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라이카 Apr 09. 2022

늙음, 그 참을 수 없는 무력함

#영화같은 에세이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2007)

넷플릭스 <소년심판>을 조금 늦었지만 정주행을 마쳤다. 소년범에 대한 주제를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여느 수사물처럼 경찰이나 검사가 아닌, 판사들이 직접 사건의 실마리를 찾아 나선다는 것이 흥미로운 작품이었다. 물론 딱 거기까지 기는 했다. 아쉬운 점도 분명 있었다. 다만 점점 영악해지는 소년들의 범죄를 보면서, 비록 드라마지만 소년범죄의 수위가 바뀌었다는 것이 확실히 눈에 보였다.


그 작품을 보면서 느낀 것은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촉법소년에 대한 처벌 수위를 강화해야 한다는 것, 또 하나는 세상이 점점 흉악해진다는 것이었다. 특히 스마트세대라고 불리는 요즘 청소년들은 불과 10여 년 전의 아이들과는 달리 순진하지 않았다. 마음만 먹으면 어떤 성인보다도 더 잔인하게 나쁜 짓을 할 수 있었다. 어떤 면에서는 뒤를 생각하지 않고 행동한다는 점이 저런 것도 순수하기 때문에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세상이 흉악해진다는 생각과 함께 생각난 영화가 있었다. 2번 이상 보고 나서야 조금이나마 이해가 됐던 몇 안 되는 영화이기도 하다. 지금은 <쏘우>의 직쏘, <양들의 침묵>의 한니발과 함께 사이코패스의 대명사 중 하나가 된, 그 유명한 단발머리의 킬러 '안톤 쉬거'가 나오는 영화. 하비에르 바르뎀의 선 굵은 연기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좋아했던 영화이기도 하다.


베트남 전쟁 당시 저격수로 복무했던 사냥꾼 르웰린 모스(조쉬 브롤린)는 어느 날 사냥을 나갔다가 갱들의 총격전 현장을 마주한다. 마약 거래를 하려다 총격전까지 벌인 것으로 보이는 현장에서, 모스는 200만 달러가 들어있는 돈가방을 습득하여 집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곧이어 다른 멕시코 갱들에게 추격을 당하는 신세가 된다. 갱단에서는 모스를 잡기 위해 직접 움직이는 것 말고도 살인청부업자를 따로 고용하는데, 그가 바로 안톤 쉬거(하비에르 바르뎀)이다. 일반적인(?) 킬러와는 달리 소를 도살할 때 사용하는 '에어건'을 들고 다니는 안톤 쉬거는 본인의 기준에 맞지 않으면 가차 없이 사람을 죽이는 킬러다. 그 사람의 내부 사정은 그에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오로지 그의 정의, 그의 기준만이 상대방의 생사를 결정한다. 공감 능력은 살면서 배운 적이 없는듯한 전형적인 사이코패스다.


쫓기는 르웰린 모스, 모스를 쫓는 안톤 쉬거, 그리고 뒤늦게 갱들의 총격 현장을 발견하여 모스와 쉬거를 동시에 쫓는 늙은 보안관 에드 톰 벨(토미 리 존스) 이 세 명이 영화의 주요 인물이다.


"선생님 잠깐만 그대로 계세요."가 왼쪽의 남자가 생전 마지막으로 들은 문장이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2007


워낙 어려운 작품이고 해석의 여지가 많아  말도 많은 작품이지만  가지만 추려보자면, 영화가 끝날 때까지  경관은 모스와 쉬거와 만나지 않는 점이 조금 특이하. 경험 많은 보안관인 벨은 베테랑이지만 경험으로 미루어 앉은자리에서 사건의 경위를 추측만   적극적으로 사건을 수사하지 않고, 매번  발씩 늦는다. 모스는 기발한 방법으로 세상 모두를 따돌리려 애쓰고, 쉬거는 사이코패스답게 기이한 방법으로 가는 곳마다 본인의 추격에 방해가 되는 요소를 제거하며 살인은 기본이고 방화, 테러도 서슴없이 일으킨다. 젊은 도망자와 킬러의 도주와 범죄를, 늙은 보안관은  빠르게 따라갈 역량도, 의지도 턱없이 부족하다. 사건은 베테랑 보안관의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살인과 침입 현장에는 총알이 발견되지 않고, 사이코패스의 살인 동기는 짐작조차   없으며, 차로 추격전을 벌이고 있는 이들을 보안관은 말을 타고 쫓는다.


하나  추가하자면  작품은 액션과 주제 표현의 배역이 명확하게 나뉘어 있다. 액션은 르웰린 모스와 안톤쉬거가 담당하고, 메시지 전달은 에드   경관이 맡아서 메시지를 전달한다. 영화 중반에는 에드 경관과 그의  동료의 대화가 나오는데, 이미 은퇴한듯한 동료와의 대화에서 둘은 요즘 세상은 너무나도 흉흉하다, 예전 같으면 상상도   일이 사회에서 자꾸 일어난다고 푸념 아닌 푸념을 한다. 노인의 눈에는  세상이 너무나도 흉흉하고, 마치 그곳에 그들이  자리는 없어 보이는 듯하다. 오랜 세월을 지나 이제야 세상을  이해했다고 믿는 노인들의 눈에는 도무지 이해할  없는 일들이 곳곳에서 일어난다.




영화의 배경은 1970년대다. 70년대에 소위 '요즘 젊은이들'이라 불렸던 이들은 지금 노인이 되었을 테다. 그들의 눈에는 지금의 세상이 어떻게 보일까, 기상천외한 소년범죄와 흉악범죄, 전 세계에서 들려오는 각종 기이한 사건과, 냉전 이후 더 이상 일어나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국가 간의 전쟁. 꼰대라는 폭력적인 단어를 앞세워 예의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젊은이들. 정말 그들은 그들을 위한 나라가 없다고 생각할까. 세상은 정말로 흉흉해지기만 하는 것일까. 그리고 지금 젊은 우리는 늙으면 어떤 생각이 들까. 가속도가 붙는 변화의 속도에 지금의 젊은 세대는 발맞추어 따라갈 수 있을까.

매거진의 이전글 누구나 자신의 역할이 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