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 옆 동물원
<미술관 옆 동물원> 1998.12.19 개봉. 이정향 감독
나의 우주에 반짝이는 별 하나가 있다. 깜빡, 깜빡, 오늘도 마치 날 발견한 것 같이 깜빡이던 별은 결국 나를 알아채지 못하고 밝아오는 햇살 속에 모습을 감춘다. 속상한 건 내가 가장 못난 밤에 별이 유독 선명하게 빛난다는 것이다. 하염없이 빛나는 별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별이 이런 나를 모르는 것에 안도한다. 바보같이.
<미술관 옆 동물원>의 주인공 춘희는 가끔 마주쳐 인사 정도만 겨우 나눈 인공을 짝사랑하고 있다. 이 날도 인공을 만난다는 생각에 한껏 들떠서 꾸미고 나간 후 돌아와 철수에게 자신의 솔직한 마음을 털어놓는다.
“그 사람, 나를 보지도 못했어. 우린 너무 멀리 있었어. 그렇다고 내가 먼저 다가가지도 못했어. 네 말이 맞을까 봐.. 내가 다가갔는데 그 사람이 날 몰라볼까 봐 그게 겁났어..”
그 사람이 날 몰라볼까 봐 겁나는 건 사랑일까? 동경일까? 난 항상 그랬다. 내 손을 잡을 수 없을 만큼만 손을 뻗고 닿지 않았다고 아파했다가 한편으로는 그가 내 손을 잡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갑자기 마음을 드러내면 상대방이 당혹스러워하니까 배려한다는 그럴싸한 변명을 하며 도망가는 것에 익숙했다.
“넌 남을 배려해서가 아냐, 단지 자신이 상처 받을까 봐 그게 두려워서 일부러 안타까운 짝사랑을 하는 척 즐기고 있어. 액자 속의 그림을 보듯, 창밖의 풍경을 보듯. 넌 비겁해. 평생 사랑을 못해 볼 거야. "
철수가 춘희를 향해 던지는 대사가 꼭 나에게 하는 말 같았다. 넌 여태 너무 비겁한 사랑을 했다고, 너만 생각하고 상처 받을까 두려워 감정을 액자 속에 가두어 버린다고 말이다. 용기를 내볼까 고민했던 수많은 밤이 있었다. 그 밤 속에서 깨달은 건 별은 관측하며 사랑하는 존재이지 온기를 나누며 사랑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이었다.
“춘희야. 예쁜 양말. 새 구두, 새 옷, 이런 것들보다 더 돋보이는 건 바로 너야. 넌 지금도 부시시한 머리에 맨발로 이걸 보고 있겠지? 세수는 했니? 낯선 남자에게 쉽게 방을 빼앗기고, 물은 병째로 마시며, 밥상 앞에서 괴상한 소리를 지르는 너. 이 춘희를 알아주는 사람이 꼭 있을 거야. 힘내.”
철수가 춘희에게 남긴 비디오 속 편지다. 영화 속 춘희에겐 철수라는 스며드는 사랑의 존재가 나타났지만 나에겐 아직 그런 사랑이 나타나지 않았다.
난 세상에서 사랑이 제일 어렵다. 나는 나를 무너지게 할 모든 것들에서 날 지켜야 했고, 사랑도 그중 하나였다. 흔들리고 약해지는 내가 싫어서 치던 방패막들이 이제는 나를 사랑할 수 없는 사람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래도 후회는 없다. 그래서 지금의 내가 있을 수 있으니까. 그래도 별을 만드는 비겁한 행동은 그만 해야겠다. 비겁한 건 멋이 없다. <미술관 옆 동물원>은 1998년, 내가 아홉 살 때 개봉한 오래된 영화지만 마치 친구가 옆에서 나에게 이야기해주는 듯한 감성과 언어를 가진 영화였다. 춘희의 모습에서 내가 겹쳐 보여서 아프고 슬펐지만 따뜻하고 포근했다. 역시 좋은 영화는 시간이 지나도 좋은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