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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강스백 Apr 03. 2020

작년 오늘 제주도 흑돼지, 오늘 제주도 흑돼지

1년 동안 우리는 아주 조금 성장했다


작년 오늘, 우리는 제주도에 있었다. 아이 낳고부터 시작된 싸움이 몇 년 간 반복되어 마지막 수를 둔 남편의 퇴사. 작년 오늘, 남편은 퇴사하고 우리는 제주도 여행을 다녀왔다.

6개월 동안 남편과 집에 있었다. 우리는 거짓말처럼 싸움을 멈췄다. 어린이집 선생님께서는 아이가 예전보다 밝아졌다고 했다. 싸움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집에 있는 동안 남편은 오래 달고 살았던 지병 두 개를 수술로 치료했고, 나는 줌바댄스로 살을 조금 뺐다. 꿈같은 6개월이 지나 남편은 다른 회사에 취직했다. 퇴사 기간 동안 서로를 더 이해했다고 믿는다. 다시 일터로 나가는 남편이 애틋했다.

그리고 또 6개월이 지난 최근에 오랜만에 크게 싸웠다. 코로나로 집콕 생활이 한 달이 넘은 데다 남편은 갑자기 2주간 야간일을 했다. 오랜만에 니탓내탓을 하며 대판 싸웠다. 금방 화해하긴 했지만 큰 싸움에 상처가 남았다. 그러면서 뭔가 어렴풋이 깨달은 게 있다.


1. 내가 힘이 들면 상대방의 사소한 못마땅한 점이 크게 보인다는 것​
남편과 나는 지쳐 있었다. 한 달 가까이 아이와 하루 종일 붙어있다. 예전처럼 아이에게 짜증은 내지 않지만 부업으로 하던 일을 멈춰야 했다. 남편은 야간일 하고 와서 아침에 두어 시간 자고는 더 이상 자지 못했다. 잠이 부족하고 내 시간이 부족하니 예민해진 것이다. 그래도 남편이니까, 같이 살 사람이니까 이렇게 싸우고 화해하려고 노력하는구나. 남이었으면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가지. 실제로 다른 사람의 사소한 잘못이나 실수, 단점을 오래 붙들고 곱씹고 있는 사람과의 인연을 정돈했다.


2. 내가 남편 흉을 보면 남편과 사이가 좋은 친구들은 나와 멀어질 수도 있다는 것​
남편뿐만이 아니었다. 시어머니를 한참 미워했다. 시어머니가 한 말과 행동을 그대로 글로 남기기도 했고, 좀 친해졌다 싶은 사람에게는 시어머니 흉을 보기도 했다. 내 글에는 본인 시어머니를 욕하는 댓글들이 달렸다. 그때도 느꼈던 것 같다. 내가 시어머니를 미워하는 글을 올리면 시어머니와 사이가 좋지 않거나 시어머니를 미워하는 사람들이 내 글을 읽겠구나. 시어머니와 사이가 돈독하거나 시어머니와 잘 지내고 싶어 하는 사람은 내 글을 읽으려 하지 않겠구나. 내가 옳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며칠 전 남편과 싸운 이야기를 블로그에 올렸다가 부끄러운 마음으로 삭제했다.

어제는 남편회사 창립기념 휴일이었다. 연차를 써서 오늘도 휴일, 주말까지 4일을 쉰다. 작년 오늘, 남편이 퇴사하고 바로 제주도로 3박 4일 여행을 다녀왔다. 마침 얼마 전 주문한 제주도 흑돼지가 배송되었다.


4일의 휴가, 제주도 흑돼지, 그리고 오랜만의 큰 싸움. 작년과 비슷한 날이다. 어떤 마음으로 남편의 퇴사를 결정했었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된다.

"작년하고 뭔가 비슷한 날이야. 날짜도 똑같고. 우린 1년 전하고 똑같나?"

:"이우는 다섯 살이 되었고, 우린 아주 조금 성장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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