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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이카 May 26. 2024

젖은 채로 산다는 것

#지나가는말입니다 #라이카

'감성'이라는 단어를 참 좋아한다. 특히 글을 쓰거나, 예술 계열에 종사하거나 하는 이들에게는 거의 필수적이다. 내 주변에는 예술인들은 많이 없지만 예술이나 문학에 관심이 아주 많거나, 그쪽으로 진로를 계획하고 있는 사람 정도까지는 몇 있는 것 같다. 그리고 나도 한 때는 그들 중 하나였다.


글 쓰는 것으로 먹고사는 것, 그전에는 시인으로 '등단'하는 것이 꿈이었다. 하루에 몇 권씩 소설이나 시집을 읽었고, 에세이, 칼럼, 논문이나 과학 기술 텍스트에 이르기까지 틈날 때마다 읽었고, 그 외의 시간에는 나의 글을, 나의 시를 썼다. 10년 가까이 쓰다 지쳐버렸는데, 스스로 지친다는 생각이 들었던 이유는


항상 무언가에 '젖어있어야 한다'는 강박 때문이었다.


해가 갓 완전한 모습을 드러낸 시간에만 부는 바람에 나뭇잎이 서로 부딪히는 소리와 아침 냄새, 평소와는 다르게 유독 자몽 티 빛깔을 내는 보름달, 내리는 빗물이 담장을 타고 하수구로 흘러가는 모양 등. 내 주위의 모든 크고 작은 변화와, 그것이 나에게 미치는 정서적 영향을 분석하고, 거기서 오는 감정을 명료하면서도 고루하지 않은 나만의 표현으로 한 단어씩 써 내려가는 작업은 마치 폭포 아래에서 하는 일종의 정신 수련과도 같았다. 일단 한 편을 쓰기 위해 몇 시간이라는 시간을 확보하는 것도 쉽지 않았지만, 가장 어려웠던 것은 생업으로 바쁜 일상 속에서도 그 '센서'를 켜두는 것이었다. 당장 출근해서 일을 하고, 야근을 하고, 풀린 눈으로 집에 오는 일상에서 바람이 어떻고 달이 어떻고까지는 신경 쓸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젖은 채로 산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를 자각하기 시작한 이후로 나는 한 편의 시도 쓰지 않았다. 글쓰기를 막 시작했던 10대 후반~20대 초반에는 느껴지는 것을 그대로 써도 아무런 어색함이 없었다(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그랬다). 하지만 어느 순간(아마 취준생 때부터였을 것이다)부터는 억지로 보고 느끼려고 하고, 글을 쥐어짜 낸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 억지를 들키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들키면 부끄러울 것 같았고, 부끄러울 바에는 하지 않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러한 이유로 나는 현재 전업 작가로 활동하는, 그리고 '현생'과 작품 활동을 병행하는 모든 문학인들을 존경한다. 분명 상상 이상의 노력과 재능을 소비하는 작업일 것이다. 하지만 글을 쓰는 행위 자체는 내게 있어 여전히 행복한 일이기에, 이렇게 가끔이라도 노트북 앞에 앉아 생각을 써내려 간다. 당장 감성에 젖은 채로 살아갈 여유는 없지만, 이렇게 세상에 치이고 찌들어 메마른 채로 쓸 수 있는 글도 분명 존재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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