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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C Mar 31. 2016

산토리니, 그곳에서 시련을 보내고 희망을 보았다.

가슴을 울리는 둔탁한 소리로

가야 할 때 가지 않으면, 가려할 때 갈 수 없다.

- 영화, '세상에서 가장 빠른 인디언'

  다시는 이곳 그리스를 찾지 않겠노라고 호언장담을 해 놓고도 다시 찾은 데 대한 복수였을까. 그리스는 내게 절대 호락호락 한 곳이 아니었다. 배낭을 도둑맞은 나는 마음을 추스른 후 피레우스 항구로 향했다. 잃은 건 잃은 것이다. 나는 아테네에 온 목적을 달성하겠다는 의지를 불태웠다. 산토리니 때문에 아테네에 왔다가 배낭을 잃은 격이니 산토리니에는 꼭 가 봐야 되지 않겠냐는 생각이었다.

  오후 7시, 피레우스 항구에서 산토리니를 향해 떠나는 배가 있었고 나는 제일 싼 티켓을 끊었다. 좌석 번호도 지정되어 있지 않은 티켓. 그냥 배에 올라 아무 데나 앉아서 가면 되는 것이었다.  



 장소 : 그리스 산토리니.


  몸은 가벼웠지만 행색은 영락없는 방랑자다. 나는 하루 종일 거리를 쏘다니느라 출발 시간이 거의 다 되어서야 피레우스 항구에 도착했다. 산토리니로 가는 배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타고 있었고 일찌감치 배에 오른 사람들은 앉아서 갈 만한 좋은 자리를 다 차지하고 있었다. 산토리니, 이곳이 얼마나 좋은 곳이기에 그토록 유명하단 말인가.


  여행을 처음 계획했을 때부터 산토리니를 염두에 둔 것은 아니었다. 그리스에 대한 아픈 기억을 가지고 있던 나로서는 그리스를 단지 거쳐가는 곳, 경유지 정도로 여기고 있었지만 네팔에 머물 때 생각이 바뀌게 되었다. 바라나시에서 네팔의 카트만두로 향할 때 동행하게 된 화연. 네팔 이후의 여행 계획에 대해 이야기하던 중 그리스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화연은 파키스탄과 이란 그리고 터키와 시리아를 지나 예루살렘으로 향할 예정이었고 시간이 허락한다면 그리스를 꼭 가보고 싶다고 했다. "왜?"라는 나의 물음에, "산토리니 너무 예쁘지 않아요? 바다도 그렇고 거기 집들도 그렇고. 꼭 가서 직접 보고 싶어요"라고 했다. 그랬던가. 산토리니의 명성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그 정도로 예쁘고 멋진 곳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결국 여행지 목록에 끼어들게 되었다. 지금은 비록 화연과 헤어졌지만 어찌됐든 산토리니에 가기로 마음먹은 계기는 화연이 만들어 준 셈이다.


아테네 피레우스 항구에 정박중인 페리. 나는 이 배를 타고 산토리니로 향했다.


  우우우웅웅- 배가 항구를 벗어나 바다로 향할 때 바닥으로부터 미세한 떨림이 느껴졌다. 하루 종일 신경을 곤두세우고 돌아다녀서 그런지 졸음이 몰려왔다. 잠깐 눈을 붙이고 싶은 마음에 몇 시쯤 산토리니에 도착하냐고 승무원에게 물으니 "미드나이트(Midnight)"라고만 할 뿐 몇 시에 도착하는지는 말해 주지 않는다. 불친절한 승무원이다. "미드나잇? 두 시? 세 시?"라고 물으니 고개를 끄덕인다. 눈 붙일 시간으로는 충분하다. 나는 중앙 홀 구석에 자리를 잡고 누웠다. 이 많은 사람들이 내릴 때 소란스럽겠지. 그때 일어나서 같이 내려야겠다. 그렇게 나는 잠이 들었다.


  부웅-부웅!  경적 소리가 들렸고 나는 잠에서 깼다. 잠결에 어수선함이 느껴졌던 것도 같다. 주변을 둘러보니 사람이 하나도 없다. 뭐지? 조급한 마음에 창 밖을 보니 항구가 보인다. 밝은 불빛이 항구를 비추고 있고 그 뒤로 어둑한 물체가 높게 솟아있다.

  아, 도착했구나.


  나는 사람들이 배에서 내리기 위해 입구에 몰려가 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배는 점점 항구에서 멀어지고 있다.

  어, 어. 배가 왜 항구에서 멀어지고 있지?


  내가 잠든 사이 배는 산토리니에 닿았고 사람들은 산토리니에 내린 것이다. 나는 승무원에서 달려가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 여기서 내려야 해. 산토리니! 산토리니! 나 저기에 가야 된다고."


  승무원은 나에게 침착하라고 했다. 이미 배는 떠났고 산토리니에는 이제 내릴 수 없다고 했다. 내리려면 다음 섬인 '코스 섬(Kos Island)'에 내려야 한다고 했다.

  "코스?"


  승무원은 지도를 보여준다. 아테네에서부터 산토리니까지 온 만큼 더 가면 코스 섬이 있다. 그런데 승무원의 다음 말이 더 가관이다.

  "돈을 더 내야해. 네가 가진 티켓은 산토리니까지 가는 티켓이니까 코스 섬에서 내릴 거면 산토리니에서 코스 섬까지 가는 요금을 더 내야지."


  아니 지금 장난하나. 산토리니에 내려야 할 사람이 산토리니에 못 내려서 코스 섬까지 끌려가고 있는데 거기에 돈을 더 내라고? 안 그래도 배낭을 도둑맞아서 돈을 몽땅 잃어버린 판국에 나를 놀리는 건가. 서울에서 KTX 타고 대전에 가려다가 깜빡 잠들어서 부산까지 갔는데 부산까지 왔으니 돈을 더 내라는 격이다.


  나는 이 배가 어디까지 가냐고 물었다. 이 배의 최종 목적지는 터키 연안의 '로도스(Lhodes) 섬'이었다. 나는 내리지 않겠다고, 어차피 이 배가 로도스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오면서 산토리니에 들를 것이니 그때 산토리니에서 내리겠다고 했다. 그러자 그 승무원은 한 술 더 떠 그럼 '로도스'까지 가는 뱃삯을 치르라고 했다. 정말 어처구니가 없는 요구였다. 그러지 않으면 경찰을 부르겠다고 했고 급기야 1등 항해사쯤 되어 보이는 사람까지 와서 돈을 내지 않으면 경찰에 넘기겠다고 협박했다. 나는 울며 겨자먹기로 산토리니까지 뱃삯과 비슷한 금액의 돈을 더 내고 코스 섬에 내리기로 했다.


  아침 해가 뜰 무렵 코스 섬에 도착했고 나는 배에서 내렸다. 배에서 내리는 사람은 10명이 채 되지 않았다. 배는 나를 코스 섬에 두고 떠났다. 나는 섬을 정처 없이 떠돌았다. 그것 말곤 할 일이 없었다. 자전거 한 대를 빌려 자전거를 타고 섬을 돌아다녔다. 다들 왜 이리도 즐거워 보이던지. 코스 섬에는 가족 단위의 휴양객들이 많았고 항구에는 요트들이 빼곡하게 정박해 있었다. 오후 6시, 내가 탔던 배가 항구로 들어왔다. 승무원들에 대한 증오심. 볼 수록 화가 났다. 산토리니로 가는 길이 왜 이리도 힘든지 그리스의 저주가 계속되고 있었다.


※ 코스 섬을 떠날 때의 모습. 코스 섬이 점점 멀어지고 있다.

※ 코스 섬의 해안 도로와 섬 안쪽의 항구. 안쪽의 작은 항구에는 요트들이 정박해 있었다.


※ 산토리니, 이아 마을.


 에게해(Aegean Sea)의 섬 중에서도 아름답기로 유명한 산토리니였다. 지중해라는 말은 낯익지만 지중해 중에서도 그리스와 터키 사이의 '에게해'에 떠 있는 섬이 바로 산토리니다. '고대 그리스 신화'나 '로마인 이야기'와 같은 책에 등장하는 섬들이 대부분 '에게해'에 위치한 섬들이고, 이들 섬은 예부터 살기가 좋은 곳으로 알려져왔다(지중해 고대 문명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지금도 지중해에서는 최고의 휴양지로 손꼽히는 섬들이 이곳 에게해에 많이 있고, 그중 하나가 산토리니이기도 하다.


  고생 끝에 도착한 산토리니였다. 코스에서 산토리니로 온 사람은 나 혼자였다. 어둠에 잠긴 섬과 바다. 택시도 버스도 아무것도 없었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 길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아침이 되어서야 산비탈에 놓여 있는 길을 따라 올라갈 수 있었고, 어느 노부부가 혼자 걷고 있는 나를 보고선 자신들의 차에 태워 산토리니의 중심가인 '피라(Fira)'에 데려다주었다.

  산토리니는 생각보다 큰 섬이었다. TV나 잡지에서만 보던 이국적인 모습. 파란 바다와 절벽 위의 하얀 집. 그리고 파란 지붕의 조화가 어디에든 펼쳐져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것이 산토리니의 전부라고 믿고 있던 나에게는 약간의 충격이었다. 나의 믿음은 완전히 잘못된 것임이 드러난 것이다. '피라'로 향하며 본 산토리니의 풍경은 우리나라의 여느 섬, 예컨대 거제도나 강화도와도 비슷한 면이 있다고 할 정도로 평범했다. 다만 다른 점은 바다의 색깔 정도.

  피라에 도착했을 때, 내가 상상하던 산토리니를 보기 위해서는 '이아(Oia)'마을로 가야 된다는 것을 알았고, 나는 로컬 버스를 타고 이아 마을로 향했다. 이아 마을로 향하는 버스. 창 밖 저 멀리서부터 상상 속의 산토리니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눈부시게 하얀 벽과 파란 지붕의 대비. 그리고 코발트블루 빛 바다와의 조화.

  와아- 와아-

 눈을 뗄 수 없었다. 상상하던 그대로. 상상이라고 해 봐야 TV나 잡지, 인터넷에서 보았던 모습이었지만 정말 지금까지 봐 왔던 것과 다르지 않았다. 세간의 명성은 결코 과장된 것이 아니었다.


※ 이아 마을의 풍경.


  낮과 밤. 구름이 살짝 흩뿌려진 하늘. 지중해로 떨어지는 찬란한 햇살 속에서 산토리니는 빛났고, 바다와 조화를 이룬 아름다운 풍경을 선사했다. 이 정도라면, 다시 찾고 싶은 마음이 든다. 지금 내 상황에서 조금 아쉬운 점이 있었다면 내가 혼자였다는 것과 내 행색이 딱 가난한 여행자 티를 풀풀 풍기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어쩌겠나. 이게 현실인데.

  산토리니에는 파란 지붕을 가진 하얀 집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서쪽 바다 너머로 태양이 사라질 때 석양에 물든 산토리니는 고요했고 섬이 완전한 어둠으로 덮이고 나면 음악이 울려 퍼졌다. 거리 곳곳에서 거리의 악사들이 음악을 연주하면서 사람들의 눈과 귀를 즐겁게 해 주었던 것이다. 절벽 위의 건물들은 어둠 속에서 불을 밝히며 하나 둘 피어났다. 산토리니는 어둠 속에서도 아름답게 빛나는 섬이었던 것이다.


※ 해질녘의 이아 마을(왼쪽)과 어둠이 깔린 뒤의 산토리니.

※ 검은 해변, 까마리 비치.


  차를 타고 섬을 달리다 보면 한적한 시골 풍경을 만날 수 있는 산토리니는 그냥 보통의 섬처럼 보였다. 하지만 섬의 서쪽 끝 절벽에 걸려있는 아름다운 집들을 보았을 때 다른 섬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고 동쪽 해변, 소위 '검은 해변'으로 불리는 까마리 비치(Kamari beach)에서 해수욕을 할 수 있다는 것과 아름다운 코발트블루빛 바다에 드문드문 하얀 점들이 떠 다니는 것을 볼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산토리니는 '다르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가진 것이라곤 젬배와 카메라가 전부였다. 예상보다 많은 돈을 배 삯으로 날려버린 나는 섬을 걷다가 지치면 그 자리에 앉아 젬배를 연주하곤 했다. 젬배의 둔탁한 떨림이 산토리니를 울렸다. 관광객들은 나의 이런 모습에 그다지 흥미가 없는 듯했지만, 배낭여행을 온 듯한 젊은 여행자들은 내가 만든 리듬에 관심을 보였다. 본의 아니게 젬배 하나를 들고 여행을 하고 있는 모습을 하게 된 나에게 많은 여행자들이 관심을 보였고 더러는 나에게 필요한 것이 있냐고 물어왔다.

  필요한 것? 책이다. 읽을 책도 좋고 가이드북도 필요하다. 아무 책이나. 내가 '책'이 필요하다고 말하자 여행자들은 자신이 이미 지나온 곳이라며, 가지 않을 곳이라며 내가 앞으로 가야 할 곳들에 대한 정보가 담긴 부분을 찢어 주었다. 더러는 자신이 다 읽은 책이라며 소설책을 건네기도 했다.


산토리니의 그리스 정교회 예배당. 나는 이 앞에서 젬배를 연주했고 여행자들과 소통할 수 있었다.


  여행자들의 도움에서 나는 희망을 보았다. 그리고 여행을 잘 마무리를 해야 하는 이유를 발견하기도 했다. 나를 응원한다는 다른 여행자들. 나도 네가 즐거운 여행을 하길 바란다. 그리고 행운이 함께 하기를.

  그들은 내게 "Good Luck!"이라고 말하며 엄지 손가락을 치켜세웠다.

  나는 가슴을 울리는 둔탁한 소리로 화답했다.

  둥- 두구둥두- 따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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