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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C Apr 09. 2016

박타푸르까지 갔던 사람 : 네팔 박타푸르

조금 늦게 들려주는 이야기

작은 물방울이 호수에 떨어져 만든 출렁거림이
 호수 전체를 흔들리게 한다

  어쩌면 내 여행은 "첫 단추가 중요하다"는 말의 의미를 잘 보여주고 있었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지금까지의 모든 일들이 우연히 일어난 사건들이라고 할 수 있지만 지금의 내가 과거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결코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어쩌면 조금 늦게 들려주는 이야기라고 하겠다.



0 장소 : 네팔 카트만두/박타푸르 - 인도 바라나시


  "오빠, 카트만두에 같이 가요. 같이 가도 되죠?"

  호텔 로비에 앉아 또 한 번의 헤어짐을 준비하고 있던 나에게 화연이 한 말이다. 그녀는 웃으며 '같이 가자'고 했다. 잠깐 동안의 어리둥절함. 안 될 이유는 없었다. 오히려 '다행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룸비니에서 보냈던 3일. 어미를 따르는 새끼오리처럼 나를 따라다니며 웃음 짓던 화연이었다. 어둠이 찾아오면 서로 다른 버스를 타고 각자의 목적지를 향해 나아갈 줄 알았지만 화연과 나는 같은 버스를 타게 되었다.


  바라나시행 기차에서 2박 3일을 함께 보낸 나오야. 그는 인도와 네팔의 국경 지역에 위치한 도시 소나울리를 향해 갔다. 바라나시에 와 본적이 있다던 그는 내게 여행자들 사이에서 인기있는 숙소 두 곳을 추천해 주었다. 그 중 한 곳, 바바 게스트하우스. 그곳에서 5명의 한국 사람들을 만났다.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는 바라나시의 한낮. 숙소 1층에 마련된 식당 겸 휴게소에서 여행책을 뒤적이던 나는 다른 테이블에 앉아 이야기를 하고 있던 그들의 말을 엿듣게 되었다. 그들은 바라나시를 떠나 소나울리로 간 다음 네팔의 포카라로 갈 것이라 했다. 갠지스 강이 흐르는 바라나시는 힌두교도들의 성지이기도 했지만 네팔로 향하는 이들의 거점 도시의 역할을 하고 있기도 했다. 많은 이들이 바라나시에서 소나울리를 거쳐 네팔로 향했던 것이다.


  네팔. 나는 카트만두에 가야했다. 파키스탄 여행을 계획하고 있던 나는 비자가 필요했고 카트만두의 파키스탄 대사관에서 비자를 발급받는 것이 가장 보편적인 방법으로 알려져 있었다. 네팔에 가야 한다면 저들과 함께 가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 될 것 같았다. 나는 사람들에게 함께 가도 되겠냐고 물었고 그들과 함께 국경을 넘기로 했다. 안나푸르나 트래킹을 하기 위해 네팔의 서쪽 포카라로 간다는 그들. 나는 그들과 목적지가 달랐지만 개의치 않았다. 국경을 넘는 여정을 함께 한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서로에게 도움 되는 일이다. 함께 간다는 것은 심리적인 안정감을 준다. 어차피 가야 한다면 함께 가는 것이 좋다.


※ 소나울리의 인도 국경 사무소(왼쪽). 우리가 국경에 도착했을 때 잠시 국경이 폐쇄되어 발길이 묶였다. 도장 찍는 일만 아니라면 걸어서 아무나 국경을 넘어갈 수 있다(오른쪽).


  나를 포함해서 총 6명. 우리는 바라나시에서 야간열차를 타고 북쪽의 고락푸르를 거쳐 국경 도시인 소나울리로 갔고 인도-네팔의 국경을 넘었다. 우리는 네팔 쪽 국경 마을 바이와라에서 릭샤를 타고 룸비니로 향했다. 속도가 느린 여정. 우리는 천천히 움직였다. 룸비니는 불교 성지 중 하나로 불교의 창시자 석가모니가 태어난 곳으로 유명했지만 인도와 네팔을 오가는 여행자들 사이에서는 여행의 피로를 풀 수 있는 최적의 장소로 여겨지고 있는 곳이기도 했다. 많은 여행자들이 무료로 숙식이 제공되는 룸비니의 한국 사찰을 찾았고 우리 역시 그곳에서 휴식을 취했다.

  나무로 둘러 싸인 룸비니. 그곳에서 들려오는 것이라곤 새들의 지저귐과 바람에 나무들이 부대끼는 소리뿐이었다. 그곳은 인도, 네팔의 도시에서 흔히 겪을 수 있는 혼잡함과는 완전히 차단된 곳이었다. 이틀 밤이 지난 뒤, 룸비니까지 함께 온 전도형과 준용이 형이 룸비니를 먼저 떠났고 이튿날 유경 누나와 어머님 그리고 나와 화연이 룸비니를 떠나 바이와라로 나왔다. 포카라와 카트만두. 각자의 목적지로 떠나기 위함이었다.


  햇살이 떨어지는 먼지 자욱한 거리. 비포장 흙길 양쪽으로 여러 가지 먹거리를 파는 가판대가 늘어서있고 그 사이로 많은 사람들이 오간다. 투명한 햇살이 비치던 거리에 가로등이 하나 둘 불을 밝힌다. 떠날 시간이 되었다. 여행자들이 버스 터미널로 모여들었고 유경 누나와 어머님 그리고 나와 화연은 버스에 올랐다. 두 대의 버스는 나란히 마을을 빠져나와 두 갈래의 서로 다른 길을 향했다. 카트만두까지는 10시간. 버스는 밤새 산길을 달렸고 해가 뜰 무렵 카트만두에 도착했다.

※ 룸비니에는 세계 각국의 사찰들이 있는데 각 나라마다 사찰의 형태가 다르다는 것이 하나의 볼거리이다. 왼쪽은 독일 사찰 오른쪽은 태국의 사찰.

※ 한국 사찰의 여행자 숙소(왼쪽). 한국 사찰의 중앙 대웅전은 황룡사 9층 목탑을 모델로 지어지고 있었다. 해질녘의 룸비니에 달이 떠올랐다(오른쪽)


  화연도 파키스탄 비자가 필요하다고 했다. 비자를 발급받는 데는 3일이 걸렸다. 한국 대사관에서 추천서를 받는 데 하루. 파키스탄 대사관에서 비자 발급 신청을 하고 인터뷰를 하는 데 하루. 그리고 그 다음날 비자가 발급되었다. 비자가 발급되기까지 우리는 카트만두를 함께 돌아다녔다. 여행자 거리 '타멜'. 숙소가 위치한 타멜 거리는 항상 시끌벅적했다. 거리에 가득 찬 생기발랄함. 레스토랑과 라이브 카페, 바(Bar)에는 여행자들로 넘쳐났다. 사람들은 밤늦게까지 노래를 불렀고 술에 취해 비틀거렸다.

  우리는 낮 시간 동안 주로 더르바르 광장의 사원에 걸터앉아 시간을 보냈고 밤에는 여행자 거리를 배회했다. 더르바르 광장에는 많은 관광객들이 오갔으며 여행자 거리에는 음악이 끊이질 않았다. 음악은 우리의 기분을 들뜨게 했고 타멜에서는 누구나 다 친구가 될 수 있었다. 술을 마시고 있다가도 처음 보는 외국인이 들어오면 반갑게 맞이하며 어디서 왔냐고 물었고 술병을 부딪히며 "치어스"를 외쳤다. 서로의 이름을 말해주며 술을 들이켰지만 술집을 나설 때 그의 이름을 기억해내지는 못했다. 단지 우리는 모두를 "프랜드"라고 불렀을 뿐. 카트만두에서 내가 유일하게 이름을 불러줄 수 있는 사람은 화연뿐이었다.


※ 카트만두의 더르바르 광장.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네팔의 관광 명소이다.

※ 몽키 템플에서 초를 팔고 있는 여인들.


  화연은 내게 '박타푸르'에 가자고 했다. 카트만두에서 동쪽으로 10km가 채 안 되는 거리에 있는 작은 도시 박타푸르. 오늘은 그곳의 더르바르 광장에서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것이었다. 대도시와 작은 도시의 차이였을까. 박타푸르는 카트만두와 완전히 달랐다. 두 도시 모두 시내 중심가에 더르바르 광장이 있고 사람들이 광장에 모여 있었지만 그곳에서 느껴지는 분위기는 완전히 달랐다. 카트만두의 그것에는 비둘기들이 무리 지어 돌아다니고 있고 많은 관광객 무리가 우르르 몰려다녔으며 주변에는 장사꾼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하지만 박타푸르의 그것은 온전히 박타푸르 사람들의 것이었다. 아이들은 웃으며 이방인을 향해 달려왔다. 사진을 찍어 달라고 조르돈 아이들은 카메라의 작은 화면에 나온 자신의 모습을 자세히 들여다본다. 한 아이는 좀 더 멋진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는지 코끼리 석상 위에 올라탔다. 때 묻지 않은 아이들.


  "여기에 이런 곳이 있는 줄 알았다면 매일 여기로 왔을 텐데"

  박타푸르의 더르바르 광장에서 우리는 같은 말을 했다. 그러고는 사원의 계단에서 사람들을 바라보며 내일과 그 이후의 여행에 대해 이야기했다.


  "우와, 오빠 그리스도 갈 거야? 나도 그리스 가고 싶다"

  아직 확실히 정해진 것이 아니라고 했지만 화연은 내가 그리스에 간다고 확신하는 모양이다. 나는 그리스에 대해 안 좋은 추억이 많다며 어쩔 수 없이 북부 지방을 거쳐가야 한다고 했다. 그런 그녀는 산토리니에 대해 이야기했다. 포카리스웨트와 하얀 벽과 파란색 지붕을 가진 집들. 화연의 이야기를 들으니 마음이 동했다. 그 때, 산토리니에 가볼까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아직 한참이나 남았는데 뭘. 당장 내일 일도 모르는데 나중에 생각해 봐야지."

  나는 그렇게 이야기를 마무리지었다. 내일이면 화연은 포카라로 갈 것이고 나는 다시 인도로 돌아간다. 나에게 있어 네팔은 오늘이 마지막이 될 것었다.


※ 박타푸르.

※ 박타푸르 더르바르 광장

※ 박타푸르의 아이들. 더르바르 광장은 아이들의 놀이터였다.

※ 더르바르 광장의 아이들(왼쪽). 해질녘 집으로 돌아가는 아빠(중간). 점심 식사를 만들고 있는 여인(오른쪽)


  카트만두의 버스 터미널. 화연이 먼저 버스에 올랐다. 버스 입구의 계단에 올라선 화연의 이마에 나의 흔적을 남겼다.

 "잘 다녀와."

  우리는 2주 뒤에 바라나시에서 만나기로 했다. 화연은 포카라에서 트래킹을 하고 바라나시로 돌아갈 것이고 나는 인도 동쪽의 캘커타에 다녀올 생각이었다.     


  나는 예정보다 일찍 바라나시로 돌아왔다. 캘커타의 마더테레사하우스에서 일주일간 봉사 활동을 하려 했지만 식중독에 걸리는 바람에 병원 신세를 지면서 병간호를 받아야 했고 몸이 회복된 후 바라나시로 돌아온 것이었다. 카트만두를 떠난 지 10일 만이었다.

  바라나시로 돌아왔을 때 길에서 화연과 마주쳤다. 그녀는 나보다 빨리 바라나시로 온 것이었다. 화연은 트래킹을 시작하자마자 고산병에 시달리면서 3일을 앓다가 트래킹을 포기하고 바라나시로 돌아왔다고 했다. 카트만두를 떠난 지 일주일도 안 되어 돌아온 것이었다.     

  "그랬구나. 밥은 먹었어? 나 지금 밥 먹으러 가는 길인데 같이 갈래?"
  "나중에 먹자, 오빠."

  다른 일행과 약속이 있다고 했다. 그렇게 말하는 화연의 미간에 생겨난 주름. 포카라로 향하는 버스에 올라 바라나시에서 보자고 하며 웃던 화연의 모습이 떠올랐다.


  화연은 포카라에서 만난 사람들과 함께 바라나시로 왔고 그들과 함께 다녔다. 다른 게스트하우스에 머물던 나는 숙소를 옮겨왔지만 화연과 나 사이는 왠지모를 서먹함이 자리하고 있었다. 숙소에서 새롭게 만난 사람들과 함께 어울렸지만 나 혼자 둥둥 떠서 겉도는 느낌이 들었다. 물과 기름 같았다고나 할까. 그들과 나를 연결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화연이었지만 그녀는 나를 이끌어주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그 무리에 끼는 것을 싫어하는 눈치였다.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 시간 동안 나는 바라나시의 뮤직 스쿨을 다니며 젬배 다루는 법을 배웠다. 한 낮의 젬배 강습이 끝나고 숙소로 돌아올 때면 항상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숙소에 모인 여행자들은 소소한 이야깃거리를 나누며 웃고 있었다. 나도 그들 틈에 끼어 이야기를 들으며 함께 웃었지만 어색함은 지워지지 않았다.


  가장 믿었던 사람이 나를 외면하기 시작했다는 것으로부터 비롯된 상실감. 나는 상실감과 과거의 그리움 속에서 괴로워했다. 나와 그녀 사이의 서먹함. 왜 이렇게 되어버렸는지 알지도 못한 채 속앓이를 해야 했다. 화연은 우리가 변하지 않았다고 했다. 예전처럼 함께 프렌치토스트를 먹으러 갔고 라씨를 마셨다. 거기에 몇 사람이 더 있었고 단지 나 혼자 있는 시간이 길어진 것뿐이라고 했다. 화연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은 내게 먼저 말을 걸어주지 않았다.

  바라나시 생활에서 유일한 즐거움은 젬배를 두드리는 것이었다. 사람들과의 관계가 서먹해질수록 젬배에 대한 나의 집착은 커져갔다. 젬배를 두드릴 때만큼은 온갖 잡념들이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젬배의 떨림이 내 가슴을 울리는 그 순간 나는 평온함을 느꼈다. 소리는 내 영혼을 보듬어주었고 괴로워하는 나를 치유해주는 유일한 존재였다.


※ 다시 돌아온 바라나시. 이른 아침 숙소의 옥상에 올라 갠지스 강 위로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본다. 옥상에는 늘 원숭이들이 놀고 있다.

※ 젬배 두드리는 순간만큼은 나는 자유로웠다. 내가 바라나시를 떠날 때 배웅을 나왔던 히로키(오른쪽 사진 왼편)


  바라나시로 돌아온지 2주가 지났다. 젬베 강습도 끝을 맺었다. 스승은 모든걸 가르쳐주었다 했고 나를 위해 젬배 하나를 만들어 주었다. 나는 바라나시를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젬배 수업이 끝나는 날 뉴델리로 향하는 2등석 기차표를 끊었고 화연에게 이틀 뒤에 뉴델리로 간다고 말했다. 화연은 며칠 더 이곳에 있을 거라고, 이곳 사람들과 함께 뉴델리로 갈 것이라 했다. 숙소에 있던 한국인들과 일본인 친구들에게도 이제 다시 여행을 시작한다고 말했다. 바라나시에서의 생활은 여행이 아닌 하나의 작은 삶이었다.


  바라나시를 떠나는 날. 그날도 숙소에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나는 화연과 그곳에서 만났던 사람들에게 여행을 잘 하라는 말을 남기고 숙소를 나섰다. 좁은 골목을 지나 릭샤를 타기 위한 큰 길가에 닿았을 때, 내 곁에 있던 사람은 일본인 야마와 히로키 둘 뿐이었다. 그들과 작별 인사를 나누고 역으로 향했다.

  "즐거운 여행 하세요."


  만남은 언젠가는 헤어짐을 불러오기 마련이다. 헤어진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미련을 버리고 새롭게 그리고 즐겁게 시작해야 한다며 내 마음을 다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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