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이제는 영화가 지루하다고?
<라 시오타 역에서의 열차의 도착>. 1895년 뤼미에르 형제들에 의해 만들어진 영화로, 영화사의 초기를 장식하는 유명한 초단편 영화다. 50초 남짓의 이 영화는 박진감 넘치는 스토리도, 관객을 몰입시키는 서스펜스도 없다. 그러나 전해져 내려오는 썰에 의하면, 영화를 보던 관객이 다가오는 열차에 놀라 극장 밖으로 뛰어나가기까지 했다고.
뿐만 아니다. 1905년에 개봉한 <대열차강도>의 관객은 영화의 마지막 씬을 보고 기절하기도 했다. 당신이 궁금해 찾아본다 해도 별건 없다. 남성 한 명이 묵묵히(무성 영화니 당연하다) 서있다 카메라를 향해 총을 쏘는 장면이 전부다. 총알이 여기저기로 날아다니는 액션 영화에 익숙한 우리에게는, 조금의 감흥도 주지 않는 장면일 수 있다. 그러나 당대의 관객들은 이 장면을 보며 생생한 시각적 자극을 느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어떠한가? <대열차강도>보다 더 강렬한 영화들이 넘쳐나지만 영화관에서 조는 사람들은 점점 늘어만 간다. 쇼츠와 릴스에 익숙한 우리에게는 영화의 러닝 타임이 너무 길게만 느껴진다. 뒷부분에서는 집중력을 잃기까지 한다.
작년 전주 영화제에서의 내 경험만 비추어봐도 그렇다. 어떤 영화를 보고는 아주 깊게 잠들어버렸고 덕분에 영화가 끝난 후 누구보다 개운하게 영화관을 나섰다. 그 영화는 아주 지루했다. 그러나 글을 쓰는 지금. <대열차강도>를 보고 기절해 버린 역사 속 그 사람은 이 영화를 보고 심장마비로 쓰려졌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이처럼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어느 때보다 지루함을 쉽게 느끼는 시대다. 이는 지금이 인류의 역사 속 그 어느 때보다 자극적이라는 사실에 기인한다. 바야흐로 '이미지 홍수의 시대'다.
'이미지 홍수의 시대'라는 용어는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반까지 활동한 '게오르그 짐멜'이라는 사회학자의 저서에서 처음 등장한다. 놀랍게도, 그는 지금으로부터 약 백 년 전 이미 우리의 삶의 방식에 일어나게 될 변화를 예측해 낸 것이다. 그의 저서인 <대도시와 정신적 삶>에서는 해당 단어가 직접 언급되며 대도시에서의 삶이 어떻게 변하고 있으며, 또 어떻게 변할 것인지 분석한 내용이 담겨있다.
그는 대도시에서 외적, 내적 자극들이 끊임없이, 그리고 빠르게 변화하는 현상에 주목했다. 인간의 의식은 선행하는 인상과 새로운 인상 사이의 차이를 본질로 전개되는데, 대도시의 경우에는 이 인상이 급격히 교체되기에 인간에게 필요한 의식의 총량이 급증한다는 것이다. 도시에서의 삶을 처음 경험하는 사람들은 이로 인해 큰 충격과 내적 동요를 겪는다.
게오르그 짐멜은 이로 인한 반응으로 두 가지를 꼽는다. 첫 번째가 바로 '신경과민증'이다. 사람들은 가득 찬 이미지로 인해 자극에 예민해진다. 이후 나타나는 두 번째 반응은 바로 '둔감증'이다. 인간이 적응의 동물이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이는 당연한 증상일 테다. 새로운 자극에 큰 에너지를 쏟지 않기 위해 자극에 둔감해지는 방향으로 적응한 것이다.
이는 화폐 경제와도 관련 있다. 경제적으로 발달한 대도시에서는 화폐 경제를 바탕으로 한 계산적인 이성이 사고를 지배하게 된다. 특정 사물을 취급할 때 개별적인 차이나 고유한 가치보다는, 화폐 단위로 평가되는 교환 가치에 집중한다. 사물이 가진 질적 가치는 양적 가치로 변해버린다. 그릇을 사러 시장에 나온 사람들은 장인 A가 만든 그릇 하나, 장인 B가 만든 그릇 하나를 5달러짜리 그릇 두 개로 해석해 버린다.
우리는 이 '둔감증' 때문에 사물 자체를 공허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었고 덕분에 우리의 삶은 편리해졌다. 그러나 동시에, 편리함은 지루함을 불러왔다. 이미지 홍수의 시대에 대응하기 위한 방어 기제로 인해 우리는 너무나도 쉽게 지루해진다.
게오르그 짐멜의 요지는, 이미지 홍수라는 시대적인 변화가 지각 방식에까지 변화를 미쳤다는 것이다. 동시대의 유명한 사회학자인 벤야민도 짐멜과 비슷한 논지를 펼친다. 그는 자신의 에세이인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 사진과 영화라는 새로운 예술 매체의 등장이 어떻게 사람들의 지각을 바꾸었는지, 그리고 그 바뀐 지각을 어떤 방식으로 반영했는지를 설명한다.
전통적인 예술 작품과는 다르게, 사진이나 영화는 현실을 복제하고 재생산한다. 복제된 예술 작품은 '아우라'를 잃었다. '여기, 지금'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어떤 '현존성'을 잃은 채로, 어떠한 경험의 일회성을 강하게 느끼는 '아우라의 체험'의 순간이 사라지게 되었다.
이처럼 새로운 매체로 인해 발생한 아우라의 몰락은 당대 사회의 변화, 그리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지각방식의 변화와 상호작용한다. 일회적인 아우라보다 반복되는 복제물의 소유에 집중하게 된 사람들은 파편화된 지각 방식을 통해 자극을 수용하게 되었다. 일명 '정신분산적인 지각'이다.
요약하자면-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은 빠르고 복잡하며 정신없다. 이는 그 시대의 사람들의 지각방식을 바꾸었고 동시에 지각방식의 변화를 반영했다. 매체와 사회, 그리고 매체와 개개인의 상호작용은 자극의 수용 방식 자체를 뒤흔들 정도의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
앞서 살펴본 짐멜과 벤야민의 에세이는 과거에 쓰였다고 믿기지 않을 만큼 현대 사회를 아주 잘 묘사하고 있다. 그들의 예상대로, 현대인들은 이미지 홍수의 시대를 살아가며 끊임없이 변화하는 복잡한 자극에 노출되었다. 우리는 정신분산적인 지각을 경험하고, 끝으로는 자극에 대한 정서적 반응이 축소되는 둔감증을 앓는다. 둔감증에서 벗어나기 위해 더 자극적인 쾌락적 경험을 찾아 헤매는 현대인들의 모습은 현대 사회에 적응한 모순적이고도 안타까운 반응으로 해석된다.
지루함의 증상을 동반하는 이 둔감증은 현대인에게 질병과도 같다. 벤야민이 강조했던 것처럼, 매체의 변화는 사회의 변화로 이어지고 이는 다시 매체에 반영된다. 우리가 앓고 있는 이 둔감증을 더 날카롭게 진단하고 처방을 내리기 위해서는 이 매체와 사회와의 고리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2023년, 영화는 어떤 형태로 제작되어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을까. 이미지 홍수의 시대에 맞춰 더 많은 이미지를 쏟아내고 있을까, 혹은 일상 속 자극의 방패막처럼 사유의 시간을 제공하고 있을까. 이어지는 글에서는 벤야민이 기술복제시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수단으로 영화를 언급한 내용을 살펴보고, 그 내용을 현대에까지 확장할 수 있을지에 대해 다뤄보고자 한다. 끝으로 영화가 어떻게 기능해야 할지 그 방향성에 대해 논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