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만약에 우리’ ]
영화 '아바타'가 흥행 가도를 달리는 가운데, 잔잔한 영화 한 편이 블록버스터 영화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로 인기를 얻고 있다는 소식에 극장을 찾았다. 줄거리를 요약하자면 이렇다. 베트남에서 출발하는 한국행 비행기에서 10년 만에 재회한 남녀. 마침 기상악화로 비행기가 끊기면서 10년 전에 끊겨버린 이들의 과거 여행이 시작된다.
10년 전 서울 고속버스 터미널, 컴퓨터 공학과에 재학 중이던 은호(구교환)는 대합실에서 고향 가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비 오는 창밖으로 긴 머리에 빨간 우산을 들고 있던 정원(문가영)을 보게 된다. 그녀가 자신과 같은 버스, 옆자리에 앉을 거라곤 생각지도 못한 채 은호는 그녀의 모습을 노트에 스케치한다. 인연이 될 운명이었는지 잘 달리던 버스는 산사태로 도로가 막히면서 멈춰 서게 되고, 은호는 자신을 데리러 온 아버지 차에 올라타려다 정원에게 손을 내민다. 그녀는 보육원 출신으로 연고가 없으니 데리러 올 사람이 없었다.
은호와 정원을 태우고 운전대를 잡은 은호 아버지는 넉살 좋고 정 많은 어른. 터미널까지만 태워달라는 정원의 부탁에도 그녀의 사정을 알기라도 한 듯, 연신 자신의 음식 솜씨를 뽐내며 자신의 식당에서 밥 한 끼 먹고 가라고 부추긴다. 결국 정에 못 이겨 거한 밥상을 받은 정원은 그 상황이 부담스러울 법도 하지만 맛있게 먹어치운다. 어딜 가든 눈칫밥 신세였을 그녀를 무장 해제 시키는 편안한 자리였을 테다. 식사 후 언제든 오라는 은호 아버지의 따스한 배웅을 받은 후, 그녀가 은호의 오토바이를 얻어 타고 향한 곳은 보육원. 자신을 돌봐주던 원장님은 자리에 없고, 사들고 온 과자세트를 직원에게 건넨 후 터벅터벅 길가로 돌아선 그녀에게 은호의 오토바이가 다가온다. 정원을 내려주고 집으로 돌아가던 은호가 다시 오토바이를 돌려세운 것이다. 그런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정원은 자신이 오토바이를 운전하겠다고 말한다. 운전할 줄 아냐는 은호의 대꾸가 무색하게, 익숙한 듯 오토바이를 모는 정원. 그녀가 어떻게 살아왔는지가 잠시 보이는 대목이다. 보육원에서 독립 후, 자생하기 위해 그녀는 안 해 본 알바가 없을 테다. 배달 라이더도 그중 하나이지 않았을까.
이후로 대학 생활을 이어나가며 베프가 된 두 사람. 은호와 정원은 방과 후엔 함께 주유소 알바를 하고, 친구들과 어울리며 꿈과 낭만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즐거운 연말 파티를 갖기도 한다. 어느 건축학과 선배가 정원에게 다가오지 않았다면, 그저 재미지는 시시콜콜한 일상이 계속됐을 테다. 건축학도가 꿈이었지만 장학금 때문에 사회복지학과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정원에겐, 대리만족이라도 하려는 듯 건축회사에 입사한 선배가 멋있어 보였다. 그녀와 늘 거의 붙어 있다시피 한 은호는 정원의 연애를 질투 어린 시선으로 바라만 볼 뿐이다. 그는 언제까지 속내를 감출 수 있을까. 정원이 선배와 헤어지고 사정으로 고시원에서 나와 은호의 집으로 들어와서도 둘은 불알친구로 지낸다.
그러다 둘 사이에 불꽃이 튄 건, 어느 해 12월의 마지막 날. 정원과 은호는 어느 광장 한복판에서 정원의 애인이 바람피우는 걸 목격하게 되는데, 그 애인은 정원과 헤어졌다가 다시 사귀던 건축학과 선배였다. 그날 술을 진탕 마신 두 사람은 위로 겸 신년을 맞이해, 서로 잘 될 거라며 덕담을 주고받다가 저 속에 있던 감정에 휩쓸리고 만다. 입을 맞추고, 몸을 맞추며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것으로 친구에서 애인으로 바뀌는 순간을 맞이한 것이다.
하지만 다음날 아침, 은호 옆에 있어야 할 정원은 도망가고 없다. 은호가 정원을 찾아 헤매다 발견한 곳은 은호의 아버지 식당. 정원은 신년 떡국을 얻어먹고 있었다. 갈 곳 없던 그녀가 마치 친정집에 와 있는 듯했다. 그녀가 두려워했던 것이 바로 이 친정 같은, 가족 같은, 친구 같은 유대감을 영영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점이었다. 만약에 은호와 사귀다 헤어지면 예전의 친구 사이로 돌아갈 수 있을까. 거의 평생 가족을 가져본 적이 없던 그녀에게 은호와 은호 아버지는 가족 같은 존재가 되어 주었다. 그들은 그녀가 언제나 기대고 머무를 수 있는 집 같은 존재들이었다. 그녀가 건축학도를 꿈꾸고 건축설계사를 꿈꿨던 것도, 그녀의 저 맘속엔 이제 떠돌이 신세를 끝내고 지치고 외로운 제 영혼을 받아줄 안식처를 열망했기 때문이다. 그녀에겐 애인보다 집 같은 가족이, 친구 같은 가족이 더 절실하게 필요했는지 모른다. 그녀가 사랑 앞에서 겁을 내는 이유가 안쓰러웠다.
하지만 불꽃을 피우기 시작한 불씨가 그리 쉽게 꺼지던가. 그렇게 우정의 장에서 사랑의 장으로 변모한 은호의 집에서 둘은 행복한 미래를 꿈꾸게 된다. 은호는 게임 프로그래머로서의 성공을 꿈꾸며 정원의 건축설계사 꿈을 지지하고 지원해 준다. 하지만 청춘들에겐 너무 가혹한 시대를 만나서였을까. 경쟁과 약육강식의 집약체인 서울 도심에서 청춘의 영혼들은 서서히 갉아 먹힌다. 은호는 지원하는 게임 회사마다 탈락의 고배를 마시다 어렵사리 붙은 회사에선 상사의 무도한 갑질을 견뎌야 했고, 집주인의 올려달라는 보증금을 마련하기 위해 발버둥 쳐야 했다. 설상가상 녹내장으로 앞이 더 캄캄해지는 아버지의 노후까지 생각하면, 은호는 어디에 영혼이라도 값을 매겨 팔 수 있다면 팔고 싶은 심정이었을 테다. 은호를 돕고자 모델하우스 알바를 시작한 정원은 점점 지쳐가다 못해 생기를 잃어가는 그를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가 안쓰럽고 안타까우면서도 자신이 우려했던 것이 현실이 되는 것은 아닌지 불안하지 않았을까. 그녀에게 가장 큰 걱정은 빚과 가난보다 자신에게 점점 무심해지는 그와의 불투명한 관계이지 않았을까.
좁은 고시원에서 자신에게 허락된 햇빛이 한 줌뿐이라는 것에 슬퍼했던 정원이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에게 커튼을 열어젖히고 이 햇빛 너 다 가지라며, 세상 모든 걸 그녀에게 주고 싶었던 은호였다. 그때 쏟아지는 햇빛에 빛나던 그녀가, 이제는 커튼을 닫아 걸은 채 종일 컴퓨터 게임만 하는 그의 뒷모습을 그늘진 모습으로 바라보게 됐다. 그녀가 닫힌 커튼을 젖히자마자 바로 냉정하게 커튼을 쳐버리는 그의 모습에서 그녀는 결심한다. 서서히 진행되고 있던 이별이 드디어 행동으로 옮겨진 순간이다. 버스 안에서 은호의 전화번호를 삭제한 정원의 안면 근육은 사방으로 요동치며 바르르 떨렸다. 그 아픔과 슬픔의 진동들 사이로 그녀의 흐느낌이 새어 나오다 못해 흘러넘쳤을 때, 나도 명치가 아파 왔다.
가장 기억에 남는 대사가 있다. 가장 행복했던 순간 은호의 품에 안겨 정원이 했던 말이다. "우리 나중에 헤어지게 돼도, 가끔씩 보자." 왜 이 말이 유독 찡하게 다가왔던 걸까. 이미 어린 나이에 가족과의 헤어짐을 경험한 그녀로선 미리 헤어짐을 준비해 두는 게, 덜 상처받고 덜 불안한 일이었을까. 가장 사랑이 충만한 시간들 속에서도, 한편에 헤어짐을 염두에 두고 있는 그녀의 마음속 환경이 애처로웠다. 얼마나 사랑하고 얼마나 헤어지기 싫으면, 헤어지더라도 가끔씩 보자고 했을까. 그럼에도 헤어짐을 미리 가정하고 헤어지지 않음을 소망하는 그녀의 모순 섞인 한마디가 오랫동안 가슴을 울렸다. 어쩌면 이 말은 어릴 때 헤어진 자기 가족에게 바라던, 또는 하고 싶은 말이었는지도. 가끔이라도 볼 수 있는 가족이 있었으면 하고 바랬을지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 관계성의 허술함을 뼛속 깊이 이해하고 있는 정원과 달리, 은호는 천진난만하게 답한다. "안 헤어질 건데?"
헤어지고 10년 후,
마주 앉은 두 사람은 우리가 왜 헤어졌느냐며 과거를 되짚는다.
그리고 대화 마지막쯤, 은호는 정원에게 묻는다.
"만약에 내가 그때 그 회사에 들어가지 않았다면, 헤어졌을까?"
"만약에 우리 그때 반지하로 이사 가지 않았다면, 계속 만났을까?"
"만약에 그때 내가 지하철에서 널 잡았다면, 달라졌을까?"
영화를 보고 난 후,
나도 은호가 되어 과거의 그 사람에게 물었다.
다시 정원이 되어 나의 대답을 생각했다.
나의 대답도 정원과 비슷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어떻게든 헤어졌을 일이다.
누가 누구를 놓친 게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놓아준 것이었다.
그리고 변치 않는 사실 하나는
그때 그 시절, 나는 그 사람을 열렬히 사랑했다는 것이다.
영화 ‘만약에 우리’는
단순히 후회가 넘치는 영화가 아니다.
‘만약에 그때 그랬다면‘을 가정해
‘대체 뭣 때문에, 누구 때문에‘하며
헤어짐의 책임을 묻는 영화는 더더욱 아니다.
가장 초라하고 별 볼 일 없던 시절,
누군가를 가장 사랑하거나 무언가를 가장 열망했던
우리네 인생 이야기다.
그때를 회상하면 가슴이 아려오고 시려오는
나의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