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틀 포레스트>, 김태리와 함께 가는 귀농 판타지

라기보다는 먹방

by 거대고양이

한국영화의 대작 편중 경향이 점차 심해지는 가운데, 오래간만에 멋진 저예산 기획영화가 지난 3월 극장가에 조용한 반향을 일으켰다. 바로 동명의 일본 만화를 원작으로 만들어진 <리틀 포레스트>다.


<여배우는 오늘도>(2014)의 구정아 프로듀서가 판권을 사서 기획하고, <와이키키 브라더스>(2001),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2007) 등에서 소외된 이들의 곤경과 용기를 담담하게 그려낸 임순례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다. 제작자와 감독, 주조연배우가 모두 여성이니 ‘여성영화’의 계보에 속한다고도 볼 수 있겠다.

고향 친구들과 수제막걸리 꺾는 이 기분. 캬~

임용고시에 연신 불합격한 혜원(김태리)은 불현듯 텅 빈 고향집으로 내려온다. 어릴 적 친구 재하(류준열), 은숙(진기주)과 재회한 혜원은 사나흘이면 돌아간다더니 ‘겨울만 보내고 올라가기엔 너무 억울하다’며 눌러앉는다. 혜원은 텃밭과 산야에서 구한 재료로 요리할 때마다 홀연 멀리 떠난 엄마(문소리)의 기억들을 떠올린다. 장작을 패고 감자를 심고 다슬기도 잡고 쓰러진 벼를 세우면서 계절이 지나고, 혜원은 지난 일들을 조금씩 이해하거나 놓아버리게 된다. 그리고 겨울이 돌아오자 ‘아주심기’를 준비한다.


<리틀 포레스트>는 청춘 드라마와 가족 멜로의 흔해빠진 관습을 현명하게 거스르는 대신 일상의 시간들에 집중한다. 요리를 매개로 팍팍한 서울 생활이나 어린 시절 엄마와의 추억이 현재와 교차되지만, 엄마는 왜 떠났는지, 재하에게 생긴 ‘좋아하는 사람’은 누구인지 등을 관객의 상상에 맡긴다. 극 중 인물과 거리를 유지하면서 존중하는 태도가 엿보이는 연출이다. 여름과 가을, 겨울과 봄으로 나뉜 일본판 영화와 달리 사계절을 한편에 담은 것 또한 좋은 선택이다.

느무 멋진 혜원의 부엌. 이것은 판타지이므니다.

언뜻 <리틀 포레스트>는 귀농 청년들의 시골 생활을 사실적으로 보여주는 듯하지만, 알고 보면 소소한 판타지로 가득하다. 혜원의 고향집 부엌은 ‘세멘 바닥’에 ‘고무 다라이’ 대신 북유럽식 인테리어와 고급지고 예쁜 주방기구로 채워져 있다. 또 귀여운 강아지 오구와 속 깊은 재하가 곁에 있어 든든하다. 시골 어른들의 텃세나 지나친 간섭과 같은 실제 귀농생활의 어려움은 최소한으로 묘사된다. 기억 속 서울은 창백한 푸른빛으로, 넉넉하고 푸근한 고향은 노란 톤의 화면으로 그려진다.

푸른 빛의 서울, 노란 톤의 고향.

중간중간 등장하는 회상 장면은 일반적인 플래시백이 아닌, 하나의 미장센에 현재와 과거의 인물(주로 엄마)을 나란히 보여주는 ‘의식의 흐름’ 기법을 쓰고 있다. 마치 현재와 과거가 뒤섞여 서로 대화하는 듯한 느낌이다. 새롭고 독창적인 기법은 아니지만 주제를 드러내기에 적절한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혜원의 집(현재)은 곧 엄마의 집(과거)이며, 어쩌면 이 마을 또한 그런 삶의 흔적들이 이어지는 역사성 위에 서 있기 때문이다.

혜원과 엄마. 현재와 기억의 병치.

<리틀 포레스트>는 혜원 역의 김태리가 나오지 않는 장면이 거의 없을 정도로 김태리에 의한, 김태리를 위한 영화이기도 하다. 그는 한국 대중영화에 보기 드문 걷고 싶을 때 씩씩하게 걷고 웃고 싶을 때 호탕하게 웃어 제끼는 여성 캐릭터를 자기만의 일상적인 톤으로 풀어낸다. ‘농사에는 사기 잔머리가 없다’는 재하 역의 류준열, 언젠가 고향을 떠나고 싶다는 은숙 역의 진기주와 진짜 친구들처럼 어울리는 한편, 기억 속 엄마로 등장하는 문소리와도 찰떡궁합을 이룬다.


수제비와 배추전, 삼색 설기떡, 막걸리, 봄꽃 파스타, 오코노미야키, 양배추 샌드위치, 크렘 브륄레, 오이 콩국수, 기름 떡볶이, 단밤 조림, 양파 구이 등… 군침 도는 제철 음식은 이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이다. 진희원 푸드스타일리스트가 채식주의자 임순례 감독과 함께 ‘이야기가 있는 요리’를 기획하고, 김태리는 촬영에 앞서 모든 음식을 손수 만들어 보았다고 한다. ‘겨울에 심은 양파는 봄에 심은 양파보다 몇 배나 달고 단단하다’처럼 인생을 요리에 빗댄 표현들도 산뜻한 감흥을 준다.

봄꽃 파스타. 너네 도시 사람은 못해먹습니다만..응?

열정 페이, 번아웃, 노오력, 워라벨 등의 유행어와 <삼시세끼>, <효리네 민박>과 같은 예능 프로그램의 성공은 치열한 세속의 경쟁을 떠나 조용히 쉬고 싶은 대중의 욕망을 대변한다. <리틀 포레스트> 또한 장화 신고 몸빼바지를 입은 김태리와 함께 사계절을 체험하면서 마음이 치유되는 듯한 경험을 관객에게 선사한다. 극장을 나와 ‘나만의 작은 숲’을 찾는 것은 우리들 각자의 몫일 테다.


- <비욘드>지에 실은 글을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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