 좋았고, 과제도 착실히 해갔다.

학교 성적은 중상위권에 교우 관계도 좋았다.

도시락도 꼬박꼬박 싸가고, 다양한 학교 행사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꼭 엄마 없는 걸 티 내지 않으려고 그랬다기보다

어느 순간 자기중심적으로 생각이 자리 잡았다.


'부모 인생은 부모 인생이고, 내 인생은 내 인생이지.'


학교 생활 내내 친구들과 선생님들은

엄마 없는 아이라는 걸 거의 눈치채지 못했다.

딱 한 번, 중학교 담임 선생님이 아빠와의 통화 도중에

가정사를 알게 됐다.

그날 지각을 해서 선생님께 혼이 날 줄 알았는데,

다른 때와는 다른,

선생님 눈빛에서 알아차렸다.


'저 가엽게 보는 눈빛, 선생님도 알게 됐구나.'


선생님은 교무실에 아이를 불러 놓고

학교 생활도 잘하고 야무져서 전혀 몰랐다며

자신의 느낀 점을 나열해 갔다.

선생님뿐 아니라, 친척 어른들과 주위 어른들도

말을 맞추기라도 한 것처럼 느낀 점이 비슷했다.

명절 때면, 큰댁 가는 일이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동정 어린 감상평과 딱한 시선을

견뎌야 하는 시간이었으니까.


그들 눈엔 아이가 대견스럽고 착해 보였겠지만

그때 아이 기분은,

야채 가게 아줌마 앞에 섰을 때와 같았다.

나라는 사람이 하나의 상실을 표현한 작품으로 전시되어 다양한 눈빛에 의해 감상되는 느낌.

엄마 없는 신분이 되면 따라오는 그 다른 시선이

아이는 달갑지 않았다.

착하게 굴면 엄마도 없는 게…

나쁘게 굴면 엄마가 없으니까…


실제 엄마는 내 곁에 없는데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는 엄마를

아이는 오롯이 혼자 감당해야 했다.

엄마의 부재와 엄마의 존재감 사이에서

아이는 엄마를 그리워했을까?

원망하고 미워했을까?


돌이켜보면,

아이는 엄마를 그리 보고 싶어 하지도

그리 원망하지도 않았다.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엄마가 화장실을 가면 득달같이 쫓아가

그 앞에서 기다리고 앉아있을 만큼

엄마의 사랑을 늘 갈구하긴 했지만.

늘 밖으로 나돌던 엄마와의 유대 관계는

깊게 형성될 새가 없었다.

애정이 깊으면, 그만큼 충격과 배신감도 컸겠지만

다행히도 평생을 원망하며 살만큼

애착 관계가 깊지 않은 거다.

이 근원적인 관계의 문제는

세상을 보는 시선에 영향을 준다.


세상과 인간에 대한 첫인상은

가정에서 형성되는 법.

가정에서 불안하게 자란 아이가

세상과 사람을 평안하게 볼 리 없다.

일찍이 가정에서부터

인간 자체의 불완전성과

인간관계의 불완전성을 보고 겪다 보니

완전하지 않은 인간의 한계성을

빨리 받아들이게 됐다.

하지만 이건 모두의 경우가 아니다.

분명 개인차가 있다.

세상과 인간에 대한 나쁜 첫인상 때문에

평생 모든 걸 불신하고 원망하며

살 수도 있다.


다행히도 내 안의 아이는

불필요한 소모로

자신을 괴롭히지 않는 쪽을 선택했다.


'인간이란 원래 그런 거야.
자신의 생존과 이익을 위해
선과 악이 모두 작동하는 존재이기에
인간에 대해 지나치게 실망할 것도,
희망할 것도 없어.'


가령 믿었던 사람이 뒤에서 내 욕을

하고 다녔거나 내 뒤통수치는 일을

했다고 치자.

어떻게 나한테 그럴 수 있냐고

분에 겨워하지 않는다.

그에 대해 가만히 생각하다 보면

마음 한편에서 연민이 떠오른다.


'오죽하면 저랬을까. 사정이 있었겠지.'


성인군자라서가 아니다.

아이의 생각이

좀 더 행복할 수 있는 쪽으로

진화된 거다.

배신감에 사로잡혀 불면증에 시달리면

나만 손해니까.


꽤 좋은 신념을 갖게 됐다.

그럴싸해 보이려고 하는

가짜 너그러움이 아니다.

신념은 탄탄한 근거가 바탕이 돼야

견고히 뿌리내릴 수 있는데,

그렇게 되기까지의 과정이 있었다.


아이가 불안과 불완전함에

맞설 수 있는 방법은

그 보이지 않는 실체에 대해 아는 것.


'왜 세상과 인간은 늘 불완전한 것인지,
좀 더 근원적인 이유가 알고 싶어.'


책과 영화 같은 예술, 과학과 역사 등

여러 방면으로 탐미하다 보니

성경까지 이르렀다.

성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보니

깨닫게 됐다.


인간은 애초에

불완전하게 창조됐다는 걸.


성경엔 불완전해서 죄를 짓는 인간이

하나님을 통해 완성품으로 창조되는 과정이

기록되어 있다.


비로소, 엄마를 원망하지 않고

용서할 수 있는 이유가 더욱 명확해졌다.


모든 인간을 하나님 앞에 줄 세우니

엄마를 엄마로서가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보기 시작한 거다.


'엄마이기 전에 한 여자로서
얼마나 삶이 불행했을까?
이십 대 꽃다운 시절에 아이는 커가는데
남편은 무능력에 폭력까지 휘두르니
얼마나 집에 들어가기가 무섭고 싫었을까?
한창 젊은 나이에 많은 기회가 있어도
아이 때문에, 가정 때문에 포기해야 했으니
얼마나 많은 밤을 번민하고
눈물로 지새웠을까?'


내가 만일,

늘 기로에 서있던 저 여인이었더라면

나라도 할 수 있었던 선택이었다.

젊은 여인이 안쓰럽고 가여웠다.


아이를 포기하고

자기 인생을 찾기로 결심한 날,

평생 져야 될 죄책감을 진 것으로

여인은 이미 형벌을 받은 거다.


아이가 스무 살 되던 해,

여인이 엄마란 이름으로 돌아왔을 때,

다 큰 아이는 이미 엄마를 용서한 후였다.

엄마는 아이 앞에서

그저 미안하다며 눈물을 펑펑 쏟아냈지만,

아이는 울지 않았다.

그냥 돌아온 엄마를 아무 반항 없이

받아들일 뿐이었다.


상처가 오래된 나머지 무감각해졌던 걸까.

충격과 상처에 대한 방어기제 때문에

내 맘 편한 쪽으로 생각이 진화됐던 걸까.

아픔과 고통으로부터 깨달음을 얻어

인격이 성숙해진 걸까.

아님, 신앙의 힘이었을까.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만일 내가 온전한 가정에서 태어났더라면,

사랑이 충만하고 물질도 충만한 환경에서

남부러울 것 없이 자랐더라면,

하나님을 찾았을까?

대부분 마음이 가난한 자가

하나님을 찾는 법이다.


아이에게 가장 안정감을 줘야 될 엄마가 떠난 후

아이는 그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설명이 필요했고,

이제 엄마로부터 받을 수 없는 안정감을

다른 무언가로 대체해야 했다.


'나는 무엇으로 안정감을 얻을 것인가?'


사람에 따라 누군가는 돈과 명예로

불안을 잠재우려 할 수 있고,

누군가는 사회적 성공으로써

완전함을 얻게 되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방법은 미봉책에 불과하다

가장 큰 공포는 무지에서 오는 법.

결핍과 불안, 허무와 불완전함의 민낯을 모른다면

계속 불안하고 두려울 거다.

그 속성을 파헤치고 확인하는 것으로

나는 안정감을 얻기 시작했다.

이로써 나의 크리스천 인생이 시작된 거다.


하지만

아무리 그곳이 완전한 성역이라도

인간이 있는 곳엔

언제나 불완전함이 뒤따랐다.


크리스천 인생이라고

천국만 있을 것 같은가.

직장 인생에서 맛보았던 지옥이

크리스천 인생에도 있을 줄이야.


다 큰 아이는

세상 가장 평온할 것이라 여겼던 교회에서도

여전히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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