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디로,
허를 찌른 영화다.
이렇게 보여주지 않으면서
이토록 모든 걸 보여줄 수 있다고?
그동안 유대인 대학살을 다룬 나치 영화들에서
유대인들을 배재하고도 학살의 참혹함을 나타낼 수 있던가.
이 영화에서 유대인은 아우슈비츠 수용소 소장의 가정부로 몇 명 등장할 뿐이다.
대학살 당시를 그린 이 나치 영화의 주인공은 유대인이 아니라, 수용소 담장 너머에 사는 수용소 소장 ‘루돌프 회스’의 가정.
영화는 이 독일 가정의 평범한 일상을 따라간다.
생일을 맞이한 루돌프를 위해 깜짝 선물을 준비하는 아내와 아이들,
잠들기 전 침대에서 즐거웠던 온천 여행을 추억하는
루돌프와 그의 아내 헤트비히,
쉬는 날엔 루돌프네 마당에 모여 물놀이를 즐기는 여러 독일 가족들,
날마다 담장으로 둘러진 화원에서 온갖 야채들과 꽃나무를 정성껏 키우고 관리하는 헤트비히.
담장 아래 펼쳐지는 한 가정의 단란한 모습은
크게 특별할 것도, 이상할 것도 없다.
그런데,
화초가 무성하고, 물놀이가 한창인 바로 옆 담장 너머로부터 하루 종일 비명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실수로 지우지 못한 영화의 잡음이 아니다.
영화 처음부터 끝까지 일상을 지배하는 배경음은
유대인들이 고통에 몸부림치며 죽어가는 생생한 소리다.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극명하게 갈리는 삶과 죽음.
그 경계를 이토록 선명하고 섬뜩하게 보여준 영화가 있었던가.
학살의 참혹함을 전면으로 보여주지 않고
이렇게까지 우회적으로 보여줄 줄 몰랐다.
인간의 악마적인 잔인함을 평온한 가정의 일상 속에서
느낄 수 있을 거라곤 생각도 못했다.
누구나 통감하는 무겁고도 진중한 이 세계사의 비극을
피 한 방울 보여주지 않고,
이렇게 아무렇지 않듯 내보일 줄이야.
허를 찔렸다.
무심한 듯 보여주지만, 그 어떤 세부 묘사보다도 예리하게 보여주는 악의 평범성에 간담이 서늘했다.
누가 뭐래도 이 영화의 장르는 내겐 공포다.
뿔 달린 악마가 등장하지 않아도,
눈빛이 홱 미쳐 돌변하는 사이코패스 살인마가 등장하지 않아도,
그 이상의 공포를 느끼게 하는 감독의 기획과 연출에
박수를 마다하지 않다만,
단순히 그 예술성에서 비롯되는 공포가 아니다.
얼굴에 살기를 드러내지 않고도
직장 업무 보듯 대학살을 처리하는 그 평범함이
실화라는 점에서 공포가 극대화되는 거다.
자녀들에게 자상하고 가정에 충실한 한 가장이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유대인들을 효율적으로 빨리 제거할 수 있을까를 업무회의시간에 부하들과 논의한다.
하물며 콜레라 걸린 돼지들을 파묻어야 되는 농장주도 가슴이 절절 끓을 판에, 독일 장병들의 모습에선 일말의 동정심도 보이지 않는다.
몇 백만 대학살이 자기 집 담장 바로 옆에서 버젓이 벌어지는데, 온 가족이 식탁에 빙 둘러앉아 오순도순 저녁 만찬을 즐긴다.
보는 내가 다 비위가 상할 정도다.
뜯겨 나갈 살점도 없이 녹아내려갔을 죽음을 조금이라도 인지했다면, 식탁 위에 올려진 고기만 봐도 비위가 상하지 않을까.
다시 감독이 의도적으로 맞춘 영화 프레임으로 돌아가보자.
유대인 대학살을 다뤘지만 감독이 짠 액자에는 유대인이 아니라 독일 가정이 들어와 있다.
그러므로 이 액자 속에서 영화의 클라이맥스는
유대인에 관한 게 아니다.
루돌프 회스의 발령으로 인한 부부간의 갈등이다.
세계사의 비극과는 너무도 대조적인
이 평범한 비극이 웃프지 않을 수 없다.
루돌프 회스를 따라 발령지로 갈 수 없다고 말하는
헤트비히의 이유가 블랙 코미디다.
자신이 땀과 정성으로 일군 아름다운 화원을 두고
떠날 순 없다는 거다.
시종일관 행복했던 헤트비히가 가장 크게 절망하는 순간이다.
결코 공감할 수 없는 그녀의 좌절감에 또다시 뒤통수를 맞았다.
수백 만의 생명이 연기처럼 사라지는 것엔 눈 하나 꿈적 않는 자들이, 풀 한 포기 생명은 끔찍이 여길 수 있다니.
zone of interest.
영화명은 실제로 아우슈비츠 수용소 주변 지역을 일컫는 용어다.
유대인 멸절을 위한 나치의 최대 관심 영역이자,
유대인들을 없는 취급했던 비관심 영역이었다.
담장 하나를 경계로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이 흥미로운 영역은 오늘날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는 걸까.
이 영화를 만든 감독은, 예전에 그들이 무엇을 했는지
지켜보는 영화가 아니라 우리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돌아보는 영화라고 말했다.
그래 맞다, 나 역시 담장 뒤에서 내 영역만 관심을 가질 뿐이다.
엄밀히 말하면 모른 척도 아니다.
아예 담 너머 일에 대해선 신경 회로가 끊어진 것 같다.
집에 발 뻗고 누워 전쟁에 죽어가는 난민들 뉴스를
아무 생각 없이 본지 오래다.
라면을 호로록 삼키며 유튜브를 보다 북극곰 좀 살려달라, 기아 난민들 좀 지원하자는 구호 광고가 뜨면 성가시다며 스킵한다.
그래, 나라와 대륙을 향해 세운 저 먼 담벼락은 차치하자.
바로 눈앞에 있는 담 너머 일도 신경 끄고 산지 오래다.
내 관심 영역에 열중하느라 담장 너머에 있는 불편한 진실을 굳이 알려고 하지 않는다.
지금 당장 내 옆에 있는 직장 동료가 부당한 처우에 괴로워하고,
우리 집 앞에 새벽 배달을 해주는 배달업체 직원들이 과로사로 내몰려도,
나는 새벽에 받은 반찬을 열심히 먹고,
맡겨진 내 직장 업무를 열심히 할 뿐이다.
물론 정도의 차이는 심하지만,
같은 맥락에 선 내가 떳떳이 루돌프 회스네를 경멸하고 욕할 자격이 있을까.
그래도 루돌프 회스처럼 극단의 경우가 아니라는 전제하에 나 같은 일반인들 삶에서 변명을 하나 들자면,
담 너머의 너도 괴로운 삶을 살고 있겠지만,
이쪽 삶도 너만큼 삶이 팍팍하다는 거다.
갈수록 행복지수가 낮아지는 무한경쟁 세상이다.
상대적이지만,
너도 나도 지옥 같은 세상에서 사는 이상
각자의 담장은 계속 높아지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