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서 나를 만나다 中
언제부턴가 깊은 잠을 자지 못했다. 잠을 자기 전에 봐야 할 드라마도, 읽어야 할 책도, 들어야 할 팟캐스트도 너무 많았고, 무엇보다 불필요한 생각들이 많았다. 푹 자본 게 언젠가 싶을 정도다. 15년간의 직장생활에서는 야근과 업무의 연장이었던 술자리가 흔했거나, 장거리 출퇴근으로 심신이 지쳤었고 그중 8년은 아이를 키우는 데 밤낮이 없었다. 그러다가 퇴사하기 직전 2개월은 스트레스가 극심했고, 알 수 없는 동료와의 갈등과 스스로 만족스럽지 않은 업무 성과에 대한 속상함이 결합하면서 이 모든 상황의 원인이 나 스스로인 건 아닌지 우울감이 몰려왔다.
푹 자고 싶었다. 복잡한 생각도 나를 향한 실망도 미래에 대한 불안도 모두 없는 곳에서 푹 잠들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직장을 그만 두기로 했다. 나 아니면 안 될 것 같은 일은 없다고 믿었고, 과감한 정리를 시작했다. 직장을 그만둔다는 것은 생계를 더 이상 책임지지 않겠다는 것이기도 했다. 제법 단단한 용기가 필요했고 남다른 각오가 요구되었다. 남편의 낯선 반응도 불편하긴 했지만. 감사하게도 생각보다 그 과정이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직장을 그만두고도 푹 자지 못했던 건 아이러니다. 오래 자지만 수면의 품질은 여전했고. 지속되는 피로감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가 되었다. 살기 위해 또 한 번의 결의가 필요했고. 변화가 불가피했다. 어쩌면 나는 제주에 잠을 자러 왔을지도 모른다. 아무런 방해 없이, 자고 싶을 때 자고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날 수 있으며 눈 뜰 때 '아! 늦었다' 하며 놀라지 않아도 되고, 꿈을 꾸다 깨면 다시 꿈속으로 찾아 들어갈 수 있게 단잠을 자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런 나에게 오야스미, 제주는 탁월한 선택이었다. 어떤 소음도 없었고, 내가 묵은 방에는 아무도 오지 않았으며 옆방의 그녀들도 나와 마주치지 않았다. 잠자기 참 좋은 온도와 빛깔을 가진 방이었다. 누워있으면 엄마 품처럼 포근했다. 마을도 조용했고 밤사이에도 아무 소리를 못 들을 만큼 게하는 숨죽여 밤을 보냈다. 미리 예약한 조식은 '오야스미(잘 자)'라는 일본 이름답게 오니기리 두 개와 미소 된장국이었다. 달콤하면서 짭짤한 게 삼각김밥 같으면서도 품위 있고 우아했다. 쫀득한 밥알이 삼각김밥과는 격을 달리 했다. 처음 들어갔을 때처럼 침대 위를 얌전하게 해 놓고 게하를 나서는데, 다음에 또 푹 자고 싶을 때 다시 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날이 오지 않으면 더 좋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