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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나무 Oct 02. 2023

달빛과 같은 사람들  

영화 '1947 보스턴'

그런 친구가 있었다. 친구들이 모일 때 늘 우산을 챙겨 와 갑작스럽게 비가 오면 우리를 비로부터 안전하게 지켜주고, 약속을 하면 꼭 먼저 나와서 늦게 오는 친구들을 챙겨주는 친구. 대놓고 나서지는 않지만 늘 우리 무리가 잘 나아갈 수 있도록 조정자 역할을 하는 친구. 


그러나 그 친구는 자신은 너무나 평범해 개성이 있는 친구들이 부럽다고 말했다. 공부를 잘하거나 친구들을 웃기거나 독특한 매력이 있거나 하는 친구들에 비해 자신은 너무 평범하다고 늘 말했었다. 


영화 '1947 보스턴'은 시대의 영웅이지만 식민지 시절 일장기를 달고 뛰어야 했던 마라토너 손기정 선수가 해방 이후 개최된 첫 국제 마라톤 대회에서 서윤복 선수의 감독을 맡으면서 벌어지는 일들을 담았다. 이제 막 해방되어 제대로 된 나라로도 인정받지 못하고 미군정에 의해 통치되는 시대인터라 돈도, 먹을 것도 모두 부족했던 상황에서 불가능함을 넘어 국제 마라톤 대회에 출전하는 과정들을 흥미롭게 잘 포착했다. 


그러나 영화를 보는 내내 나는 손기정 감독이나 서윤복 선수보다 남승룡 코치가 눈에 들어왔다. 현역 선수 시절에는 늘 손기정 선수의 등을 볼 수밖에 없었고, 국제 마라톤 대회에 나가는 조건이 자신의 감독 자리를 손기정 감독에게 넘겨주어야 가능하다는 말에도 선뜻 자신은 코치이자 선수를 자처하며 내어준다. 


우여곡절 끝에 대표팀에 합류한 고집이 센 두 영웅들은 연습하는 과정에서도 기싸움 아닌 기싸움을 하는데 남 코치는 그 간극을 메어주고 자신이 가진 것들을 기꺼이 내어 주며, 주인공들을 포함한 다른 이들도 잘 토닥인다. 


영화 속 남승룡 코치를 보면서 그 친구가 생각이 났다. 누군가는 손기정 감독, 서윤복 코치를 보면서 감동의 눈물을 흘렸겠지만(물론 나도 감동스러웠다) 어쩐지 나는 당시 고령의 나이에도 코치이자 선수로 출전해 서 선수의 페이스메이커 역할을 하면서도 12등을 기록한 남승룡 선수를 응원했다. 그것이야말로 아무나 할 수 없는 그만이 가진 재능임을 느꼈기 때문이다. 


자신보다 더 뛰어난 재능을 가진 사람들을 질투하지 않고 인정하며 자신이 할 수 있는 역할이 무엇인지 알고 묵묵히 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누구나 자신이 더 화려하고 빛나는 자리에 서기를 원하지 않은가. 


어릴 때는 잘 몰랐지만 사회에 나와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보고 난 후로는 그 친구가 가진 성실이라는 재능, 화려하게 빛나지 않지만 은은하게 비춰주는 재능은 누구도 쉬이 가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인지 이 영화를 보면서 두 영웅이 아닌 한쪽에 물러서 있는 남승룡 코치에게 눈길이 간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때 내가 이 사실을 좀 더 깨달았다면 그 친구에게 반드시 말해주었을 것이다. 

'네가 가진 재능이야말로 세상을 지탱하고 없어서는 안 될 그런 귀한 재능이라고'  


대부분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사람들이 부럽다고들 한다. 그들은 태양처럼 돋보이고 화려함을 자랑한다. 보기만 해도 강렬하다. 그러나 나는 묵묵히 지지대 역할을 하는 달빛 같은 사람들의 따사로움 덕분에 세상은 더욱 잘 돌아갈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진짜 숨은 영웅들은 그런 사람들이 아닐까. 바로 남승룡 코치나 나의 친구 같은 사람들. 


그러고 보니 영화를 본 날이 마침 추석이었다. 밤하늘을 올려다보니 추석에 뜬 보름달이 유난히도 밝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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