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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이카 Mar 01. 2022

그냥 일어섰을 뿐인데

#시가 싫은 당신에게 #운문 에세이


순간 번쩍 하더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이다

큰 소리가 나는 것이

맥박인지 그저 소음인지

어디 부딪힐까 발도 떼지 못하고

온 신경을 집중하여 눈을 뜨고 있으면

순서대로 보이는

사물과 풍경

그리고 안도감


온 신경을 집중

온 신경을 집중


마치 삶의 모든 변곡점 앞에 있던

철문이 힘 없이 열리는 듯한데


2022.03.01


나는 전반적으로 건강한 편이다. 현대인의 만성 질환이라는 비염과 허리 통증은 늘 달고 살긴 하지만 들으면 놀랄 정도로 큰 병을 앓은 적은 없다. 감사하게 여기며 살고 있다. 하지만 비염과 허리 통증 말고도 하나가 더 있는데, 바로 기립성 저혈압이다. 흔히들 빈혈이라고 하지만 정확히는 빈혈과는 다른 증상이라 한다. 기립성 저혈압은 평소에 증상이 자주 나타나진 않지만, 한 번 심하게 겪으면 그 상황에 따라 생명이 위험할 수도 있다. 무슨 겨우 그거 가지고 생명이 위험하냐 할 수도 있지만, 위험할 뻔했던 적이 더러 있었다. 


첫 번째는 목욕탕이었다. 어릴 때 우리 동네에 약간 고급스러운 구조의 목욕탕이 있었다. 그곳의 메인 탕은 그리스 신전 향을 살짝 첨가한, 사방이 돌로 되어있는 계단을 두 개 정도 올라서 화려한 조명이 내리쬐는 탕으로 들어가는, 꽤 부담스러운 구조의 탕이었다. 아버지와 그곳에 갔던 어느 날, 샤워 후 탕에 들어가 몸을 녹인 나는 아버지 등을 밀어드리기 위해 일어섰다. 탕 밖으로 나가려고 발을 한 발짝 내디딘 그 순간, 나는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그 사이의 일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정신을 차렸을 때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쓰러진 나를 붙잡고 뺨을 때리고 있는 아버지, 아버지와 나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뒤이어 악을 쓰듯 내지르고 있는 비명이 귀에 들렸다. 내 비명이었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그런 비명을 지를 수 있다는 것이 내심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정신을 차릴수록 온 몸이 아파왔다. 떨어질 때 말 그대로 '맨몸'으로 바닥에 부딪힌 탓이었다. 아버지는 그 높이에서 머리로 떨어지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라 하셨다. 나는 그날 이후 한 동안 목욕탕에 갈 수 없었다. 그 뒤로 목욕탕에 갈 때면 항상 정신을 바짝 차리고 탕에 들어간다.


두 번째는 군대였다. 추운 날이었는데, 아침 구보를 끝내고 점호를 마치는 순간, 머리가 핑 돌더니 눈앞이 하얘지고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이미 목욕탕을 비롯해 살면서 그런 사태를 몇 번 겪은 나는, 마치 익숙한 듯 가만히 서서 정신을 차리려고 신경을 집중했다. 그리고 그곳은 다름 아닌 군대였기에, 괜히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 않은 마음에 더 빨리 그 상태를 벗어나려고 애썼다. 그런데 이번은 그 상태가 조금 심각했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던 적은 처음이었다. 기분 탓인지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그 순간이 마치 꿈처럼 느껴졌다. 시간이 느리게 가는 듯했다. 그리고 그것은 기분 탓이 맞았다. 시간은 느리게 가고 있지 않았다. 모두가 생활관으로 돌아갈 때까지도 혼자 연병장에 우두커니 서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 나를 툭툭 치며 말을 거는데, 뭐라고 말을 거는 것 같았지만 들리지 않았다. 순전히 직감으로 그가 당직사관임을 알아차린 나는 "앞이... 보이지가 않습니다."라고 했고, 그 상태로 당직병의 부축을 받아 의무실에 가서 누웠다. 여느 군부대처럼 의무실에서 별다른 조치는 없었다. 그렇게 눕고 나서야 비로소 하나씩 보이고 들리기 시작했다. 나는 순간 기왕 이렇게 누운 김에 좀 자야겠다 싶어, 그대로 잠들어서 오전 내내 잤다. 그리고 점심때쯤 굉장히 개운하게 일어나 중대로 돌아갔다. 결과적으로는 꿀 같은 오전이었지만 돌아보면 역시 아찔한 순간이었다. 


그런 순간들의 상태와 감정은 겪어본 사람만이 알 수 있다. 지나갈 것을 알면서도 마치 순간이 영원처럼 느껴지고, 시야가 차츰 회복되는 과정은 신비롭기까지 하다. 뿌연 시야에 걸리는 것 중 특이한 어떤 지점이 먼저 보이고, 그 점을 중심으로 점차 넓어지며 짧게는 몇 초 길게는 몇 분에 걸쳐 주변 시야까지 다 넓어지고 나서야 원래 상태로 돌아온다. 청력의 경우 처음에는 에어팟 프로의 노이즈 캔슬링을 켠 것 같은 상태였다가, 주위에서 물에 들어갔을 때 들리는 소음이 귀에 들리기 시작하고,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변조되어 들리던 주위의 목소리가 점점 원래 목소리로 돌아온다. 


짧은 순간이지만, 그 순간을 '극복'할 때는 뭔가 해냈다는 기분이 든다. 다만 그것을 나의 압도적인 재능으로 손쉽게 극복하는 것이 아닌, 피나는 노력으로 매우 힘겹게 해내는 느낌이다. 마치 녹이 슬어 열리지 않는 철문을 안간힘을 써서 열어젖히는, 그러나 결국에는 열고야 마는 그런 극복 말이다. 그리고 앞으로 살면서 만날 수많은 위기들도, 이런 식으로라도 지나 가졌으면 하는 그런 마음이 든다. 내게 기립성 저혈압이란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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