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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C Mar 31. 2016

배낭 도둑 : 그리스 아테네

여행자가 어깨에 짊어진 것은 마음의 무게

행복하게 여행하려면 가볍게 여행해야 한다

-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인도를 여행할 때, 누군가가 말했다. 인도를 여행하는 사람의 배낭 무게는 전생에 지은 죄(업보)의 무게라고. 우리는 그 말을 하면서 누구는 전생에 죄 안 짓고 살아서 좋겠다. 나는 죄가 너무 많아서 이렇게 고생하고 있네.라는 말을 주고받으며 웃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내 배낭 안에 든 것들이 모두 필요가 있나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배낭에는 옷이 있고 책이 있고 각종 전자 기기의 충전 어댑터와 샴푸와 비누, 칼 가위뿐만 아니라 그 외에 온갖 잡다한 것들이 잔뜩 들어 있었다. 나는 60리터를 훌쩍 넘는 큰 배낭이 모자라 작은 보조 가방에도 뭔가를 채워 넣고 끙끙댔다.  



 장소 : 그리스 아테네.


  사람마다 자기한테 잘 맞는 음식이나 약이 있고 잘 어울리는 색깔이 있듯이 여행을 하다 보면 자신과 잘 맞는 도시나 나라를 발견할 때가 있다. 그곳에서는 언제나 즐거운 일이 생기고 기분이 좋다. 하지만 반대로 잘 맞지 않는 음식도 있고 남들은 다 좋다고 하는데 나는 별로일 수가 있는 것이고 잘 맞지 않는 색깔의 옷이 있기도 하다. 다른 나라를 여행할 때도 마찬가지다. 나와 잘 맞지 않는 나라가 있을 수 있다.


  많은 사람들에게 그리스는 낭만적인 곳으로 인식되고 있다. 에메랄드 빛 바다를 끼고 있는 새하얀 색상의 산뜻한 이미지로 그려지는 그리스. 고대 그리스 문명의 발상지로서 많은 소설과 영화들이 그리스 문명의 찬란함을 다루었고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유명 고대 철학자들이 그리스 출신이라는 사실은 그리스를 환상적인 나라로 만드는 데 있어 더 없이 훌륭한 재료가 된다. 또 현대의 많은 매체들은 어떤가. 맑고 투명한 지중해에 떠 있는 그리스의 섬들 -하얀 돌담과 파란 지붕으로 대표되는 산토리니- 은 각종 매체를 통해 이상적인 공간으로 묘사되고 있다. 나 또한 여러 가지 이유로 그리스에 대한 환상을 품고 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여행과 여행지에 대한 인식은 자신의 겪은 일, 경험에 의해 좌우되기 마련이다.

  내게 있어 그리스는 아픈 기억이 많은 곳이다. 특히 아테네에서의 기억은 그다지 유쾌하지 못하다.


  처음부터 그리스에 대한 나의 기억이 나빴던 것은 아니다. 첫 방문 때, 나는 아테네에 있는 파르테논 신전을 비롯한 여러 고대 그리스의 흔적들을 둘러보며 즐거워했다. 하지만 어느 날, 잠시 화장실을 들르기 위해 들어갔던 경기장에 갇혀버리는 사태가 발생했고, 그곳에서 빠져나오는 과정에서 그곳 관리자들에게 된통 혼이 난 적이 있었다(관련 글 - Are you Japanse? Yes, Japanese!). 그것은 그리스 악몽의 시작이었다.

  그리스 북부 테살로니키에서 기차를 타고 터키 이스탄불로 가는 길에 폭우를 만났고 철길이 유실되는 사고가 발생했다. 자칫하면 이스탄불에서 뜨느 비행기를 놓칠 뻔 한 적도 있었다(관련 글 - 폭우 때문에 기차가 멈췄는데 어떡하지?).

  이렇듯 다사다난한 그리스에서의 경험 때문에 나는 다시 그리스를 찾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다짐은 다짐일 뿐. 나는 '산토리니'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다시 그리스에 발을 들여놓았다. 이번에는 안 좋은 일이 생기지 않길 바랐다.


  그리스 북부 테살로니키에서 아테네로 향하는 야간열차. 기차를 타고 아테네로 가면 6시간이 걸린다. 아테네로 향하는 야간 열차에서 눈을 좀 붙이면 될 것 같았다. 기차역에서 항구로 간 다음 산토리니로 가는 배(페리)를 탈 계획이었다. 계획은 언제나 이렇게 완벽하다. 내 마음은 이미 산토리니에 가 있었다.


  기차에 자리가 꽉 찼다. 앉아서 밤을 지새우는 것도 힘든데 옆 자리에 앉은 아저씨와 맞은편에 앉은 아저씨가 서로 싸우듯 이야기를 하고 있다. 분명 정치 이야기일 것이다.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싸우는 모습이 우리나라 사람들이 정치 이야기를 하며 싸울 때의 모습과 똑같다.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말싸움은 아테네에 도착할 때까지 이어졌다.

  오전 5시. 아테네 중앙역에 도착한 나는 한 두 시간만 눈을 좀 붙여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직은 이른 시간이니 7, 8시쯤 역을 나서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항구로 가서 배에 오르기까지의 시간은 충분했다. 나는 기차역 안에 한쪽 벽면에 마련된 의자에 앉았고 큰 배낭은 옆쪽 벽에 기댄 채 비스듬히 세워 놓았다. 그리고 작은 바냉은 의자 밑 발 아래 놓았다. 나는 젬배를 껴안은 채 조금만 자야지라고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눈을 떴을 때, 뭔가 허전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뭐지, 뭔가 허전하다. 그렇지만 아직 졸음이 가시지 않았고 조금만 더 앉아 있다가 일어서야겠다는 생각에 다시 눈을 감았다. 그렇지만 허전함과 함께 찾아온 찝찝함. 뭘까, 이 허전함은. 다시 눈을 떴다.

  분명 내 옆쪽 벽에 큰 배낭을 세워 놓은 기억이 있는데 배낭이 보이지 않았다. 누가 옮겨놨나?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배낭은 보이지 않았다. 오전 8시에 가까워진 시간. 어느새 역은 사람들로 붐볐다.

  '뭐지? 뭐지!? 왜? 어디 갔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 가방. 내 가방 어디 갔어. 놀란 마음에 나는 벌떡 일어나 의자 주변을 바라봤다. 의자 밑에 작은 가방은 그대로 있었지만 아무리 보아도 큰 배낭은 보이지 않았다. 옆에 있던 사람들에게 내 가방에 대해 물어봤지만 모두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다급한 마음에 역무실, 매표창구 직원에게 물어봤지만 내 가방의 행방을 알 수 없었다. 감시 카메라도 없던 곳이다. 혹시 청소하는 사람이 치웠을까 하는 마음에 청소 도구함과 역 안의 화장실까지 샅샅이 뒤졌지만 발견할 수 없었고 역 안팎에 누가 가져다가 버려놓았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주변 쓰레기통을 몽땅 뒤졌지만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배낭을 도둑맞은 것이었다. 절망적이었다.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져나올 것만 같았다. 소매치기를 당했을 때와 비교도 할 수 없는 상실감이 몰려왔다. 아직 가야 할 길이 많이 남아 있다는 생각을 하자 눈앞이 캄캄해져 왔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 하나.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작은 가방은 그대로 있었다는 것이다. 작은 가방에는 카메라와 노트북 그리고 여권이 들어있었고 지갑에는 카드 한 장과 현금이 조금 있었다. 배낭 구석에 한국에서 환전해온 달러 뭉치가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왔지만 여권과 카메라, 노트북이 여기에 있는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배낭에는 노트북 충전 케이블과 카메라 충전기 그리고 옷, 책과 같은 것들이 들어있었다. 현금 몇 푼을 제외하면 정말 돈도 안 되는 도둑에게는 필요 없는 물건들만 가득한 것이 바로 '큰 배낭'이었다. 하지만 도둑의 입장에선 일단 들고 가기 쉬운 가방을 택했을 것이고 그것은 내가 앞쪽에 놓아두었던 배낭이었다.


  가방을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30kg 정도 되는 가방을 들고 멀리 가지 않았을 것이란 생각으로 역 주변의 주택가 쓰레기통을 살펴볼 작정이었다. 대부분의 물건들이 도둑에게는 쓸모없을 것이기 때문에, 가방을 풀어헤쳐 쓰레기통에 버렸을 가능성을 염두에 둔 것이다. 그렇게 주변 지역을 오전 내내 돌아다녔지만 나는 가방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나는 점점 지쳐갔다. 오후, 아테네에 내리쬐는 강렬한 태양은 내가 가방 찾는 일을 포기하게끔 만들었다.

  땀을 뻘뻘 흘리며 돌아다녔지만 모든 것이 헛수고였다. 내 손에 남은 것이라곤 노트북과 카메라 그리고 젬베가 전부였다. 또 입고 있는 옷은 또 얼마나 처량한가. 야간열차를 탈 때 나는 최대한 편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인도에서 구입한 인도 전통 의상의 느낌이 나는 펑퍼짐한 옷. 지금 내 모습은 영락없는 수행자 혹은 도인에 가까웠다. 인도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의상을 입은 까무잡잡한 피부의 동양인 여행자. 그의 한쪽 손에는 젬배가 들려있고, 어깨엔 작은 배낭이 걸쳐져 있다.


  여행을 계속 이어가야 할까. 나무 그늘에 앉아 생각했다. 여기서 그만두고 한국으로 다시 돌아갈까. 아니다. 여권도 있고 카메라도 있고 노트북도 있다. 중요한 건 아직 남아 있다. 아직 끝내기엔 너무 이르다. 그래도 이 작은 가방이라도 있는 게 어디야.


  나는 잃어버린 물건들에 대해 생각했다. 여러 권의 책들, 여행을 하며 읽을 것들이었다. 배낭 속에는 누군가에게 줄 선물들도 들어있었다. 작은 선물들이었지만 그것을 전해줄 사람을 생각하며 고민 끝에 고른 소중한 것들이었다. 그리고 내가 여행을 하며 다른 여행자들로부터 받은 선물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은 분명, 도둑에겐 아무짝에 쓸모없는 쓰레기로 여겨질 것들이다. 또 한 가지가 더 생각났다. 없어져버린 한 권의 노트. 그 노트에는 내 여행의 흔적이 담겨 있었다. 이번 여행뿐만 아니라 지난 여행에 대한 이야기까지 몽땅기록되어 있는 여행 노트가 사라져 버린 것이다. 도둑에겐 그것 또한 그냥 한 낱 종이 쪼가리일 뿐이다.


  경찰서로 가서 도둑맞은 물건에 대한 리포트를 작성했다. 잃어버린 물건들에 대한 가격을 적을 수가 없었다. 잃어버린 물건들에 대한 값어치를 어떻게 매긴단 말인가. 그 물건들의 가치는 돈으로 책정할 수 없었다. 하지만 실물로는 제로에 가까운 것들이었다. 나에게 아무리 소중한 것들이었다고 한들 다른 이들에겐 그저 그런 불필요한 물건들이었다. 나는 노트북 케이블과 카메라 충전기 등 잃어버린 전제 제품에 대한 금액만 기입했다. 그게 최선이었다.

  나는 시내로 나가 카메라 충전기를 새로 구입했고 노트북 어댑터를 구입하기 위해 '노트북 AS센터'를 찾았다. 노트북 어댑터는 한국으로부터 배송을 받아야 했고 4일이 걸린다고 했다. 4일, 그렇다면 나는 그 시간 동안 산토리니에 다녀와야겠단 생각을 했다. 산토리니에 가려고 아테네에 왔다가 이런 봉변을 당했으니, 어찌 됐든 그곳엔 꼭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나서 의류 재활용 센터에서 셔츠 두 개와 반바지 하나를 받아 가방에 넣었다. 이것이면 여행을 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다.


※ 피레우스 항구에 정박해 있는 산토리니로 가는 페리(왼쪽)과 길거리에서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들(오른쪽). 그들은 언제나 즐겁다.

※ 가방을 잃어 버린 후, 아크로폴리스 언덕에서. 내 여행 복장이라곤 인도에서 구입한 옷이 전부였다.


  시간이 약이었을까.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 생각해보면 여행을 하는 데 60리터 가방이 가득 찰 정도의 짐이 필요하지 않았다. 지금 내가 가진 작은 가방만으로도 충분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짜 필요한 것. 최소한의 것만이 남은 지금이었다.  

  배낭이 사라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느꼈던 상실감의 무게는 서서히 사라져갔다. 내 마음과 몸을 무겁게 짓누르던 것들이었다. 큰 배낭이 사라졌다는 것을 알았을 때, 나는 상실감의 무게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게 불과 몇 시간 전의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미 떠나가 버린 것들에 대한 미련을 버려야겠다고 생각했고 그 무게는 점차 가벼워졌다. 아등바등 짊어지고 싸매고 갈 필요가 없는 것이다.


  여행자가 어깨에 짊어진 것은 마음의 무게라 했던가. 욕심, 불필요한 것들을 버리고 오로지 본질만 찾아가야겠다고 다짐한 순간 나는 여행을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에 사로잡혔다. 그래 이대로 가는 것이다.


  Just Keep Go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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