싫다고 말해도 괜찮아

목욕탕에서 거절하기 실전

by 레강스백


오랜만에 세신을 받았다. 몸이 뻐근하고 아파서 마사지까지 받으려 마음먹고 현금을 챙겼다. 세신이 밀려 좁은 목욕탕에서 발만 담그고 하염없이 내 차례를 기다렸다. 집 가까운 작은 목욕탕으로 갔는데 사람은 많고 탕은 좁고 불편했다. 하나 있는 탕은 네 명이 들어가면 꽉 찼다. 정부에서 노인들에게 지원해주는 '목욕탕 쿠폰'이라는 것이 있다. 한 달에 몇 장씩 지원해준다고 하는데 그래서인지 동네 목욕탕의 평일 오전에는 할머니들이 많았다. 다음번엔 멀더라도 넓고 쾌적한, 찜질방도 있는 목욕탕 투어를 해봐야지. 혼자 속으로 구시렁거리고 있는데 한 할머니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혼자 왔으면 같이 등 좀 밉시다."

순간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힘들어서 세신 받으러 온 건데 내가 남의 등을 밀어줘야 하나? 등정도는 밀어드릴까? 손 안 닿는 등만 안 밀면 얼마나 찝찝한데. 아 근데 내가 지금 몸살에 힘든데....

시골에 살 때 목욕탕에서 할머니들과 등밀이 품앗이(?)를 자주 했었다. 나이 드신 분들은 힘이 약하다.... 그래서 내 등이 시원하게 밀어 지지 않는다. 어르신들의 등은 때가 잘 안 나와서 내 힘은 많이 들어간다. 내가 밑지는 기분이다. 그렇다고 누군가를 도와준 뿌듯한 느낌도 안 든다.

"세신 기다리고 있어서요."

"내가 지금 허리가 너무 아픈데.... 병원 가야 해서 시간이 없는데, 지금 너무 바쁜데 등 좀 얼른 밀어주면 안 될까?"

"죄송합니다."

"♤♧+\=♤"{_+[>♧&="

동네 커피숍에 앉아서 글을 쓰고 있으면 동네 종교인이 말을 걸 때가 있다.

"공부하시나 봐요. 잠깐 할 이야기가 있는데 시간 좀 내주실 수 있을까요?"

"됐습니다."

"부탁인데... 잠깐이면 되는데..... 이렇게 부탁하는데...."

나는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이어폰을 꼈다.

아기 어린이집에 있는 시간은 나에게 골든타임이다. 돈으로 환산할 수 있는 시간이다. 그 시간에 원고를 쓰거나 돈 벌 궁리를 한다. 상대방은 아주 잠깐이라고 말하지만 내 시간과 기력을 불필요하게 낭비하는 일은 안 하고 싶다.

위급한 상황도 아니고 내 시간과 노력을 쓰면서 뿌듯함이 느껴지지도 않는 일은 안 하기로 다짐했다. 누군가 나에게 참 정 없다고 한다면 그렇게 생각하도록 내버려 두겠다. 그 사람에게 내가 월드비전에 2년 넘게 입금을 하고 있으며, 아이 친구를 잠깐 맡아달라는 부탁도 흔쾌히 들어주는 사람이라는 말을 굳이 할 필요는 없으니까. 어느 책에서는 기부도 이기적인 마음에서 나온다고 했다. 기쁨과 뿌듯함을 느끼기 위해서, 사회적 이미지가 좋아지기 때문에 기부를 한다는 것이다.


거절 그 자체는 '나쁜 짓'이 아니다. 오히려 어떤 경우에는, 시간을 끌지 않고 '아니요'라고 말하는 것이 상대방에게 도움이 된다. 쓸데없는 일에 에너지를 쓰지 않아도 되니 나에 대한 배려이기도 하다. -싫다고 말해도 괜찮아 p.177


등좀 밀어 달라는 할머니는 혼자 불평을 하시더니 다른 곳으로 갔다. 나도 곧 세신실로 갔다. 세신 받고 얼굴에 오이팩 얹고 마사지까지 받으니 천국이 따로 없었다. 세상에나 오래 묵은 발뒤꿈치까지 매끈하게 다듬어졌다. 이 세신사분 때문에 맘에 안 드는 작은 목욕탕 단골 하게 생겼다. 명함까지 챙겼다. 두 시간 개운하게 관리받고 나와서 광나는 얼굴에 로션을 발랐다. 아까 그 할머니도 나왔다. 엥? 바쁘다고 병원 가야 된다고 해놓고..... 내 옆으로 와서는 정신없어서 아무것도 못 챙겼다며 로션 좀 달라고 했다.

목욕탕에서 나온 시각은 12시 40분. 병원 점심시간. 할머니는 나에게 거짓말을 했다. 에잇~ 거절하길 잘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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