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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om Aug 14. 2023

이미지 홍수의 시대 속 영화 下

비일상적인 사유의 장, 영화

앞선 글에서 우리는 게오르그 짐멜과 발터 벤야민이 우리 사회를 예측한 글을 다뤘다. 본 글에서는 벤야민의 에세이에 조금 더 집중해보고자 한다.




1. 훈련도감으로서의 영화


벤야민은 갑자기 바뀌어버린 지각 방식으로 인해 사람들이 겪게 된 혼란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 영화를 다시 언급한다. 인상 깊은 것은, 그가 영화라는 새로운 매체를 지각방식의 변화를 가져온 계기면서 동시에 그 변화에 적응할 수 있는 도움을 주는 도구로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예방접종', '훈련도감'이라는 단어를 사용해 영화의 기능을 설명한다. 


기존 회화와 달리 영화는 하나의 흐름을 표현하고 몽타주 기법을 통해 장면을 빈번하게 교체한다. 빠르게 지나가는 영화 속 이미지들은 복잡한 대도시의 풍경과 정확히 닮아있다. 때문에 그 시대의 영화는 시청자에게 오락의 기능을 제공하는 동시에 사람들이 대도시에서의 정신분산적인 지각을 '체험'할 수 있게 돕는다. 영화 관람이라는 경험 자체도 대도시에서의 삶을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창이 된다. 예방접종이라는 벤야민의 표현처럼, 사람들은 영화를 보며 대도시에서의 삶을 미리 훈련한다. 영화관에 앉아 모르는 타인과 시각적 경험을 함께 한다. 같은 장면에서 울고 웃으며 표면적인 상호작용을 주고받는다. 일종의 도시적 방식의 유대감을 경험한다. 


이처럼 벤야민에게 영화라는 매체는 위협을 가져옴과 동시에 이에 맞설 수 있는 도구가 된다. 위협과 변혁. 다소 모순적인 두 개념이 새로운 예술인 영화 속에 동시에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2. 영상 매체는 일상화되었다


이처럼 벤야민의 시대에 '정신분산적 지각'이란, 수용 과정에서 비슷한 지각방식을 요구하는 영화를 통해 사람들이 미리 경험하고 적응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현재, 이런 정신분산적 지각은 훈련을 통해 익혀야 하는 새롭고 생소한 지각 방식이 아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유아기 때부터 미디어에 노출된다. 통계에 따르면 유아의 80% 이상은 이미 미디어 경험을 일상적으로 접하고 있으며 일일 평균 3시간의 노출 실태를 보이고 있다. 잠자는 시간, 밥 먹는 시간을 제외한다면 3시간은 우리의 일상을 지배할 정도로 큰 비중을 갖는다. 


이처럼 우리는 이미 이른 나이부터 영상 매체에 익숙해져 있으며, 영상 매체 특유의 지각 방식은 아주 일상화되어 있다. 나아가 미디어는 세계를 보는 눈이 되어 우리의 일상 속 지각을 지배하고 있다. 때문에 영화는 더 이상 벤야민의 주장처럼 훈련도감으로 기능하지 못한다. 현대인은 영화에서 또 다른 새로운 기능과 역할을 찾아내야 한다. 


만약 우리가 오락 기능에 집중해 미디어 매체를 다룬다면, 지루하고 난해한 예술 영화는 어떠한 의미도 갖지 못한다. 영화가 오락 기능을 충족하기 위해서는, 이미 자극적으로 변해버린 우리 주변의 다른 콘텐츠와 마찬가지로 더 맵고 더 짜고 더 달게 변해야 할 것이다. 잔인하고 선정적인 방식으로. 


그러나 우리가 영화에 일차적인 쾌락 제공의 기능만 부여한다면, 그리고 이 기능만을 위해 영화가 더 자극적으로 변해간다면, 우리의 지각도 쾌락만을 쫓는 방향으로 적응해가지 않을까. 이미 자극으로 가득 찬 사회에서 더 강한 자극만을 찾아 헤매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영화가 비일상적인 지각을 제공하게 된다면 어떨까? 마치 자극의 방패막처럼, 일상에서는 경험하기 힘든 사유와 사고의 틀을 제공한다면 말이다. 깊이 고민하고 파편화된 이미지를 연결해야만 의미를 파악할 수 있는 그런 매체로서 말이다.




3. 키노-아이(kino-eye)를 통한 사유


"평범한 눈으로 보면 당신은 거짓을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화의 눈으로 보면, 당신은 진실을 봅니다. 만일 좀 떨어진 곳에서 누군가의 생각을 읽어야 한다면, 그 기회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바로 키노-아이(KIno-eye)에 의해 드러나는 것이죠.”


해당 인용문은 지가 베르토프라는 러시아 영화감독의 말이다. 베르토프는 훗날 많은 영화인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그는 '키노-아이(kino-eye : 직역하면 카메라의 눈이라는 뜻이다)'라는 용어를 사용하며 카메라의 눈이 인간의 눈과 갖는 차이점에 집중했다. 그는 뻔하고 선형적인 서사를 거부하며, 인간의 눈보다 우위를 갖는 카메라의 눈이 세상을 총체적으로 파악하는 데에 도움을 준다고 주장했다. 영화의 눈을 통해 삶을 생생히 담아내고 진실을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의 핵심이다. 

지가 베르토프(1896-1954)

벤야민도 기계의 눈을 통해서만 가능한 시각의 무의식을 언급했다. 카메라의 기계적 설정, 움직임, 미장센을 통한 연출 등 카메라의 눈을 통해서만 감각 가능한 영역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카메라의 눈과 편집기술의 힘을 빌린 영화는 시간의 흐름에 의해 분리된 현상을 시각적으로 연결하는 능력을 갖는다. 인간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시간 순서와 속도로 세계를 보여준다. 


무엇보다 키노-아이는 주제와 관련된 수많은 현상들 가운데에서 유용한 무언가를 선택적으로 포착한다. 카메라를 통해 삶으로부터 필름조각들이 추출되고 이를 통해 하나의 주제를 은유적으로 드러내는 장면들이 구상된다. 베르토프는 아무런 관계를 갖지 않는 필름 조각들을 이어 붙임으로써 새로운 의미가 형성된다는 것을 발견했다. 마치 단어들을 조합해 의미를 전달하는 시처럼, 영화도 하나의 언어처럼 기능한다. 


이처럼 베르토프는 영화를 진실을 전달하는 언어로 다뤘다. 그에게 있어서 영화는 감각을 전달하는 매체이자 고심껏 이어 붙인 장면들 각각과 그들 사이의 관계를 통해 메시지를 은유적으로 드러내는 매체다. (물론 그는 영화를 이데올로기적 혁명을 위한 도구로 삼는 등 다분히 정치적인 주장을 펼쳤지만 이와는 별개로 영화가 시처럼 작동한다는 주장은 현재에도 유효하다.)


 틱톡, 쇼츠 등 직접적이고 쾌락 중심적인 현대의 매체들과 달리 비교적 긴 러닝타임동안 시적인 표현을 보여주는 예술영화들은 은유성을 갖는다. 이 은유성은 바로 그들의 존재 이유가 된다. 만약 내가 '왜 꼭 영화여야만 하는가?'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삶을 은유적으로 경험하는 창을 제공한다'는 사실을 답변으로 제시할 것이다.


물론 이런 간접적인 표현 방식은 지루함으로 전환될 가능성이 크다. 관객은 특정 장면을 넣은 감독의 의도를 상상하고 해당 장면 속 기계적인 장치들(카메라 설정과 움직임, 화면 구도, 미장센)이 어떻게 주제를 표현하고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야만 한다. 이 일련의 과정을 원치 않는 관객들은 영화의 표면만 보고 지루함을 느낄 수도 있겠다.


그러나 오히려 이런 은유적 경험을 통해, 고자극으로 가득 찬 일상에서는 체험하기 어려운 특유의 사고와 사유를 체험할 수 있다. 생각해 보면 정말 기억에 남는 영화들은 일상에서 접하는 다른 영상 콘텐츠들과 달리 지루하고 이해하기 어려웠다. '정말 지루했다'라는 평은 어떻게 보면 '특별했다'라는 의미다. 때문에 지루한 영화는 오히려 긴 여운과 울림을 남긴다. 




4. 영화 속 '키노-아이(kino-eye)'


관련해 이전 글에서 언급했던, 날 졸게 만들었던 영화를 소개하고자 한다. <죽음을 운반하는 자들>이라는 스페인 영화다. 1년이 지났는데도 졸음 가운데에 살아남은 몇몇 장면이 선명히 떠오르는 것을 보면 그 영화가 참 인상 깊긴 했다. 나중에 영화를 찾아보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이 영화야말로 베르토프가 말하고자 했던 영화의 시적 은유가 잘 드러난 작품이다. 관객을 긴장시키는 스릴이나 설렘을 주는 로맨스도 없는 영화다. 그저 지루하리만큼 묵묵하게 두 이야기를 병치해 전개하는 것이 영화의 줄거리의 전부다. 하나는 콜럼버스의 돛을 탈취해 도주하는 세 선원의 이야기며 다른 하나는 동생의 시체를 당나귀에 매고 섬을 떠도는 여자의 이야기다.


전혀 무관한 것 같은 두 이야기는 기승전결 없이 병치되어 흘러간다. 선원들은 돛을 운반하고 여자와 당나귀는 동생의 시체를 운반한다. 관객은 이유도, 서사도, 그들의 목적지도 알 수 없다. 이뿐만이 아니다.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흐릿하고 어두운 밤 이미지가 등장하는가 하면, 의미를 알 수 없는 불의 이미지가 반복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죽음을 운반하는 자들> 속 흐릿한 이미지


관객은 영화를 보며 일상에서 겪을 수 없는 예술경험에 도달한다. 주인공들이 향하는 곳과 두 이야기의 연관성에 의문을 품으며, 죽음을 운반한다는 추상적인 제목과 영화 속 샷들을 연결해 본다. 관객은 그들도 모르게 추상적인 이미지들을 해체한다. 


불이 꺼지는 모습을 역재생한 엔딩 샷에서는 베르토프가 그토록 강조했던 키노-아이의 기능이 정점에 달한다. 꺼졌던 불이 다시 피어오르는, 인간의 눈으로는 경험할 수 없는 장면이 역재생이라는 기계적 처리를 통해 감각된다. 카메라의 눈을 빌린 새로운 감각이다. 생명을 은유하는 듯한 불은 꺼졌다 피어오르고, 상징적인 불의 이미지는 관객을 영화의 절정으로 데려간다. 초반부에 느꼈던 지루함에 비례해 더 강렬하게 느껴지는 이 엔딩장면은 강력한 여운을 남긴다.


 영화가 끝나고 이어진 GV에서 엘레나 히론 감독은 해당 영화가 스페인의 마녀사냥 역사와 식민지 침략 문제를 주제로 다뤘다고 밝혔다. 관련된 표현이 직접적으로 등장하지 않았으나 돛대, 선원, 섬의 주민처럼 보이는 여자, 죽음과 관련된 자연의 이미지들을 통해 관객은 주제를 은유적으로 이해하고 납득한다. 각 장면이 시처럼 기능하며 감독이 전하고자 하는 주제를 전달하는 동시에 영화가 보여주고자 하는 세계를 재현한다. 키노-아이를 통해 가능해진 엔딩샷은 꺼지지 않는 죽음들의 역사를 강조하며 주제의식을 더 심오하게 강화한다. 




5. 영화가 우리 시대에 갖는 의미



지가 베르토프는 진실을 드러내려고 하지 않는 영화는 무의미하다고 말하며 모든 영화적 수단들(키노-아이의 기능)은 진실을 위해 필요한 것이라고 말한다. 물론 여기서 베르토프가 말하는 진실은 정치적 혁명에 관한 것이지만, 그의 주장에서 정치성을 배제하고 우리 시대에 보편적으로 적용해 보자. 


이때의 ‘진실’은 감독이 전하고자 하는 주제를 뜻할 것이다. 일차적인 쾌락 위주의 자극은 삶의 감각을 깨워줄 메시지가 부재한다. 공허한 이미지로 가득한 이미지 홍수의 시대에서, 자극을 수동적으로 수용하는 것은 결국 이미지 홍수에 휩쓸리는 것과도 같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죽음을 운반하는 자들>의 사례에서 본 것처럼, 영화는 키노-아이라는 기계의 눈을 통해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방식으로 이미지를 보여준다. 특정 샷들은 시적 상징처럼 기능해 은유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한다. 따라서 영화의 수용자들은 키노-아이를 빌린 감각적 체험을 통해 능동적으로 주제, 즉 진실을 찾으며 이미지를 사유한다.


정신분산적 지각이 보통의 지각방식이 된 현대 사회에서, 영화는 더 이상 벤야민의 주장대로 훈련도감, 예방접종으로 기능하지 않는다. 대신 영화적인 표현을 통해 사유 경험을 가능하게 한다. 몽타주적 편집으로 인해 파편화된 장면들은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돼 하나의 주제로 수렴한다. 이 수렴의 과정에서 관객은 일상에서 체험하기 어려운 예술 경험을 겪는다. 


이처럼 영화는 무의미한 자극으로 가득 찬 사회에 대항하기 위한 도구로 기능하며 비일상적인 사유의 장이 된다. 쾌락적인 이미지들과 대비되는 예술영화는 오히려 이전보다 더 강한 여운을 남긴다. 이로써 우리는 매체가 사회를 반영하는 동시에 사회의 문제를 진단해 해결책을 처방할 수 있다는 결말에 이른다. 


벤야민이 현대 사회의 매체를 위협인 동시에 변혁으로 본 이유도 이런 모순적이고 양면적인 매체의 특성에 숨어있다. 무의미한 자극만을 쫓으며 이미지 홍수에 휩쓸릴 것인지, 아니면 영화경험을 통해 비일상적인 사유를 시도할 것인지는 후자를 위한 우리 시대의 영화적 시도와 능동적인 노력에 달려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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