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만만하게 봤다가 큰코다쳤다
퇴사 후, 시간이 남아 돌기 시작했다.
이럴 때 안 해 보던 것을 하면 좋지 않을까 싶었다.
그중 하나가 카카오톡 이모티콘 그리기.
카톡에서 상용화된 이모티콘들을 쭉 보다 보니,
나도 할 만하다 싶었다.
(건방진 생각이었다는 걸 나중에…)
난도가 높은 것도 있었지만,
졸라맨 같은 대충 그린 듯한 이모티콘도 많았다.
'이건 발로 그렸나?'
(와, 무지에 교만이 더해진 순간…)
그래도 인기가 많은 걸 보니
저거보다는 잘 그리겠다 싶었다. (ㅋㅋㅋ)
마침 아이패드에 드로잉 프로그램인 프로크리에이터가 깔려 있었고, 평소에 이런저런 걸 끄적였던 터라 사용법도 제법 능숙한 편.
몇 달 전부터 온라인으로 이모티콘 그리기 강의를 들으며, 어떤 캐릭터로 뭘 그릴지 계속 구상을 했다.
내 캐릭터 이름은 나르. 나르시시스트의 약자다.
직장 다닐 때 나르시시스트들을 주변에서 심심찮게 만나다 보니 나르시시스트에 관심이 많았고, 관련된 자료들을 찾아보며 나름 많은 데이터들이 축적된 상태였다.
자기중심적이며 자신의 이익을 위해 타인을 도구로 활용하는 데 최적화된 인간 유형으로 캐릭터를 삼으면, 꽤 흥미롭겠다 싶었다.
먼저 캐릭터를 잡기 위해 노트에 이렇게도 그려보고 저렇게도 그려봤다.
대중성과 캐릭터의 성격을 기준으로 방향을 잡아갔는데, 일단 캐릭터는 머리가 심하게 커야 귀엽다는 소신을 따랐고, 거기에 완벽한 일대일 가르마로 빈틈없는 나르시시스트의 치밀한 계획성을 보여주는 것으로 결정했다.
그다음, 나르시시스트 입장에서 할 만한 태도와 멘트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나르시시스트 특유의 자기 우월성과 남을 조정하려는 특성을 반영한 내용들로 채워갔다.
그러다 어느 순간, 내 이모티콘을 사용하게 될 사용자들의 입장을 생각해 봤다.
가만있어봐. 내 이모티콘의 타깃이? 나르시시스트? 일반 사용자?
내 이모티콘을 나르시시스트들이 사용하려고 할까?
아니지. 나르시시스트는 자신이 나르시시스트라는 걸 인정할 리도 없을 테고, 일반인들이 사용한다고 해도 나르시시스트처럼 보일만한 이모티콘을 유쾌하게 사용할 수 있을까?
나르시시스트 쪽으로 정리를 해나가다 보니 타깃이 불분명했고 대중성이 떨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방향을 바꾸게 됐다.
나르시시스트가 아니라 그냥 귀여운 단발 미녀가 인생을 살면서 겪을 만한 한 순간들을 앨범처럼 엮는 것으로.
그리고 일상에서 흔히 쓰일 만한 무난한 멘트와 상황들을 그리기로 했다.
그리고 요즘은 멈춰있는 이모티콘 보다 움직이는 이모티콘이 더 인기가 많으니, 복잡하고 어렵겠지만 동적 이모티콘을 그리기로 했다.
캐릭터도 잡혔고, 방향성도 잡혔으니 이제 그림에 착수. 생각보다 생 노가다였지만 할수록 재미가 붙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허리와 어깨가 빠지는 줄도 모르고 거의 두 달을 매달렸다.
(누가 보면 이미 데뷔한 이모티콘 작가인 줄… ㅋㅋ)
그러다 중간에 병원 입원과 수술 관계로 한 달간은 붕 떠 있었는데, 다시 그리려니 탄력이 좀처럼 붙지 않았다.
정지형으로 그리는 것도 겨우 그려내고 있었는데, 이걸 다시 움직이는 그림으로 만들 작업을 하니 앞이 막막하고 남은 열정도 식을 판이었다.
그래서 24개를 그려야 되는 움직이는 이모티콘에서 32개를 그려야 되는 멈춰있는 이모티콘으로 변경했다.
(왜 많은 작가들이 졸라맨처럼 간단하게 캐릭터를 그리는지 알겠더라. 캐릭터가 복잡하면 움직임을 주는 작업도 더 복잡해지고 시간이 배로 걸린다. 이제 와서 캐릭터를 졸라맨처럼 고치기엔 너무 많이 그렸다. ㅠㅠ 그리고 캐릭터에 정도 많이 들었다.ㅠㅠ)
24개를 하나하나 레이어를 추가해 가며 만화 작업처럼 그리다 지쳐가느니, (내 실력으론 반년에서 일 년 예상) 8개의 멈춰있는 단일형 이모티콘(일주일 정도 작업 예상)을 추가로 그리는 게 더 낫다는 판단이었다.
몇 개월을 더 공들여서 실컷 움직이는 이모티콘을 만들어 제출했는데, 심사에서 탈락하면?
아마 다시는 이모티콘을 쳐다보지 않을 수도 있다.
일단은 첫 도전이니만큼 멈춰있는 이모티콘을 제출해서 컨셉이 맞는지 안 맞는지 확인을 받아보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둥~
카카오톡 이모티콘 심사 규격 가이드에 맞추어
드디어 제출.
심사 결과까지 2, 3주가량 걸린다는데,
과연 통과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