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센트 반 고흐, <침실>
하루하루 내 방에서 보내는 시간은 얼마나 될까?
멀리 여행을 가거나, 집 밖에 나가면 먹는 음식부터 이쪽저쪽 사진을 많이 찍는다. 다만, 자는 시간 포함해서 하루 24시간 중, 반을 머무는 우리 집, 내 방, 침실 사진은 없다. 강아지, 고양이, 애들 사진 찍을 때 배경으로 등장하는 정도일 듯, 내 방이 주인공인 사진은 없다.
작년에 읽었던 문보영의 <일기 시대>에서 불면과 고투하면 쓴 원고라는 1부 '내 방에서 살아남기'편은 새벽 12시에서 5시 사이라는, 잘 알려지지 않은 시간에 대한 이야기였다. 작가는 방 안에서 어떻게 움직이는지 무엇을 하는지 생생하게 전달하고자, 방의 평면을 그려 넣었다. 책을 읽으면서 나도 세상 사람들은 모두 자는 시간에 나와 내 방 안의 오브젝트들 사이의 미묘한 케미컬을 처음으로 생각해 보게 되었다.
그저 공기처럼 자연스럽고 당연히 있는 거라, 잘 인식하지 못하는 것 중의 하나가 내 공간, 내 방이다. 지금 방을 한번 쭉 둘러보라. 나한테 익숙한 것들로 가득찬, '나만을 위한' 공간.
반 고흐는 이 공간을 유화작품으로 남겼다. 그가 살던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 지방의 작은 도시인 아를의 그만의 작은 침실. 특별히 럭셔리하지도, 눈에 띄는 특징이 있지도 않은 평범하고 소소한 작은 침실을 반 고흐는 왜 그린 걸까? 그리고 사람들은 또 왜 그렇게 그 그림을 사랑하는 걸까?
고흐는 일정한 주거지 없이 여인숙을 전전하며 생활했기 때문에 이렇게 잘 정리된 곳에 살게 된 것이 기뻤을 것이다. 모든 것이 잘 정돈되어 있는 나만의 공간. 마치 이사 후에, 나에게 낯익은 물건들이 제자리를 찾아 정리된 그 장면을 볼 때처럼.
그런데 모든 물건들이 다 쌍을 이루고 있다. 의자도 두 개, 침대 속 베개도 두 개, 벽에 걸린 초상화, 데생도 두 점, 심지어 문도 두 개다. 고흐는 이 방에서 혼자 지냈지만 누군가가 방문하거나 함께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모든 물건들은 짝이 있지만 그 안에서 혼자였던 고흐를 생각하면 이래저래 더 외롭다.
사망한 후에나 사람들이 작품의 진가를 알아보고 유명해진 고흐는 평생 무명 화가로 가난하게 살다가 고독 속에서 자살했다. 그의 불행한 삶과 대조적인 너무도 눈부신 그림들이 훗날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게 되었고, 사람들은 이 화가에게서 소설 속의 인물과 영웅을 찾은 것이다. 결국 그의 비극적인 삶이 그가 떠난 후, 그의 그림에 드라마틱한 요소를 추가한 셈이다.
고흐가 정신 병자였다던 데, 방은 그저 평범하고 아늑해 보인다. (침대도 크고, 빨간 이불 때문인가?) 심리적으로 너무 불안하고 허약했을 뿐, 실제로 미친 건 아니었다. 요즘 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치료를 받고 있는 우울증, 혹은 성인 ADHD 정도였을 거라 짐작한다. 당시에는 이런 종류의 병을 어떻게 치료해야 할지 몰랐을 것이다. 하지만 고흐가 착란 상태에서 그림을 그렸던 건 아니다. 그림을 그릴 때는 누구보다 명철했다고 한다. 특히, 동생 테오에게 보낸 수백 통의 편지에서는 매우 객관적으로 자신의 작업을 평가하고 있다고 한다. 그저 고흐는 극도로 민감하고 지적인 사람이었을 듯.
코로나 시대를 겪으면서 많은 사람들이 집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졌다. 처음에는 소셜 활동에서 멀어져 불안하고 외로워하다가 점점 혼자 있는 시간과 공간을 즐기며 현실과 타협했다.
남경민 작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항상 인기와 사랑을 한 몸에 받는 메릴린먼로, 다이애나 등 셀러브리티들이 혼자 있을 때의 생활을 디깅하고 상상하며 그들만의 방을 그린다. 또한, 자신과 같은 직업을 가진 화가들의 작업실도 그린다. 베르메르, 벨라스케스, 모네, 르누아르 등의 작업실 작품들은, 그 방의 주인은 없어도 그들이 사랑하는 것들과 영감으로 가득 찬 사유의 시공간이다.
실제 풍경 위에 마음의 풍경을 겹친 남경민 작가의 '메타 리얼리티'의 세계는 AI의 미래 공간 같기도, 과거 르네상스 풍경같기도 하다. 마치 과거와 미래는 있고, 현재만 없는 기묘한 소외감과 고독의 뉘앙스가 풍겨난다.
남의 방을 들여다보는 건, 마치 남의 일기를 꼬물꼬물 보는 것같이 재미난다. 반고흐의 <침실>은 그 방을 보는 게 아니라, 그 당시, 그곳에 있었던 반고흐를 만날 수 있는 거라, 우리는 그의 침실을 사랑하는 거다. 과거에 살던 내 집, 내 방을 생각하면 그 곳에 있었던 어린 나를 떠올릴 수 있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