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과보다 신뢰가 먼저 무너지는 순간들
연초라서 그런지 그동안 관계가 좋았던 해외 바이어들이 사업 확대를 위해 헛똑똑이 회사에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방문 일정기획부터 미팅 컨텐츠 구성, 기타 준비사항까지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헛똑똑이의 몫이었습니다. 발표자료는 수차례 점검하고 수정했으며, 유관부서에 내용을 사전공유 하였습니다. 암묵적이지만 원활한 일정 소화를 위해 예상 질문과 그에 대한 답변까지 미리 준비한 채 미팅을 참석을 했습니다. 하지만 미팅 당일, 헛똑똑이는 쉽게 이해되지 않는 몇 가지 장면을 마주하게 됩니다. 그 광경들이 머릿속에 계속 남았고, 이를 그냥 넘기기보다는 바이어 영접 시 주의사항을 한번 정리해 보기로 했습니다.
아래 내용은 개인의 평가가 아니라, 실제 미팅 현장에서 반복적으로 관찰된 장면들입니다.
1. 발표 전 자료 미숙지
바이어는 제한된 시간을 최대한 밀도 있게 활용하려고 방문합니다. 그럼에도 자료에 이미 명시된 내용을 다시 확인하게 하거나, 자료의 기본 방향성부터 다시 설명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한다면 바이어는 물론, 내부 구성원 모두가 불필요한 에너지를 소모하게 됩니다.
발표 당일은 모든 조건이 맞아도 성사가 쉽지 않은 자리입니다. 그럴수록 ‘자료 설명’이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간 논의가 이뤄져야 합니다.
2. 펜딩사유에 대한 이해 부족
바이어가 직접 방문하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미결되었던 사안을 정리하고, 가능하다면 빠르게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함입니다. 따라서 사전에 왜 펜딩이 되었는지 기술, 비용, 일정 중 무엇이 문제인지 최소한의 구조적 이해는 필요합니다. 이런 맥락 없이 “Just Do It”은 서로에게 신뢰를 쌓는 방식이 되기 어렵습니다. 조건과 합의가 생략된 “Just Do It”은 집중해야 할 구심점을 흐리고, 결과적으로 에너지를 분산시킵니다.
3. 진행자와 발표자의 말을 끊는 습관
미팅을 기획한 진행자는 제한된 시간 안에서 논의를 효율적으로 이끌기 위해 전체 흐름을 관리합니다. 그럼에도 진행자의 말을 끊거나, 발표자의 설명 중간에 덧붙이는 모습은 회의의 흐름을 깨고 예절이 없어 보이기 쉽습니다. 물론 보완 설명이 논의를 한 단계 진전시킨다면 의미가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은”내가 이건 잘 아는데……“ 로 시작해 지식 과시에서 그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바이어의 질문은 대답을 재촉하는 말이 아니라 판단을 위한 맥락일 때가 많습니다. 끝까지 듣는 태도 자체가 신뢰입니다.
최근에는 바이어나 고객 면전에서 즉석으로 GPT에 질문을 던지고 그 답을 그대로 읽어 내려가는 장면이 목격됩니다. 적극적인 태도 자체는 나무랄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맥락에 대한 이해 없이, 얕은 지식을 근거로 바이어니 고객보다 더 많이 아는 것처럼 말하는 모습은 쉽게 신뢰를 얻기 어렵습니다. 바이어 앞에서의 질문은‘얼마나 빨리 답을 찾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알고 있고, 무엇을 모르는지를 스스로 인지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자리입니다.
4. 협업부서에 대한 일방적인 업무지시
헛똑똑이가 생각하는 해외영업은 해외영업부서만의 일이 아닙니다. 전 부서가 함께하는 협주곡에 가깝습니다. 그렇기에 각 파트가 잘 연주될 수 있도록 조율하고 소통하는 역할이 중요합니다. 그럼에도 스스로를 마에스트로로 착각한 채 타 부서에 일방적인 업무 지시나 지적을 하는 장면이 종종 보입니다. 직급이 높아서 가능한 행동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그들 역시 각자의 책임과 판단을 가진 다른 ‘연주자’이자 ‘마에스트로’입니다.
“왜 이렇게 했어요? “, “이렇게 진행되면 안 됩니다!”라는 질문보다, 왜 그렇게 진행될 수밖에 없는지를 먼저 이해하는 태도가 오히려 더 생산적인 질문입니다.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옛말이 있습니다. 일이 바쁘고 급할수록 기초를 차근차근 밟는 것이 결과적으로 더 빠른 길이 됩니다. 조급함은 실수를 낳고, 그 실수는 다시 시간과 에너지를 소모시킵니다. 기초가 탄탄하지 않으면 사상누각이라는 말을 자주 하면서도, 정작 기초인 예절과 태도는 놓치고 있지는 않은지, 한 번쯤 돌아볼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