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예비 로스쿨생을 위한 영화 리스트

로스쿨을 앞두고, 영화마저 법 관련된 것들만 보게 되었다.

by 리짓

나는 한 번 관심이 생기면, 비슷한 주제를 외골수적으로 계속 따라가며 파고드는 편이다.

그래서 미국 로스쿨 입학을 앞둔 지금, 책은 물론 영화와 팟캐스트까지 자연스럽게 법과 관련 콘텐츠로 채워지고 있다.


그동안 읽은 책들은 브런치에 종종 기록해 왔는데, 이번에는 조금 방향을 바꿔, 그동안 본 영화들과 앞으로 보고 싶은 작품들을 정리해보려 한다. 나처럼 로스쿨 입학을 앞두고 시간을 보내며 어떤 영화를 볼지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이 글이 하나의 참고가 되었으면 한다.




<Juror #2: 배심원 #2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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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기대 없이 봤지만, 생각보다 많은 질문을 남긴 영화였다.

약간의 스포를 하면, 배심원으로 참여한 주인공은 재판을 지켜보는 과정에서, 자신이 사건의 가해자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가해자이면서 동시에 배심원이 된 그는, 자신의 정체를 숨긴 채 판결의 흐름에 영향을 미친다. 죄책감 속에서도 자신의 삶을 지키기 위해 선택을 이어간다.

배심원 제도에 대해 잘 알지 못한 상태에서 본 영화였는데, 결말이 던지는 정의에 대한 질문만큼이나 흥미로웠던 것은 그 과정 자체였다. 배심원 선정 과정과, 배심원들 사이의 토론, 그리고 사건 현장을 직접 방문해 판단을 보완해가는 일련의 절차가, 12명의 배심원의 판단이 하나의 평결로 형성되는 과정을 구체적으로 보여주었다.




<Marriage Story: 결혼 이야기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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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는 이혼이라는 개인적인 관계가 법의 영역으로 들어오면서 어떻게 변하는지를 보여준다.

서로의 가장 사적인 이야기와 비밀들이 변호사의 손을 거치며 주장과 전략이 된다. 감정은 더 이상 감정으로 남지 않고, 설득을 위한 도구로 바뀐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건 조정(mediation) 장면이었다. 치열하게 맞서던 변호사들은 쉬는 시간이 되자 서로 웃으며 농담을 주고받는다. 동료 변호사인 둘은 샌드위치를 먹으며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간다.

반면, 바로 옆에 앉아 있는 부부는 웃지도, 먹지도 못한다. 그들에게는 이 모든 과정이 여전히 자신의 삶이기 때문이다. 당사자에게는 삶의 문제지만, 변호사에게는 하나의 사건일 뿐이다. 그 간극이 이 장면을 유난히 불편하게 만들었다.

이 영화를 보면서, 법이 문제를 해결하는 동시에 관계를 더 멀어지게 만들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때는 가족 사건을 다루는 것도 의미 있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이 영화를 통해 그 일이 얼마나 감정적으로 소모적인지 조금은 실감하게 되었다.




<On the Basis of Sex: 세상을 바꾼 변호인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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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 제목인 <세상을 바꾼 변호인>은 다소 아쉽다. 왜냐하면 On the basis of Sex는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Ruth Bader Ginsburg)가 다뤘던 사건의 핵심 문구일 뿐만 아니라, 그녀가 삶 전반에 걸쳐 맞서온 하나의 기준이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긴즈버그는 '성별을 기준으로 한 법' 자체를 문제 삼기 시작한다. 한 남성이 간병을 이유로 세금 공제를 받지 못한 사건이었지만, 그녀는 이를 특정 개인의 문제가 아닌, 성별에 기반한 구조적인 차별로 읽어낸다. 그 과정에서 여성에게 가해지던 법적 제약에 하나씩 맞서게 된다.

이때의 'on the basis of sex'는 단순한 법적 쟁점을 넘어, 그녀 자신의 경험과도 맞닿아 있다. 최우수 성적으로 졸업하고도 직장을 구하지 못하고, 네트워킹 자리에서는 학생이 아닌 '누군가의 아내'로 오해받으며,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녀는 멈추지 않는다. 암 투병 중인 남편을 대신해 그의 수업을 듣고 자신의 학업까지 병행하며, 아이까지 돌보며 로스쿨을 다닌다. 성차별로 인해 학계에 머물러야 했던 시기를 지나, 결국 이 사건을 통해 법정에서 직접 변론에 나선다.

나에게 단순한 문화적 아이콘이었던 그녀의 삶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이해하게 만든 영화였다.




<Erin Brockovich: 에린 브로코비치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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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

에린 브로코비치는 변호사가 아니다. 그럼에도 사건을 사실상 이끄는 중심 인물이다. 대기업 PG&E를 상대로 한 집단소송은 생각보다 훨씬 많은 시간과 자원을 요구했다. 그럼에도 그녀는 포기하지 않는다. 먼 거리에 있는 피해자들을 직접 찾아다니고, 그들의 이름과 사정을 거의 외우다시피 한다.

이 영화를 보며 든 생각은 단순했다. 정의를 구현하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비효율적이고 집요한 과정이라는 것. 법은 논리와 정의로만 움직이지 않는다. 시간과 체력, 그리고 끝까지 버티는 사람이 있어야 겨우 앞으로 나아간다.

줄리아 로버츠가 연기한 캐릭터 역시 너무 매력적이었다. 그 덕분에 실제 인물인 에린 브로코비치도 찾아보게 되었는데, 너무 간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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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으로 읽어서 보고 싶은 영화 리스트:

- To Kill a Mockingbird (1962): 여러번 읽어도 고전은 역시 고전이라는 생각이 든다. Atticus Finch가 광견을 총으로 쏘는 장면은 유독 오래 기억에 남는다. Gregory Peck의 Atticus Finch가 왜 그렇게까지 회자되는지, 그리고 '아이의 시선'을 영화가 어떻게 풀어냈는지 궁금하다.

- The Paper Chase (1973): 로스쿨을 다룬 작품 중 일종의 통과의례처럼 언급되는 작품이다. 소설은 다소 애매하게 읽혔지만, 영화는 다르다는 이야기가 있어 확인해보고 싶다.

- The Firm (1993): 단순히 재미있는 소설로 읽었지만, John Grisham의 작품들이 다수 영화화했다는 사실을 알고 나니 영화도 자연스럽게 궁금해졌다.

- A Civil Action (1998): 변호사의 화려한 '승리'보다는, 하나의 사건에 거의 모든 것을 쏟아붓는 과정에서의 집념과 집착을 그린 이야기다. 그래서 오히려 영화가 어떻게 이 과정을 그려냈을지 궁금해졌다.

- Just Mercy (2019): 책을 정말로 인상 깊게 읽었다. 이 책을 통해 EJI (Equal Justice Initiative)라는 단체를 처음 알게 되었고, 공공분야 (public interest) 영역의 일에도 자연스럽게 관심을 갖게 되었다. 책에서 받은 울림이 영화에서는 어떻게 구현되었을지 궁금하다.


(그냥!) 보고 싶은 영화 리스트:

- A Few Good Men (1992): 군 내부 사건을 다루는 JAG Corps (군 법무관) 이야기라 관심이 갔다. 일반 형사재판과는 다른 군 내부의 법 체계가 어떻게 작동하는지가 궁금하다.

- My Cousin Vinny (1992): '리걸 코미디'라는 장르 때문에 보고싶다. 법정이 항상 긴장된 공간으로 묘사되는 다른 작품들과 달리, 전혀 다른 톤으로 접근한다는 점에서 궁금해졌다.

- A Time to Kill (1996): 어린시절 보고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던 영화다. 가해자들을 직접 죽인 아버지의 선택이 정의인지, 아니면 또 다른 범죄인지. 지금은 시선에서는 어떻게 보일지 궁금하다.

- The Lincoln Lawyer (2011): 넷플릭스 드라마 시리즈로 먼저 접했는데, 같은 원작을 바탕으로 한 영화는 어떻게 다르게 그려냈을지 궁금하다.

- The Trial of the Chicago 7 (2020): 몇 번 시도했지만, 초반을 넘기지 못했다... 그럼에도 정치와 재판이 얽힌 사건이라는 점에서, 단순한 법정 드라마와는 다른 질문을 던질 것 같아 끝까지 보고 싶다.





영화를 무조건 배움의 도구로 보려고 하면, 보는 내내 피곤해진다. 실제로 영화를 보는 나는, 로스쿨에 들어가기 전의 학생이라기보다 그저 한 명의 관객에 가깝다. 그래서 일단은 재미있게 본다.

다만 보고 나서 무언가 하나라도 남으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Ruth Bader Ginsburg에 대해 조금 더 알게 된다거나, 배심원이라는 제도가 궁금해진다거나. 그 정도의 생각 한 줄기면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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