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오년을 맞이하는 법

액땜으로 한 해를 시작하다.

by 임진

지난주 입춘을 기점으로 본격적인 2026년 병오년이 시작되었다. 병화, 오화. 한 가지만 있어도 강력한 화기운을 뿜는데 기둥으로 들어오니 그 위력을 더 세질 터. 그래서 주변에 단단히 일러두었다. 2026년은 심상치 않은 해가 될 거라고. 여느 때 보다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한다고.


그러나 잊고 있었다. 영화에서든 소설에서든 항상 이렇게 입을 놀리는 사람이 제일 먼저 그 위력을 실감하게 된다는 것을. 정확히 입춘이 되는 날 심각한 인후통과 함께 감기가 찾아왔다. 그리고 이번 주까지도 맥을 추리지 못했다. 제 꾀에 제가 넘어간 격이다.


하지만 억울한 면도 있다. 다른 이들을 위해 일러두느라 정작 나는 준비가 부족했나 싶은 것이다. 그것도 아니면 아주 강력한 기운이 들어오는 탓에 내가 먼저 무릎을 꿇은 것일 수도.


원래 감기를 잘 알지 않은 탓인데 한 번 앓게 되면 심하게 앓은 탓인지 목 통증이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거기에다 콧물에 기침은 세트였다. 약을 먹고 쉬는 게 가장 나은 처방이겠지만 K-직장인으로서는 엄두가 나지 않았다. 기침을 콜록콜록 해대며 어필해 보아도 누구 하나 들어가서 쉬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열이 나지 않는 건 불행 중 다행이었다.


증상이 오자마자 바로 약을 먹은 탓에 인후통도 콧물도 점차 나아졌지만 한 번 고꾸라진 컨디션은 쉽게 회복되지 않았다. 자연스레 몸도 마음도 약해졌다.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몸이 아픈데도 이 놈의 회사를 다니냐고 부정적인 목소리가 스멀스멀 기어 나왔다. 안 그래도 심각하게 이직을 고민하고 있는 탓에 모든 것이 다 지금을 가리키고 있었다. 기필코 지금이어야 했다. 어라 타이밍이 좋게 경쟁사에서 내 이력서를 봤다는 알람도 왔다.


그렇게 생각하니 안 그래도 하기 싫은 출근이 더 하기 싫어졌다. 해가 뜨기 전에 나와 약해질 대로 약해진 몸을 이끌고 가는 한 걸음 한 걸음이 고역처럼 느껴졌다. 입맛도 없었다. 어린 시절부터 나에게 입맛이 없다는 것은 아주 크나 큰 문제였다. 바로 지금이 그런 상태였다.


점심때 엄마와 통화를 하니 엄마가 일단 밥부터 먹으라 했다. 나는 그게 아니라고 했다. 밥맛이 없는데 어떻게 밥을 먹느냐고. 회사에 이러이러한 문제가 있고 고질적인 문제이니 나는 다른 곳으로 가야겠다고 선언했다. 엄마는 그런 것은 잘 모르고 일단 밥부터 먹으라 했다. 이제는 나이가 들어버린 엄마와 그렇게 실랑이를 했다. 하도 말을 하는 통에 어쩔 수 없이 뭔가를 먹었는데 좀 괜찮아진 듯했다. 거기다 커피도 먹으라는 엄마의 말에 감기약을 먹느라 안 먹었던 커피를 마시니 좀 살아난 듯했다. 자식이 이렇게 컸어도 의사는 아니어도 엄마는 나의 상태를 잘 알았던 것이다.


이직도 좋고 너 하고 싶은 거 하는 것도 다 좋은데 엄마는 무조건 밥은 먹으라고 했다. 그래야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해 보니 입춘이 시작된 지 아직 채 일주일도 지나지 않았다. 그 사이에 나는 이미 한 해를 다 산거처럼 판단을 내리고 혼자 괴로워했다. 그럴 일이 아니었는데.


일단 몸을 추스르고 계획을 세우기로 했다. 힘들게 맞은 병오년인 만큼 아니 이제 진짜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만큼 제대로 뭔가를 해보려고 한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축 늘어지기에는 이제 겨우 병오년의 막이 올랐으니, 출발선에 이제 겨우 한 걸음 뗀 셈이니 남들보다 늦춰졌다고 포기하는 것도, 이 해를 다 버리는 것도 말도 안 되는 것이다.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또 이렇게 힘들게 맞이한 것이 액땜일지도. 그나저나 액땜이든 아니든 어떤 위기에서도 결국 나를 구해내는 사람은 언제나 엄마다. 엄마가 진짜 나의 태양임을 또 한 번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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