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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C Apr 05. 2016

아무도 거리의 악사에게 동전을 던지지 않는다 : 그리스

그녀의 따뜻한 손길이 내 손을 감쌌다.

음악은 세계 공통어이다.
(Music is the universal language)

- J. 윌슨

  만약 내 손에서 악기마저 사라져버렸더라면 더이상 길 위에 서 있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아테네 역에서 눈을 떴을 때 내게 남아 있던 젬베. 상실감과 비탄에 젖은 나는 젬베를 두드렸다. 다시 한 번, 음악이 나의 상실감을 치유해주는 도구가 되었던 것이다. 온 정신을 손 끝에 집중한 채 만들어낸 리듬. 아테네에서, 산토리니에서, 그리고 테살로니키에서 나는 희망과 즐거움을 위한 리듬을 만들었다. 사람들은 흥얼거렸고 더러는 내게 환호를 보냈다.



 장소 : 그리스 아테네.


  지금 내 앞에 놓여 있는 괴로움을 잠시나마 잊게 해 줄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은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아테네에 도착한 날 마주쳐야 했던 절망. 그리고 산토리니로 향하는 배에서 맞닥뜨려야 했던 난감함. 코스 섬에서의 하루. 내가 견뎌내야 했던 시간들 속에는 인도에서부터 들고 왔던 젬베가 자리하고 있었다. 젬베는 산토리니 이아 마을의 그리스 정교회 예배당 앞에서 둔탁한 울림을 만들어 내면서 내가 희망을 발견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작은 가방 하나 그리고 젬베. 나는 앞으로의 여정에 대한 희망을 가득 안고 아테네로 돌아왔다.


  아직 어둠이 채 물러가지도 않은 이른 시간. 산토리니를 출발한 배가 아테네의 피레우스 항구에 도착했다. 첫 운행을 기다리는 전철이 역에서 불을 밝히고 서 있다. 나는 텅 빈 전철에 앉아 전철이 종착지를 향해 출발하기를 기다렸다. 종착지와 종착지 사이 그 어딘가에서 나는 시간을 보내야 했다. 오늘 밤, 야간열차를 타고 그리스 북부의 테살로니키로 떠나는 시간이 올 때까지 나는 어떻게든 아테네에서의 하루를 마무리 지어야 했다.


※ 그리스 의회의사당에서 바라본 신타그마 광장(왼쪽)과 해가 질 무렵 에르모우 거리의 초입에서 악기를 연주하고 있는 거리의 악사들.

※ 모나스티라키 센터 근처의 광장(왼쪽)에서 나는 합주를 했다. 처음 젬배 연주를 시작한 곳은 파나기아 카프니카레아 교회 앞, 사진 속 여자가 앉아 있는 장소(오른쪽).


  태양이 도시의 꼭대기에 올랐을 때 나는 아테네의 중심부인 신타그마 광장에 있었다. 신타그마 광장에서부터 이어진 번화가 에르모우(Ermou) 거리를 따라가다 보면 그 끝에는 파나기아 카프니카레아 교회(Church of Panaghia Kapnikarea)가 있고 그 뒤로 가면 모나스티라키(Monastiraki)역으로 이어진다. 그곳에도 광장이 있다. 딱히 갈 곳이 없던 나는 그 주변을 배회했다. 거리 곳곳에서는 거리의 악사들이 음악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바이올린을 켜는 꼬마들. 기타를 연주하고 있는 젊은 악사. 트럼펫을 불고 있는 중년의 남자. 그리고 노래를 부르는 여인. 어린 꼬마에서부터 백발 노인까지. 시내 중심가 곳곳에는 소리의 향연이 펼쳐지고 있었고 나는 그들이 만들어내는 소리에 귀 기울이고 있었다.


 '나라고 저들처럼 연주하지 말란 법은 없지 않은가'

  한참동안 그들을 바라보고 있던 나는 광장 한편에 걸터앉아 젬베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둥-타다 딱다-딱다-. 둥둥-타다 딱다-딱다- 둥-뚜두 딱따.


  거리에는 현악기와 관악기들이 다양한 기교를 선보이며 아름다운 선율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에 비해 아프리카 태생의 이 타악기가 만들어내는 투박한 소리는 보잘것없어 보였다. 그렇지만 나는 그들의 선율 속에서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지점을 찾아가며 두드렸다. 가슴을 울리는 소리. 그것을 찾아 나섰다. 손끝으로 리듬을 만들어 내는데 온 정신을 집중했다. 단조로운 리듬을 만들어내는 타악기의 떨림은 강렬했고 그 둔탁함이 광장 전체로 울려 퍼졌다. 내가 만든 리듬에 어깨를 들썩이는 사람들이 보였다. 소리를 만들기 위한 손놀림이 점점 빨라진다. 흥이 올라왔다. 온 마음과 정신이 음악을 향해 있는 그 순간 나는 잠시나마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었고 아드레날린이 마구 솟구쳤다. 거리를 지나던 행인들은 어깨를 들썩이며 다가와 내 앞에 놓인 가방 위에 동전을 놓아 두기도 했고 더러는 환호성을 지르며 빙글빙글 춤을 췄다.  


  광장을 울리는 강렬한 떨림 때문이었을까. 광장 한편에서 노래를 부르던 사람이 내게 다가와 내 곁에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나는 판소리의 고수가 된 듯, 그의 노래에 맞춰 젬베를 두드렸다. 한 박자 한 박자. 긴 울림이 퍼져나가갔다. 바이올린을 켜던 꼬마들도 내 곁으로 다가왔고 우리는 합주를 하기 시작했다. 거리의 악사들이 모두 한 곳에 모여 제각기 자신들의 악기를 연주를 했지만 소리는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어떤 곡을 연주하자는 말 한 마디 없이 우리는 제각기 연주를 이어나갔다. 아무런 말없이 서로의 눈빛 만으로도 우리는 소리를 만들어 냈고 그것은 하나의 음악이 되어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 순간, 아테네 거리에서 음악을 만들어내던 거리의 악사들과 내가 하나가 되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온갖 떨림의 조화는 절정으로 치달았다. 연주는 클라이맥스에 이르렀다.


  둥. 두두둥두- 땅.땅. 따라라라라-


  마지막 떨림이 있은 후 모두가 동작을 멈췄다. 잠깐 동안의 적막 사이로 거친 숨소리가 잦아들었다.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미소지었다. Good! 우리는 서로에게 최고였다며 말하며 하이파이브를 했다. 어느새 우리 주변에 모여있던 사람들은 박수를 보내며 환호했다. 브라보 브라보!

  사람들이 흩어지기 시작할 때 광장에서 손수레를 끌며 장사를 하고 있던 주름이 자글자글한 백발의 할머니가 내게 다가왔다. 그녀는 나를 지그시 바라보더니 내 손을 잡았다. 그녀의 따뜻한 손길이 내 손을 감쌌다. 그러고는 내 손바닥 위에 온기를 품은 동전을 쥐어 주었다. 그 순간 나는 무한의 행복을 느낄 수 있었다. 돈 때문이 아니었다. 내가 음악으로 나의 두드림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순간이었다. 그것이 나를 무한의 행복으로 이끌었던 것이다.


  내가 광장에서의 연주를 끝냈을 때 내 가방 위에는 그날을 넉넉히 보낼 수 있을 만큼의 동전이 쌓였다. 나는 거리의 악사들과 작별 인사를 나누고 인파 속으로 걸어들어갔다. 감미롭게 울려퍼지는 바이올린의 선율. 그들은 다시금 거리에 활력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내가 그들과 함께 연주를 했다는 것이 마치 환상이었던 것 처럼 느껴졌다. 거리의 악사. 아테네의 절망은 내게 또 한번의 희망과 기쁨을 주었던 것이다.


※ 젬배와 음악은 많은 곳에서 내가 사람들의 관심과 호의를 받을 수 있도록 해 주었고, 친구를 만나 함께 연주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캐나다에서 온 폴과 나는 테살로니키의 광장에서 함께 연주했다. 그는 기타를 나는 젬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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