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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창고 Oct 21. 2020

하루가 별거지|기억의 파편들

기억이 조각으로 나뉘면 불현듯 생각나기 마련이다.








#조각 하나.

현실은 마음과 무관하게 계속 흘러가는 법이다. 

집에 있는 물건을 가지러 아버지와 단둘이 차에 올랐다. 

부고 소식을 전하려면 엄마 휴대폰이 필요했다. 

길기만 한 무거운 공기는 아버지가 먼저 깼다. 


“가는 엄마에게 꼴이 뭐냐는 잔소리는 듣기 싫다.”


아버지는 이발소에 바삐 들렀고, 난 먼저 집으로 향했다. 

현관문을 열자 평소처럼 포근한 향기가 코를 자극했다.

엄마라고 부르면 금세 “어, 그래 우리 아들 왔어?”라는 소리가 들릴 것만 같았다.

사고가 났던 안방은 난장판이었다. 

주삿바늘과 반창고가 나뒹굴었다. 

다급했던 순간이 그려졌다. 

엄마는 얼마나 무섭고 힘드셨을까? 

이 장면을 아버지가 아닌 현실 감각이 없는 내가 먼저 봐서 다행이다. 

아픈 흔적을 지우기 위해 바삐 집안을 정리했다. 

불과 20분 만에 예전과 똑같은 장소가 되었다. 





그런데 엄마만 없었다. 

소파를 보면 슬그머니 내 옆에 앉아 쌓인 이야기를 터놓는 엄마가 보였다. 

식탁을 보면 내가 좋아하는 간식을 사놨다고 말하면서도 몸에 안 좋으니 너무 먹지 말라고 잔소리하는 엄마가 보였다. 

눈을 감고 있으면 부엌에서 엄마의 요리 소리가 들렸다. 

엄마는 이곳에 있었다.

감정의 큰 늪에 빠지기 전에 아버지가 돌아왔다. 

연신 몰아쉬는 아버지의 숨소리가 그때의 집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신호총 소리 같았다. 

귀를 너무 아프게 울리는 그 소리에 난 다른 출발선에 서고야 말았다.






#조각 둘.

돌아보니 난 위로받을 때보다 할 때가 많았다. 

그래서 이날이 이상했다. 

위로하는 건 편했고 받는 건 어색했다. 

엄마가 세상에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한 점도 한몫했으리라. 

동생들은 밥도 먹지 못했지만 나는 어느 때보다 잘 먹었고 감정에 매몰되지 않았다. 

솔직히 현실감 없는 나에게 문제가 있는 건 아닌지 걱정도 됐다. 

그럼에도, 조문객들은 나름의 방식으로 나를 위로했다. 





많은 형태가 “무슨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네요”라는 위로였다. 

나도 자주 쓰는 말이며 가장 현실을 반영한 말이라고 생각했다. 

“위로하고 싶은데 상처가 큰 당신의 마음을 보듬어 줄 말은 이 세상에 없는 것 같습니다”로 해석할 수 있을까? 

사실 가장 기억에 남는 위로 형태는 몸의 언어였다. 

메라비언의 법칙이 떠올랐다. 

사람은 대화 상대에게 호감을 느끼는 세 가지 요소가 있다. 

시각적 요소, 청각적 요소, 말의 내용. 

말의 논리와 짜임새는 불과 7%의 영향을 줄 뿐이고 표정과 자세, 몸짓의 시각적 요소가 55%, 목소리 형태, 억양 등의 청각적 요소가 38%의 영향을 준다. 

그래서 7:38:55의 법칙으로도 불린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문자로 보낸 위로 글보다 직접 얼굴을 보이고 위로의 말을 건넨 사람이 고마웠다.

손 한번 잡아주는 게 위로가 되었다.





침울하게 서 있는데 성큼성큼 누가 들어왔다. 

마음을 나눈 유일한 친구였다. 

제주도에서 소식을 듣자마자 식당을 닫고 올라온 녀석에게 미안함이 들던 찰나 나를 안더니 펑펑 운다. 

뜻밖의 위로에 덩달아 굳은 눈이 처음으로 촉촉해졌다. 

녀석은 한동안 나 대신 더 울어주었다. 

새벽 2시에 찾아온 조문객도 선명하게 기억한다. 

평생 함께할 동료 선생님들이 찾아온 것이다. 

눈물로 나를 위로했고 나는 그저 고마웠다. 선생님은 “늦은 밤에 도착할 줄 알았는데”하며 말을 조심히 꺼냈다. 

알고 보니 장소를 착각해서 발인하는 포천에 다녀온 것이었다. 

“선생님을 대신해서 미리 보고 왔어요”라고 멋쩍게 웃는 선생님을 보며 피식 웃고 말았다.





마지막으로 기억 남는 조문객은 같은 전공과 선생님이었다. 

삼우제를 마치고 감사의 연락을 드렸더니 문자를 하나 보내주었다. 

개인적으로 남은 슬픔이 식는 기분이었다.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아니라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일이 조금 빨리 온 것이니 너그러이 이해해주세요.”






#마음 하나.

사실 와준 조문객들만 감사한 것은 아니다. 

일을 헌신적으로 도와준 제수씨들에게 감사했고 나 대신 자주 울어준 아내에게 고마웠다. 

힘든 일을 함께 겪고 나니 ‘가족’이라는 사실이 새삼 든든했다.






#조각 셋.

장례식장이라고 꼭 슬픈 일만 있는 건 아니었다. 

오랜만에 만나는 친척과 대학 동창들이 반가웠고 뜻밖의 조문객에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엄마가 나의 지인을 모두 집에 불러놓고 음식 대접을 한 기분이었다. 

나를 웃긴 것은 동생 지인이었다.

진중하게 향을 들고 촛불에 대는데 생각보다 불이 잘 붙지 않았다. 

내가 보기에는 이쯤 하면 됐는데 몇 차례 실패한 그는 신중하게 향을 피웠다. 

그리고 얼마나 신중하던지 불을 확인하기 위해서 향 끝을 엄지와 검지로 잡았다.

 

“아 뜨…” 


불똥에 놀란 그는 이를 물고 신음을 참았다. 

나도 참았다. 

잠시나마 웃음이란 위로를 준 그가 고마웠다. 

다행히 그는 다시 신중하게 부러진 향을 피우고 있었다.






#조각 넷.

처음 겪는 일에 또 다른 나는 내가 궁금했다. 

어떻게 이리 냉정할 수 있나? 

그래서 쭉 지켜보기로 했다. 

첫 번째 눈물은 장례식 첫째 날 제주도 친구가 우느라 찔끔 흘렸다. 

두 번째 눈물은 장례식 둘째 날 새벽에 떨어졌다. 

엄마의 영정사진 아래에서 잠을 청했다가 1시간 만에 깼다. 

새벽 4시쯤 됐을까? 

적막한 그곳에 다시 잠을 청하려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막아둔 감정이 솟구치는 걸 입을 막아가며 참았다. 

아버지와 동생들에게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기 싫었다. 

장남답고 형답게 해야 할 일이 많으니 아직 무너지면 안 됐다. 





세 번째 눈물은 입관식에서 쏟아졌다. 

누운 엄마는 가벼운 미소와 함께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 

낯선 수의를 입은 엄마를 보자 나를 제외한 가족 모두가 눈물을 터트렸다. 

수의를 틈 없이 단단히 조여 매는 것을 보며 양수로 가득 찬 뱃속의 태아가 떠올랐다. 

다시 한 치의 틈 없이 행복했던 곳으로 가는 것이다.

엄마의 머리카락을 빗을 때까지는 참을 수 있었지만, 마지막으로 엄마에게 하고 싶은 말을 돌아가며 할 때는 입이 열리는 대로 감정이 터져 나왔다. 


“엄마, 내가 아빠 잘 보살필게. 동생들 잘 챙길게. 그러니까 여기 걱정 하나도 하지 마. 그냥 편히 우리 지켜봐 줘. 그리고 다시 만날 때 엄마가 해주는 갈비찜 먹고 싶어. 해줘. 꼭 이야. 엄마 사랑해.”


울음 때문에 말하기 힘들었지만, 엄마에게 하는 마지막 말이기 때문에 놓치지 않고 다 말했다. 





마지막 눈물은 장례미사에서 흘러내렸다. 

엄마의 영정사진을 옆자리에 두고 평소처럼 미사를 따랐다. 

하느님을 원망하고 의미를 묻고 의지도 하면서 혼동의 마음을 달랬다. 

십자가에 매달린 신은 그저 묵묵히 나를 내려다보았다. 

이제는 정말 엄마를 보내는 시간이 됐다는 느낌이 들었다. 

미사의 끝은 항상 “하느님 감사합니다”였는데 이날은 나에게 너무나도 슬픈 말이 되어버렸다. 

그 말을 뱉자마자 눈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눈물을 흘렸다. 

다리에 힘이 빠졌다. 

아버지가 나를 일으켜 세웠지만, 휘청이는 몸을 가누기 힘들었다.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영정사진과 함께 퇴장하였다. 

정말 힘들었지만, 영적으로도 잘 보내드릴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조각 다섯.

발인제 때 하늘은 맑고 구름 한 점 없었다. 

옆에 있던 아저씨는 엄마가 복이 많아서 날이 참 좋다고 그랬다.

 제사 중에 햇빛이 너무 강해서 어쩔 수 없이 눈을 감고 있었다. 

이미 격한 슬픔은 장례미사에서 끝났기 때문에 오히려 덤덤한 마음이었다. 

한참 눈을 감고 엄마를 떠올리는데 갑자기 강한 햇살이 나의 눈앞을 아주 서서히 쓰다듬고 갔다. 

처음 느껴보는 따뜻함이었다.

쓰다듬는다는 표현을 할 수밖에 없는 빛이었다. 

마치 엄마가 나를 천천히 어루만지며 “걱정하지 마. 아들 파이팅!”이라고 한 것만 같다. 

지금 생각해도 정말 신기한 경험이었다.






#마음 둘.

이젠 큰일이다. 

하늘에서 엄마가 지켜본다고 생각하니 허투루 살 수가 없다. 

신에게는 보일 수 있는 엉터리 모습도 엄마에게는 절대로 보여줄 수 없다. 

엄마가 속상한 건 싫으니까. 

고로 난 바르게 살아야 한다. 


“엄마 지켜봐 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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