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블로 피카소, <울고 있는 여인>
어른이 된다는 건, 잘 울지 않는다는 것이다. 술이나 마셔야 운다. 남의 일을 보면서 들으면서 우는 일은 있어도 본인의 아픔, 슬픔으로 울지는 않는다.
최근엔 유튜브에서 유재석의 유키즈온더블럭을 보고 운 적이 있었다. 춘천의 한 빵집 주인과 인터뷰를 하는 내용이었는데, 퀴즈를 맞히면 백만 원을 주는 프로그램이었다. 백만 원을 어디에 쓸 것이냐고 물어보니, 빵집 주인은 전부 아내에게 주겠다고 했다. 때마침, 아내의 전화가 왔고 유재석이 남편의 계획을 말해줬더니, 아내가 펑펑 울기 시작했다. 서울에서 한지 공예를 하던 부부는 가게가 팔려서 쫓겨나, 어찌어찌하여 춘천으로 내려와 살고 있었다. 펑펑 우는 아내의 눈물에 부부의 맘고생과 현실에 답답함이 그대로 전해져서 나도 울고 말았다.
파블로 피카소의 <울고 있는 여인>의 손에는 손수건이 쥐어져 있다. 눈물이 무거운 물방울처럼 눈 아래에 매달려 있고, 손수건은 손안에 완전히 구겨져 있다. 여인은 어쩔 줄 몰라하며 손수건 끝자락을 입에 물고 있다.
나에게는 손수건이 필요할 정도로 슬픈 일은 없었던 2023년이었다. 아니면, 상처를 받아도, 충분히 상처를 받았다고 인정하지 않은 걸까? 진짜 아픔을 느껴야 할 때, 나는 결정적인 감각은 억눌러 버렸을지도. 슬픔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서, 진실과 정면으로 맞서기를 회피하는 게 습관이 되었을 수도. 겉으로 눈물은 나지 않아도, 마음속은 <울고 있는 여인>처럼 갈기갈기 찢어졌었는지도 모른다.
<울고 있는 여인>의 얼굴은 깨진 유리 조각 같기도 하고, 모든 조각들도 뾰족하다. 얼굴의 색깔도 큰 충격으로 '퍼렇게' 질린 듯하다. 피부가 시간에 흐름에 따라 자주색, 녹색, 노란색으로 변한 모습이다. 마음의 평정도, 얼굴의 조화도 모두 깨져 버린 상황. 피카소는 그 감정을 그림으로 표현했다. <울고 있는 여인>이 되어서, 제3의 입장에서 관찰하면서 그리는 포트레이트가 아닌, 그림의 모델이 되어 일인칭 시점으로 느낀 것을 그렸다.
피카소와 함께 약 9년 정도 살았던 초현실주의 사진작가 도라 마르(Dora Maar)다. 도라 마르가 아버지가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큰 충격을 받아 우는 모습을 본 피카소는, 그 모습이 무척 매혹적이고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녀를 자신의 뮤즈로 삼아, 그림을 그렸다.
한 인물의 초상화로 시작했지만, 작품의 제목이 <도라 마르>가 아닌, <울고 있는 여인>인 것으로 보아, 우리 인간의 고통으로 일그러진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전형적인 모습을 그린 것이다.
피카소는 다른 사람의 시선이나 관점보다는 자신이 보는 시각을 최대한 정직하고 솔직하게 묘사하려고 했다. 아이들처럼 세상을 바라보려고 했다. 아이들 세상의 주인은 '나'이다.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것도 하루 종일 할 수 있고, 하고 싶은 말, 행동도 다 할 수 있다. 마음대로 되지 않으면 울고 떼 부리고 끝까지 매달릴 수도 있다. 본인에게 정직하니까.
The purpose of art is washing the dust of daily life off our souls.
- Pablo Picasso
예술의 목적은 일상의 먼지를 씻어내는 것이다.
- 파블로 피카소
그림은 장식품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 '진실'을 보여준다. 가식과 속임수를 거부하고, 고통을 표면으로 떠오르게도 하여 나에 대해, 우리와 세상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고통이나 상처를 기억해 내고 두려운 것들을 보게 하여 인정하고 받아들이면서, 우리가 눈물을 흘릴 수 있게 한다. 그렇게 치유받을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