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뻬 플레시
이전 글에서 밝혔듯이 기본 동작이나 장비등에 관한 글은 찾기 쉽기 때문에 플레시 동작부터 글을 써나갈 예정입니다.
플레시는 펜싱을 떠올렸을 때 가장 상징적인 동작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 단체의 심볼이나 올림픽 픽토그램에서도 플레시 동작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USA팀의 로고는 플레시 동작과 세 종목의 블레이드를 흰색 사선으로 넣어 동세감이 느껴지게 잘 디자인한 것으로 보입니다.)
신체 부위나 동작을 묘사한 펜싱 용어 중 유일하게 예외적인 이름이기도합니다. 프랑스어로 화살이란 의미로 갑자기 날아들듯 빠르게 터치(뚜슈 touche)하는 공격 동작입니다. (영미권에서는 러시(rush)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전혀 다른 뉘앙스의 후레시라고 발음하지 말아주세요.) 플레시 명칭의 유래를 근거없이 추측해보자면, 14세기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100년 전쟁 당시 잉글랜드군이 활(장궁)을 주무기로 삼아 프랑스에 맞서 이긴 것에서 기인한 건 아닐까합니다. 접근전만 가능한 칼에게 원거리에서 기습적으로 날아드는 화살은 위협적인 필살기처럼 느껴졌을 것 같습니다. (현실에서는 잘 쓸 수 있어야 필살기)
펜싱의 세 종목 Sabre, Épée, Fleuret마다 움직임이 다른데, 이 글에서는 에뻬(épée)를 다루겠습니다. (Sabre에서는 Fléche대신 Flunge라고하며 발을 교차하지 않습니다. 다른 종목도 다룰 예정입니다.)
이어질 내용이 길기 때문에 요약하자면, 플레시는 적정 거리에서 반격하기 어려운 순간에 빠르게 팔먼저 겨누고 뒷발을 앞으로 내딛으며 공격하는 기술입니다. 거리보다는 타이밍(펜싱타임)이 중요합니다.
(말로는 참 쉽죠? ㅎㅎ)
엉 갸드(en garde) 포지션에서 거리가 다른 두 상황(situation)과 전진 중인 상황으로 구분해서 묘사하겠습니다. (유럽에서는 상황(시취에시옹 situation)이라는 말로 맥락을 갖춰서 설명합니다. 한국말 '네', '네?'. '네네', 넵이 글자로만 보면 유사하지만 쓰이는 상황이 다른 것처럼 펜싱은 대화와 비슷한 면이 있어서 이전 동작이나 맥락에 따라 달라집니다.)
0. 상대의 펜싱타임 중 (이전 글 중 펜싱타임 부분 참고)
1. 순간적으로 상대 가슴을 향해 팔을 뻗으며(la main d'abord) 상체를 앞으로 기울이고,
2. 무릎이 살짝 굽혀진 상태를 유지하며 (몸의 위치가 높아지지 않도록)
3. 균형을 잃을 때(off balance)까지 앞발에 체중이 실리도록 앞으로 과감하게 기울이면서
4. 뒷발을 밀어서 빠르게 앞발을 교차하여 나가는 동시에 앞발을 뒤로 밀어준다.
(몸이 위로 뜨지 않도록 발을 뒤로 미는 느낌으로)
5. 당겨온 뒷발이 지면(piste)에 닿기 전에 터치 되고 상대와 거리가 가까워지면,
뻗은 팔을 자연스레 회수하며 본인이 칼을 들고 있는 방향으로 빠져 나간다.
상대방이 엉갸드 포지션이고 가슴부위가 타겟인 상황(high, inside line)으로 설정하여 연습합니다.
상대방의 가드 포지션에 따라 달라지지만 가장 면적이 넓은 표적인 가슴을 터치하는 게 일반적입니다.
세분화하느라 여러 문장으로 기술했지만 전부 한동작이며 특히 0부터3까지는 순간적으로 빠르게 진행됩니다.
0. 상대의 펜싱타임 중 (이전 글 중 펜싱타임 부분 참고)
1. 앞발을 반발(드미 demi) 뒤로 당겨 딛고
2. 순간적으로 상대의 가까운 부위(+어깨, 상완)를 향해 팔을 뻗으며 상체를 앞으로 기울이고(팔부터 발끝까지 온 몸을 뻗는 느낌으로)
3. 앞발을 당겨 딛고 빠르게 균형을 잃을 때까지 앞으로 기울이면서 뒷발을 교차하여 나가는 동시에 앞발을 뒤로 밀어준다. (몸이 위로 뜨지 않도록 발을 뒤로 미는 것이 중요. 미는 힘은 거리에 따라 판단)
4. 당겨온 뒷발이 지면(삐스트 piste)에 닿기 전에 터치 되고 상대와 거리가 가까워지면,
뻗은 팔을 자연스레 회수하며 본인이 칼을 들고 있는 방향으로 빠져 나간다.
(위 그림과 같이 근거리에서 터치되면 보다 빠르게 회수해야함)
다양한 상황이 있을 수 있지만 상대방이발터치(뚜슈 오 삐에 touche au pied)를 노리고 낮게 공격하는 상황으로 설정하였습니다.
상대방이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접근해올 때 자신의 마지막 보폭을 줄이면(앞발이나 뒷발만 demi로 빼는식), 상대방과 거리가 좁혀지게 됩니다. 이 순간에 시도해볼 수도 있습니다.
1. 앞발만 반발 내딛거나(드미 막쉬 demi marche) 팡트 후
(중심이동을 쉽게하기 위해)즉시 뒤로 반발 당겨 디디며 지면을 미는 동시에
2. (이전 동작으로 이미 뻗은 팔을) 상대 가슴을 향하며 상체를 앞으로 기울이고
3. 앞발을 당겨 빠르게 뒷발을 교차하여 나간다.
4. 뒷발이 앞발을 교차할 때 앞발을 뒤로 밀어준다.
5. 당겨온 뒷발이 삐스트에 닿기 전에 터치 되고 상대와 거리가 가까워지면,
뻗은 팔을 자연스레 회수하며 본인이 칼을 들고 있는 방향으로 빠져 나간다.
플레시의 핵심은 거리보다는 상대를 놀라게 하는 타이밍을 잡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중거리보다 멀지 않아야합니다.
정지 상황에서 연습 시 거리는 팡트했을 때 터치될만한 거리에서 추가로 10cm~30cm를 더해서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유연성과 숙련도가 다르므로 자신의 신장에 맞는 거리를 찾아야합니다.)
슬로모션으로 잘 촬영된 영상을 보면, 앞발이 지면에서 떨어지기 전에 블레이드 끝(푸앙 point)이 상대방에 닿아있는 걸 볼 수 있습니다. 이때가 적정 거리에서 이루어진 터치입니다. (다시 말하면 뒷발이 교차해서 지면에 닿기 전, 앞발 끝부터 포인트까지 쭉 뻗은 자세) 적정 거리를 멀리 벗어난 위치에서 할 경우 터치가 안될 수 있습니다. 앞으로 당긴 뒷발이 착지했는데 상대에게 터치되지 않았다면 거리가 먼 것이므로 좀더 좁혀야합니다. 적정 거리는 신체조건과 상황마다 다르므로 연습하며 찾아야합니다. (이전 글 참고)
먼 거리에서 플레시를 날리면 아래 영상처럼 됩니다. https://youtu.be/E0FMHGrPyv8
상대방의 밸런스를 흔들거나 상대가 대응할 수 없는 펜싱타임을 찾아야합니다.
1. 상대방이 팔을 접은 순간
상대방의 포인트가 당신을 벗어나 있거나 공격해보라고 특정 라인을 개방하는 순간 플레시를 날립니다. (자신의 공격지점을 의도적으로 드러내는 것을 엉비떼 invité라고 함)
2. 팔을 뻗은 후 당기는 중일 때
상대방이 공격을 놓친 후 엉갸드 포지션으로 돌아갈 때 팔꿈치 안쪽, 어깨 또는 마스크에 플레시를 날립니다. 엉갸드 포지션으로 돌아가려고 앞발을 들어올리는 순간 플레시를 날립니다. (발을 볼 때 정면의 상대를 응시한 채 주변시로 봅니다. 에뻬에서는 마스크에 의도적으로 터치하는 것을 지양하며, 마스크에 터치했을 때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3. 상대방이 당신의 속임수(페인트)를 막으면, 플레시를 날립니다.
많은 선수들이 언제 플레시를 날리는지 질문을 받으면 순간의 감각으로 판단한다고 합니다. 실제로 충분히 훈련한 선수들은 의식적으로 판단하지 않는 수준이기 때문에 감각이라고 답하는 것입니다. 두뇌는 게으르기 때문에(=신체 에너지를 아끼는 것은 본능) 생각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때문에 '의식적인' 훈련을 해야하고 시합에서 감각을 활용할 수 있게되는 것입니다.
플레시는 기습적으로 날려야하므로 복잡한 판단을 하기 어렵습니다. 게다가 아마추어가 라인까지 판단하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그래도 이론을 염두에 두고 있다면 언젠가 실력이 향상되었을 때 눈에 보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라인도 상황별로 매우 다양해서 모든 걸 정리하기는 어렵습니다. 본 글에서는 요약만 언급하고, 세부 내용은 별도 주제로 다뤄보려고 합니다. 상대 블레이드를 잡았는지 여부와 안쪽 라인인지 바깥 라인인지로 구분해 볼 수 있습니다.
식스는 서로 득점하는 더블 터치(꾸 두블 coup double)를 최소화하기 위한 라인입니다.
1. 상대 블레이드를 내 안쪽 라인으로 뻗으면 상대 포인트(푸앙 point)가 자신의 몸 바깥으로 벗어나도록 꽁뜨르 식스(contre sixte)를 하며 팔을 뻗고 플레시를 날립니다.(opposition) 이 경우에는 자신의 블레이드 반대편으로 빠져나가야 합니다. (왼손잡이는 상대방의 오른쪽으로 빠져나가고, 오른손 잡이는 왼쪽으로 빠져나갑니다.)
2. 바깥 라인으로 페인트 공격이 들어올 경우 식스(sixte)로 잡고 상대 포인트가 당신 몸 바깥으로 벗어나도록 팔을 뻗으며 플레시를 날립니다.
상대 블레이드를 내 안쪽 라인으로 뻗을 때 4번 포지션(꺟뜨라고 말하기 익숙치 않죠? 꺅뜨라고 할게요.갸르뜨 아닙니다.)으로 잡으면 더블터치되기 쉽습니다. (다른 글에서 다룰 예정입니다.)
안쪽 라인으로 페인트 공격이 들어올 경우 5번 포지션(꺙뜨 quinte) 또는 2번 포지션(스공드 seconde)를 이용해 내 가드에 가까운 블레이드(forte)로 상대 블레이드 끝 부분(foible)을 잡고 플레시를 날립니다. 상대방의 몸통을 터치하려면 꺙뜨(quinte)를, 다리를 터치하려면 스공드(seconde)포지션을 취합니다. 이 라인에서 플레시를 하게되면 상대방의 안쪽 라인으로 들어가기 때문에 더블 터치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펜싱 클럽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라인인데, 아마도 터치 가능성이 낮기 때문이거나 지도자분들도 생소한 탓일 것으로 추측합니다.)
플레시에 대한 최선의 대응은 방어입니다.
1번 포지션(쁘림 Prime)으로 흘려버리거나 덕(Duck, 딱킹이라는 촌스러운 말 쓰지 말아주세요.)으로 회피할 수도 있고 스공드(seconde parade)포지션으로 막습니다. (이것도 다른 글에서 다룰 예정입니다.)
팔이 먼저 펴지 않는 경우 정확도가 낮아지며 실점하기 쉽습니다. (플레시의 기본)
두 발이 모두 지면에서 떨어지는 건 앞으로 향해야할 힘이 위로 분산된 것입니다. (선수들은 상황에 따라 가능합니다.)
뒷발을 앞에 착지한 뒤에도 터치를 못한 경우는 적정 거리보다 먼 것입니다. 바꿔말하면 상대방이 당황할만한 거리가 아닙니다.
상대를 지나친 뒤 터치한 것은 득점으로인정하지 않습니다. 상대를 지나치는 시점까지만 득점가능하며, 상대방의 전면에서 시작된 동작이 이어질 때만 득점으로 인정합니다. (플레시가 막힌 경우 상대를 지나치기 전에 뒤로 팔을 돌려 터치하며 빠져나가는 모습을 시합 영상에서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상대를 지나친 뒤에도 달리는 것은 충분히 off balance하지 않않기 때문입니다. off balance는 발을 밀어 추진하지 않고 순간적으로 중심을 앞으로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off balance가 충분하지 않을 경우 달리기처럼 추진력을 만들어 내게 되는데, 이것을 조심해주세요.
위 그림에서는 발을 뒤로 민다는 설명을 넣었었는데, off balance와 순서를 따지자면 off balance 직후에 미는 것이 맞습니다. 상황에 따라 사용하지않거나 세기를 조절합니다.
플레시를 날려야하는 상황에 적합한 띵언 한마디 적고 마무리 하겠습니다. 누구나 아는 흔한 말인데 찾아보니 다른 무술이나 스포츠가 아닌 펜싱 마스터가 한 말이었습니다. (최초는 아닐 수도 있는데 기록으로 남아있습니다.)
The best parry is the blow.
Luigi Barbasetti, The Art of the Sabre and the Épée, 1936.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떤 분들께는 낯선 용어 더 어렵게 느껴졌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읽어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면, 앞으로 연재될 다른 글을 기다려주시거나 가까운 펜싱 클럽을 찾아가서 배워 보시길 권해드립니다. :)
플레시 2편을 기대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