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베르 카뮈 <이방인>
1.
‘모두에게 인생은 처음 사는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모두에게 다정한 사람이 되어주자’라는 이웃 브런치 작가님의 글이 떠올랐다. 모두에게 낯선 인생에서의 인간은 마치 예술 작품처럼 해석하기 나름이다. 목소리 큰 사람이 평가하여 '이렇다' 정의 내리면 많은 사람들이 무턱대고 그 의견을 따른다. 다만, 인플루언서, 사회적 강자, 대중의 시선과 잣대가 옳은 거라고 도대체 누가 판단을 하는 걸까?
2.
오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어쩌면 어제였는지도 모른다.
소설은 안 읽어봤어도 첫 문장은 들어본 사람이 많을 정도로 널리 알려졌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는데 어제인지 오늘인지도 모르고 눈물도 흘리지 않았다니, 세상에 이런 불효자식이 다 있냐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찬찬히 생각해 보면, 어쩌면 가능성이 있다. 아이들 중에도 예방 접종 시, 바로 울지 않고 10초 뒤에 우는 아이들이 있다. 처음 느끼는 그 감정에 바로 반응하지 않는다고 싸이코는 아니다. 이 세상에는 생각보다 내가 모르는 사실이 많다.
프랑스인 주인공 뫼르소는 당시 프랑스 치하 알제리에서 근무하는 평범한 직장인이었다. 양로원으로 보낸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는 통보를 받고 장례식을 치렀다. 눈물이 나지 않았다. 어쩌다 시신 주변에서 담배도 피우고 수위가 주는 커피도 마셨다. 다음 날은 예전 동료인 타이피스트 마리를 우연히 바닷가에서 만나 해수욕도 하고 코미디쇼도 보고 밤을 함께 했다.
며칠 후 친구들과 또 다른 친구 마송이 사는 해변으로 놀러 갔다. 아랍인들과 다툼이 생기고 친구 중 한 명이 칼에 휘둘려 다쳤다. 그 친구는 총을 들고 있었고 뫼르소는 위험하니 자신이 보관하겠다며 총을 건네받았다. 바람을 쐬러 홀로 바닷가 옆 샘으로 나간 뫼르소는 아까 그 아랍인들 중 한 명과 마주쳤다. 아까의 소동이 다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아랍인은 칼을 꺼내 들었다. 칼날이 태양빛에 반사되어 뫼르소의 이마를 찌르고 뫼르소는 현기증을 느꼈다. 그리고 뫼르소는 '태양이 너무 눈부셔서' 자신도 모르게 품에 있던 권총 쏴서 그를 죽였다.
3.
책의 2부에서는 이 사건의 판정을 내리는 과정을 낱낱이 묘사하고 있다. 어이없게 법정의 주요 화제는 아랍인 사살 건이 아닌 뫼르소가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슬퍼하지 않았다는데 초점을 두기 시작했다.
또한, 아랍인 사살 이유가 앞뒤 사정은 다 무시한 채, '햇빛이 눈부셔서 사람을 죽였다' 한마디로 축소되어 버렸다. 그를 싸이코로 만든 셈이다. 그리고 법정에서 뫼르소는 아무 말도 하면 안 되었다. 변호사는 뫼르소를 '그'가 아닌 '나'라고 칭하며 변론을 했다. 그 사건의 중심인 뫼르소 없이, 사건의 해석은 다른 사람들에 의해 작정되고 있었다. 뫼르소는 본인의 인생에서 철저하게 이방인이 되었다.
4.
뫼르소는,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에 등장하는 세상엔 무관심하며 힘 빼고 인생을 사는 주인공들과 닮았다. 사이코패스 같지만 누가 이런 사람들이 이상하다고 나쁘다고 하는 기준을 만든 건지도 한번 생각해봐야 할 듯하다. 가끔은 남이 봤을 때는 당연히 이해할 수도 없고, 나조차도 이해할 수 없는 내 상황에 빠질 때도 한 번쯤, 아니 몇 번은 있지 않은가? 누구에게도 이야기할 수 없는 나만 알고 있는 나만의 비밀 하나 정도씩은 가지고 있지 않나?
뫼르소 사건의 판정에서 이런 비밀을 캐내서 마음대로 판단하고 비난하는 사람들도 출현한다. 얼마 전 내 브런치북 <외국인 오빠>에 연재했던 '한국의 키보드 워리어들'도 그중에 하나.
03화 한국의 키보드 워리어들 (brunch.co.kr)
사람이란 결국 무슨 생각에든지 나중에는 익숙해지고 마는 법이다.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은 1942년에 발표한 소설이다. 82년이 지난 지금, 정보와 미디어의 카오스 속에서도 본인의 세계관을 확실히 하라고 말해주는 듯하다. 허투루 판단하고 단정 짓지 말고 모두에게 처음인 세상이니 결국 모두가 뉴커머이자 이방인인 셈. 그러니 모두에게 다정한 사람이 되어주라고.
*책에서 발췌한 부분은 파란색으로 표기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