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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C Mar 31. 2016

내 인생의 명장면, 카파도키아 : 터키 괴레메

슬픈 운명을 짊어져야 했던 약자의 역사가 만들어 낸 유산 

여행은 인간을 겸손하게 만든다.
세상에서 인간이 차지하는 영역이 얼마나 작은 것인가를 깨닫게 해 준다.

- 프리드리히 프뢰벨

  이스탄불을 찾은 것은 이번이 세 번째다. 하지만 이 세 번의 방문이 무색할 정도로 나는 이스탄불과 터키에 대해 잘 몰랐다. 그동안 나는 이스탄불을 그리스나 동유럽(불가리아)으로 떠나기 위한 중간 기착지 정도로 여기고 있었기에 이스탄불을 꼼꼼히 살펴볼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 자세히 보지 않아도 굴곡진 역사 속에서 만들어진 이스탄불만의 매력이 넘쳐난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이 도시, 이스탄불을 천천히 둘러보겠다는 다짐은 여러 번 했지만 이스탄불은 항상 차순위였다.

  이번 이스탄불 방문의 목적도 과거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인도를 떠나 이스탄불에 도착한 나는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라는 보스포루스 해협을 건너 하이다르파샤 기차역(Haydarpaşa Gari)으로 갔고, 그곳에서 기차를 타고 남쪽으로 향했다. 남쪽에는 카파도키아(CAPPADOCCIA)가 있고 아다나(Anada)가 있었으며, 그 아래에 시리아(Syria)가 있었다. 또 한번 이렇게 이스탄불을 떠난다는 것이 아쉬웠지만, 어쨌든 다시 이스탄불로 돌아와야 한다는 것을 위안 삼았다.



   장소 : 터키 카파도키아 괴레메


  터키 카파도키아. 터키에서 만난 사람들, 여행을 하며 만난 사람들에게 '카파도키아'에 갈 것이라고 말했다. 그 말을 할 때마다 사람들은 Great, Wonderful, Gorgeous와 같은 단어를 써가며 카파도키아를 표현했으며 "꼭 가봐"라는 말을 하곤 했다. 그곳이 어떤 곳일까. 유명 맛집으로 알려진 곳에 줄이 길게 늘어서 있는 것을 보면 그곳에서 파는 음식을 한 번쯤 맛보고 싶은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극찬하는 여행지를 그냥 지나치기란 쉽지 않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꼭 한 번 가봐야 할 것 같다. 만약 그곳에 갔을 때 별 감흥이 없으면 어떤가. 감흥이 없다면 보통의 여행지에 온 것이고, 만약 만족스럽다면 최고인 것이다. 그것이 전부다.


  그리스에 들르기 위해서는 터키 여행 기간을 줄어야 했던 나는 터키 서부 에게해 연안의 이즈미르(Izmir)와 서부 내륙의 파묵칼레(Pamukkale), 동부 흑해 연안의 '트라브존(Trabzon)', 중부 내륙의 '카파도키아(Cappadocia)' 중에서 어디를 갈지 고민해야 했고, 고민 끝에 가장 우선순위로 고른 곳이 바로 '카파도키아'였다. 터키에 관한 책자들을 뒤적이며 어디를 갈지를 생각할 때, 어느 곳 하나도 뺄 수 없을 것 같았지만 시간과 동선을 고려했을 때 여행을 하는 데 있어 가장 이상적인 장소 될 만한 곳이 바로 '카파도키아'가 될 것 같았다. 물론, 길 위에서 만난 여행자들이 카파도키아를 두고 "최고"라고 말한 것도 한몫했다.



  기차를 타고 '콘야(Konya)'로 향한 나는 그곳에서 버스에 올라 카파도키아의 심장인 괴레메(Göreme)로 향했다. 버스로 3시간 거리. 매우 짧은 거리다. 버스는 깨끗하고 쾌적했으며 아스팔트 포장이 잘 된 도로는 시원하게 뻥뻥 뚫려 있었다. 깔끔하게 잘 정돈된 거리. 창 밖으로 펼쳐지는 풍경은 단조로웠지만 한편으로는 잔잔함이 느껴진다. 괴레메가 가까워질 수록 카파도키아에 대한 기대감도 부풀어 오른다. 그러면서 한편으론 인도에서 버스를 탈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인도에서 버스. 모래와 자갈로 된 비포장 길을 달렸던 기억. 앞서 가는 자동차가 만들어낸 뿌연 흙먼지가 버스 안으로 마구 들이치던 인도의 버스. 좌석의 쿠션이 다 빠져버린 탓에 엉덩이에 스프링의 자국이 선명하게 남았던 인도의 버스. 그에 비하면 터키의 버스는 3시간 만에 괴레메에 도착한다는 것이 아쉽게 느껴질 정도로 너무 편하다.



  버스는 카파도키아에 접어들었다. 하얗게 빛나는 기괴 암석들이 눈에 띈다. 돌덩어리들은 '여기가 카파도키아다'라고 말하고 있다. 바위의 속을 파내고, 그 안에 사람이 산다. 동굴집이다. 이 또한 슬픈 운명을 짊어져야 했던 약자(弱者)의 역사가 만들어 낸 것이지만 지금은 이 지역 사람들을 먹여 살리는 아주 훌륭한 유산이 되었다. 파란 하늘에 낮게 떠가는 구름. 투명한 햇살이 떨어지고 있는 찬란한 대지. 불규칙적으로 불끈불끈 솟아 있는 암석들. 이 모든 것이 조화를 이루어 나에게 감동을 주고 있다. 

  카파도키아에 내가 와 있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도 나는 기쁨을 맛볼 수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좋았다. 그저 카파도키아의 대지 위에 선 채로 땅의 기운이 바람이 되어 나를 스쳐가는 것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나는 벅찬 감동을 느낄 수 있었다.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 느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기쁠 수 있다는 것을.



  해가 뜰 무렵. 새벽의 동굴 숙소는 눅눅함과 서늘함으로 가득 차 있다. 아직 햇살이 대지를 붉게 물들이기 전이지만 괴레메는 분주하게 움직인다. 더러는 해가 뜰 무렵 열기구를 타고 하늘에 올라 대지를 바라볼 것이며, 또 누군가는 괴레메 뒷동산에 올라 지평선 너머에서 떠오르는 태양을 맞이하기 위해 움직일 것이다. 어둠을 밀어내며 밀려드는 붉은빛. 천천히, 아주 천천히 붉은빛이 대지로 적시고 종국엔 괴레메를 완전히 감싸 안는다. 그 순간, 파란 하늘에는 검은 점들이 송송 맺혀 있다. 태양과 함께 떠오른 열기구가 카파도키아의 아침을 장식하고 있는 것이다. 하늘에 걸린 열기구의 향연, 괴레메의 아침은 그렇게 시작된다.

  분주함이 사라지고 난 뒤에 찾아오는 카파도키아의 낮은 맑고 투명하다. 나는 괴레메를 벗어나 우치사르로 향했다. 물 병 하나와 카메라를 들고 우치사르에서 괴레메를 향해 걷는 것. 그것이 내가 해야 할 전부였다(카파도키아 투어, 'red tour/green tour'가 있지만 카파도키아에서는 걷고 싶었다). 태양 빛을 받아 빛나는 동굴 집. 바위와 동굴 집 사이에 자라고 있는 들꽃. 대지 저 멀리서부터 불어오는 향긋한 봄바람.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저 이 멋진 풍경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 셔터를 누르는 것뿐이다. 아무래도 좋다.

  어느덧 태양은 지평선 저 아래로 모습을 감추려 하고 있다. 괴레메는 조용하다. 엄숙함마저 느껴지는 곳으로 변한다. 햇살 아래에서 생기 발랄하던 모든 사물들이 어느새 엄숙한 표정으로 어둠을 맞이하고 있다. 여행자들은 또다시 마을 뒷산에 올랐다. 아침에 올랐던 것과는 또 다른 느낌의 괴레메가 눈 앞에 있다. 어둠이 스미는 카파도키아의 대지. 대지가 완전한 어둠에 잠기기 전, 언덕을 내려온다. 또 이렇게 하루가 지나간다는 것이 느껴지는 순간이다.



  저녁 식사는 역시 항아리 케밥이다. 동굴 숙소에서 만난 한국인 커플 여행자와 함께 항아리 케밥을 먹으며 지나온 길과 앞으로 나아갈 길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들은 호주에서 워킹홀리데이를 끝내고 여행을 하고 있는 중이라 했고 나도 유라시아 대륙을 돌고 난 뒤, 호주로 갈 것이라고 말했다. 어디로 갈 것이냐는 물음에 "퍼스(Perth)"라고 했다.

  "나도 퍼스에 있었는데, 정말 좋아요! 호주에서 여러 군데 있어 봤는데, 퍼스가 최고였던 것 같아요."
  "기대되네요. 다들 퍼스가 좋다고 해서 그리로 가보려고요."

  시시콜콜한 이야기가 이어졌다. 이것이 여행이고 여행자의 삶일까. 나와 그들은 괴레메에서 만났지만 우리의 다음 행선지는 반대 방향이다.

  "형, 누나 덕분에 즐거웠어요. 여행 잘해요."
  "LC, 너도 여행 잘해."   

  버스 정류장에서 그들을 떠나보내며 했던 말들이다. 여행자들의 마지막 말은 항상 같다. 


  여행 잘 해.

 가보지 않고서는 느낄 수 없다. 가 보지 않은 사람은 '상상만 해도 즐거워'라는 말의 의미를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세상에는 너무나도 잘 알려진, 소위 '유명 관광지'가 많이 있지만 모든 관광지가 그에 걸맞은 감동이나 즐거움 혹은 설렘을 주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큰 기대를 하지 않았던 곳에서 마주친 장면이 벅찬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경우가 있기도 하다. 그것이 여행의 즐거움 속에서 만나는 장면이라면 내 심장을 떨리게 할 가슴 뭉클한 감동이 샘솟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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