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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C Mar 31. 2016

이젠 정말 추억이 되어버린 땅 : 시리아 하마

언젠가 또다시 만날 기회가 있겠지

그 일은 아련한 추억이 되었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다.

  언제쯤 끝이 날까. '아랍의 봄'이라 불리는 혁명의 종착지. 시작되었지만 아직 끝을 맺지 못하고 있는 곳. 평화롭던 도시가 폐허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내가 머물며 웃음 지었던 그곳은 무너져 내렸다. 도시는 망가졌고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장소가 되어 버렸다는 소식을 접할 때면 그곳에서 만났던 사람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외국인들에게 활짝 웃어 보였던 사람들. 그리고 그곳에서 만난 여행자들. 그 도시를 떠난 이후 줄곧 그곳의 시계는 멈춰있다. 그때, 우리는 즐거웠고 도시는 평화로웠다.



 장소 : 시리아 하마(Hama)


  그곳을 찾아가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다마스쿠스(Damascus)에서 하마(Hama)행 티켓을 끊었지만 버스는 서쪽 지중해에 접한 도시인 라타키아(Latakia)에 나를 내려놓았고, 그곳 버스 정류장에서 밤을 지새운 후 아침이 되어서야 나는 하마(Hama)로 향할 수 있었다. 밤새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한 나는 우여곡절 끝에 하마의 버스터미널에 도착했지만 그곳에서 리아드 호텔(RIAD HOTEL)로 가는 것도 쉽지 않았다. 지도 한 장 없고 아랍어도 할 줄 모르는 내가 터미널의 모든 사람들에게 호텔 이름을 말하며 가는 방법을 물었지만 아무도 나에게 도움을 주지는 못했다. 어떻게 해야 할까를 한참이나 고민했다. 인터넷에서 시계탑이 있는 곳에 호텔이 있다는 말을 본 기억이 났고 사람들에게 '시계탑'에 대해 물었지만 여전히 의사소통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고민 끝에 새로운 생각이 떠 올랐다.

  시계탑은 보통 시내 중심가에 있다. 일단 시내로 가서 사람들에게 시계탑을 물어봐야겠다.

  나는 사람들에게 다가가 "시티, 시티센터, 시티센터"라고 말했고, 한 남자가 손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미니버스(세르비스/승합차)를 타는 곳이다. 나는 그곳에서 또다시 "시티, 클락 타워, 시티 센터"라고 외친 끝에 차에 오를 수 있었다. 나는 "클락 타워, 리아드 호텔, 시티센터"라는 말을 주문 외듯 중얼거렸다. 그 말을 들은 한 남자가 "호텔!"이라고 외치더니 차를 세우고선 나에게 길을 건너가라고 했다.

  어라, 리아드 호텔이 보인다. 방향조차 가늠할 수 없는 사막을 헤매다가 죽음에 이르기 직전에 오아시스를 만나면 이런 기분이 들까. 구세주, 리아드 호텔이다. 나는 앞뒤 살필 것 없이 커다란 배낭을 멘 채 뛰었다.

  리아드 호텔을 찾은 이유는 단순했다. 나는 중동 지역을 몇 군데 돌아볼 생각이었지만 정보가 별로 없었기에, 한국인과 일본인 여행자들이 많이 찾는다는 하마의 리아드 호텔에서 사람들을 만나 여행 정보를 얻을 생각이었다. 하마 주변을 둘러보는 것은 덤이었다.


※ 시계탑 옆에 있던 숙소. 이곳은 내게 있어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곳이었다.


  4인 도미토리룸의 열쇠를 건네받았다. 3개의 침대 옆에 배낭이 놓여 있었지만 사람은 없었다. 샤워를 하고 나니 노곤함이 찾아왔고 잠을 청했다. 깨어났을 때는 이미 밖이 어두워져 있었다. 방엔 3명의 일본인 남자들이 있었다. 식사를 했냐는 나의 말에 그들은 밖에서 먹고 왔다고 했다. 그들은 내게 맛있는 파르페 가게가 있다며 그곳을 추천했지만, 밖으로 나가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천천히 움직여 위층의 주방으로 올라가 본다. 주방의 옆 방. 식탁이 놓여 있는 곳이 시끌벅적하다. 한국 사람 여러 명이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아, 반가워라. 혼자인 나는 그들에게 얼굴을 내밀고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간단한 소개를 하고 그들의 옆에 앉았다. 이집트, 요르단을 거쳐 이곳에 온 사람도 있었고 이란과 터키를 거쳐 이곳에 온 사람들도 있었다. 시리아의 하마는 중간 지점이었다. 내일은 무엇을 할 거냐는 물음. "뭘 할지 모르겠어요. 아직 정해진 게 없어요. 하루 쉬면서 뭘 할지 생각 좀 해봐야겠어요."라고 말했다. 한 박자 쉴 타임이다.


  오랜만의 휴식이었다. 꿈도 꾸지 않고 푹- 잘 수 있었다. 간단히 배도 채울 겸 거리로 나서 시장을 둘러보며 사진을 찍었다. 자신의 사진을 찍어 달라는 사람들. 나와 함께 사진을 찍자고 붙잡는 사람들. 차도르를 두른 여성들은 나를 힐끗 엿본다. 숙소로 돌아오니 어젯밤 술자리에서 보았던 여자애가 나에게 인사한다. 혼자 여행을 하고 있다고 했다. 오늘은 뭘 했냐는 물음에 그냥 시장을 둘러보고 들어왔다고 했다. 특별한 건 없었다.


※ 시장을 둘러볼 때, 사람들은 내게 사진을 찍어달라고 졸랐다. 가끔은 그들의 사진만을 때로는 함께 사진을 찍었다.


  "저도 그냥 돌아다니다가 들어왔는데. 어디 좋은 데 발견했어요?"

  전혀. 그냥 보통의 삶을 둘러보고 왔다고 했다.

  "오빠, 아까 숙소로 오다 보니까 길거리에서 찐옥수수 팔던데, 봤어요?"
  "옥수수? 먹어 봤어? 나 그거 정말 좋아하는데."
  "아 정말요? 나도 그런 거 좋아하는데, 먹으러 갈래요?"
  "좋지-"

  숙소를 나선 우리는 찐옥수수를 팔고 있다는 곳으로 갔다. 한국에서 파는 것과 다를 게 없었다. 가판대의 한쪽엔 옥수수를 삶는 물이 끓고 있고, 다른 한쪽엔 옥수수가 담긴 봉투가 쌓여 있다. 봉투에는 물방울이 송골송골 맺혀있었다. 옥수수에서는 희뿌연 김이 피어오른다. 우리는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사카란을 넣지 않아서일까. 생긴 건 한국의 그것과 똑같지만 약간은 밋밋한 맛이다. 그래도 좋다. 모든 것이 이국적인 낯섦으로 다가오는 중동에서 한국적인 느낌을 받을 수 있는 음식을 먹는다는 것. 이런 음식을 먹으며 편안한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것이 좋았다.


※ 하마의 구시가에서 찐옥수수를 먹었다. 금새 어두워진 거리, 우리는 하마의 갤러리에 들렀다.


  내일은 무엇을 할 거냐는 나의 물음에 그녀는 '크락 데 슈발리에(Crac des Chevaliers)'에 가 볼 것이라 했다. 크락 데 슈발리에. 들어본 것 같다. 같은 도미토리의 일본인 친구들이 어제 다녀왔다던 곳이다. 그녀는 그곳이 꽤 유명한 관광지라고 했다.

  "오빠, '천공의 성 라퓨타' 봤어요? 일본 애니메이션이요. 거기 있는 성이 천공의 성 라퓨타 모델이래요. 예쁘다고 하던데요?"
  "그럼 한 번 가봐야겠네."
  "같이 가요, 내일."   
  "그럴까? 같이 가면 되겠네"
  "잘 됐다. 거기 가는 방법도 까다로워서 혼자 가려면 힘들다던데, 다행이다."


  우리는 걸었다. 어느 작은 갤러리에 들어가 그림을 구경했다. 그림에서는 자유를 갈망하는 예술가들의 마음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날개가 부러진 비둘기는 피를 흘린 채 바닥에서 부르르 떨고 있었고, 높은 성벽은 절대 넘을 수 없을 것 같아 보였다. 사회주의 국가에서의 삶. 독재 국가에서 살고 있는 예술가들은 나름의 목소리로 민중들에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어둠이 깔린 하마 거리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수차 근처에는 카페가 많이 있었고 사람들은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수차가 천천히 돌아가는 거리. 물소리와 함께 하마의 시간은 천천히 흘러갔다.


  이른 아침, 숙소를 나섰다. 아직은 건조한 공기가 달궈지기 전이다. 버스를 세 번이나 갈아타고 크락 데 슈발리에에 도착했다. 마을을 굽어보는 산등성이. 그 위에 하얀 성(城)이 홀로 우뚝 솟아 있다. 천공의 성 라퓨타의 모티브가 되었다는, 그 옛날 십자군 전쟁이 있었을 때 많은 이들이 죽음을 맞이했던 곳이다. 성의 입구에서부터 성곽을 따라 긴 통로가 이어진다. 작은 창을 통해 들어온 빛이 통로의 길을 밝힌다. 빛이 들어와 닿은 부분을 빼곤 여전히 모든 것이 검다. 작은 창을 통해 바라본 세상은 아름답다. 빛은 희망이고 어둠은 절망이라 했던가.

  성의 곳곳은 무너져 있었다. 관광객 무리가 우르르 몰려와 성의 망루에서 사진을 찍고는 다른 곳으로 몰려갔다. 따듯한 바람이 망루를 스쳐 지나간다. 기분 좋은 바람이다. 대학에서 사진을 전공하고 있다는 그녀는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는다. 그러다가 대뜸, 나에게 말했다.

  "오빠, 젬배 연주해 줄 수 있어? 듣고 싶어"


  나는 인도 바라나시에 머물면서 2주 동안 뮤직 스쿨에서 젬배 연주 개인 강습을 받았다. 바라나시의 골목에는 악기와 요가 등 여러 가지를 배울 수 있는 '스쿨'이 있었고, 나는 그중 한 곳에서 젬배를 배웠던 것이다. 단지 두드리는 악기였지만 젬배는 사람들을 끌어모으는 힘이 있었다. 인도의 갠지스 강변, 암리차르, 맥글로드 건즈에서 그리고 터키의 카파도키아와 아다나, 콘야에서 나는 젬배를 연주했다. 사람들은 나에게 말을 걸어왔고 더러는 나와 함께 음악을 연주하기도 했다. 나는 어딜 가나 젬배를 가지고 다녔고, 탁 트인 공간만 있다면 나는 그곳에 앉아 젬배를 두드렸다.

  둥-두둥 딱딱. 둥둥 두둥 딱딱.

  젬배 소리가 폐허가 된 성을 울렸다. 적막을 가르는 단조로운 리듬은 쓸쓸했다. 성이 무너지기 전에는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악기를 연주했을 것이며 노래를 부르고 춤을 췄을 것이지만 지금은 무너진 돌담 사이로 잡초만 무성히 자라고 있는 성. 언젠가는 삶을 품고 있던 성이었을 것이다.


※ 천공의 성 라퓨타의 모티브가 되었다는 '크락 데 슈발리에 성'.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많이 파괴가 되어버렸다는 소식을 들었다.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망루에 앉아 젬배를 두드렸다.


  카메라에 그녀의 모습을 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젬배 연주를 멈추고 말했다.

  "사진 찍어 줄까?"

   "난 내가 나오는 사진은 안 찍어"라며 그녀는 나의 제안을 거절한다. 내 카메라로 그녀를 찍으려 하자 그녀는 손을 내젓는다.

  "안 찍어도 돼. 괜찮아."

   나도 내가 나오는 사진을 찍지 않는 편이다. 그렇지만 가끔은 내가 나오는 사진을 찍고 싶을 때가 있고, 누군가를 찍어주고 싶을 때가 있었다. 이 순간을 기억하고 싶을 때. 지금 이 바로 그런 순간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 시간을 저장하지 못했다.


※ 하마의 오론테스 강과 수차. 하마는 '수차'의 도시로 유명하다.


  다시 하마의 밤이다. 우리는 카페에서 맥주를 마신다. 하마의 밤은 내게 너무나도 편안한 기분이 들게 한다. 그녀는 하마를 떠나면 이집트로 갈 것이라 했다. 나와는 반대 방향이다. 나는 터키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그녀는 이집트에서 그리스로 간 다음 그곳에서 배를 타고 이탈리아로 갈 것이라 했다. 이집트에서 그리스로 가는 건 흔한 일이다. 그녀의 최종 목적지는 이탈리아. 방학을 맞아 이탈리아 여행을 오기로 한 친구와 그곳에서 만나기로 했다는 것이다.


"나도 터키에 갔다가 그리스로 갈 건데. 거기서 우연히 만날 수도 있겠네."

  '그럴리 없겠지'라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그렇게 말했다.

  나는 그리스에 닿으면, 그곳에서부터 북쪽으로 계속 나아갈 생각이었다. 유럽의 북쪽 끝.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까지 갈 것이다. 그게 내 계획이었고, 수많은 목적지 중 하나였다. 그래, 우리는 각자의 목표와 목적지가 있다. 여행자에게는 자신만의 목표에 대한 집념이 있는 것이다.


  아침, 나는 하마를 떠나기 위해 호텔을 나섰다. 언제나 낯설다는 느낌이 드는 건조한 공기. 오늘도 빵집에서는 빵이 구워졌고 나는 어제처럼 빵을 샀다. 나를 배웅하기 위해 몇 명이 함께 걷는다. 그들과 아주 오랜 시간을 함께 한 듯한 느낌이든다. 떠나는 것이 여행자의 숙명이라 믿고 있던 나였지만, 떠날 때 이렇게 아쉬운 마음이 드는 것은 처음이다.

  터미널로 가는 미니버스를 기다리며 그녀의 얼굴을 바라본다. 그녀에게 이메일 주소나 페이스북 주소를 알려줄까. 다른 사람들한테 주소를 알려 달라고 할까. 별 것 아닌데, 왜 이렇게 고민이 되는 걸까. 선뜻 뭔가를 알려주기도, 알려달라고 할 수가 없었다. 그녀의 얼굴에 담긴 표정의 의미를 도저히 읽을 수 없다. 정류장에 서 있는 우리 사이에는 아무런 말도 오가지 않았다. 그녀는 시선을 떨궜다. 그러는 사이 내가 타야 할 미니버스가 왔다.


  "여행 잘 해."

  어색한 미소. 내가 남긴 마지막 말이다. 우리가 인연이 된다면, 언젠가 또다시 만날 기회가 있겠지.


 그녀는 내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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