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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이카 Apr 25. 2022

싸우지 않는 연인

#시가 싫은 당신에게 #운문 에세이


마주하지 않는 지친 표정들

서로를 향해 피어있는 가시는

더 이상 찔려도 아프지 않고


눈앞이 가시 투성이었다는 기억만 또렷하여

닿지 않으려는 서로의 손끝


두 사람을 번갈아가며

정신없이 화살을 쏘아대는 큐피드


멍하니 빈 화살통을 쳐다보며

조용히 숨을 고른다


그리고 

낡은 감정이라는 베일 뒤에

입에 테이프가 발린 채 묶여있는

나 아직 살아있다 소리치는 희망


2022.04.25


"우리? 이제는 싸우지도 않아."


남의 연애 이야기는 재미있다. 아마 내 문제가 아니라서 그럴 것이다. 행복한 이야기든 싸운 이야기든 나는 내 감정을 쓰지 않아도 된다. 나는 누가 썸을 타고 있으면 잘해보라고 부추기고, 도무지 좁혀지지 않는 문제로 싸운 이야기를 들으면 헤어지라고 부추긴다. 그래서 나와 가까운 이들은 이제 내가 하는 부추김에 그다지 동요하지 않는다. 실없이 하는 말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 아무 말이나 할 수 있다. 편하다.


그런데 가끔 저 문장으로 이야기를 시작하는 친구가 있다. 그러면 나는 농담을 멈춘다. 그 친구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고, 나름의 위로를 건넨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차라리 싸우라고 말한다. 싸우고, 대화하고, 화해하라고. 싸우지도 않는 연인은 정말 끝이라고.


연인은 싸운다. 싸우지 않는 연인은 없다. 그들이 서로 첫눈에 반한 사이, 십여 년을 알다가 연인으로 발전한 사이인지는 상관이 없다. 생각이 다르고 부딪히는 지점이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나는 연인이 싸울 때면 큐피드 같은 존재가 둘 중 한 명에게 화살을 쏜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화살을 맞은 이는 상대에게 새로이 반하여 마음이 누그러지고, 둘은 다시 화해하여 이전처럼, 또는 전보다 더욱 열렬히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불같이 싸우던 마음도 시간이 지나면 신기하게도 가라앉고, 먼저 가라앉은 이가 용기 내어 사과를 건네는 것. 그런 일련의 과정이 큐피드 같은 존재가 없다면 가능했을까 싶은 순간들이 더러 있었다.


그런데 갈등의 골이 깊어질수록 연인은 싸우지 않는다. 상대가 나에게 할 모진 말, 내가 상대에게 할 모진 말을 듣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상대가 할 말, 내가 할 말이 얼마나 모질고 날카로울지는 서로가 잘 알고 있다. 그 상태로 시간이 많이 흐르게 되면, 나중에는 큰 싸움거리가 아님에도 싸움으로 번질까 무서워 대화 자체를 시도하지 않는다. 싸우더라도 대화를 시작하면 해결할 수 있는 것이 많은데도, 아직 희망이 있는데도 말이다.


그때가 아마 화살이 다 떨어지는 시점이다. 큐피드가 떠난 연인의 결말은 모두가 알 것이다. 아니, 애초에 연인에게 결말이 있다는 것 자체가 새드엔딩이나 다름없다. 살면서 보고 듣고 겪은 바로는, 연인의 화살의 개수는 확실히 유한하다. 그리고 그 개수를 정하는 것은 오롯이 그 둘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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