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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창고 Oct 24. 2020

하루가 별거지|다시 오르다

마음에 산을 다지기






이럴 수가! 

나답지 않게 산에 가고 싶어 졌다. 

내가 정말 낯설었다. 

나에게 기억되는 산이란 군대에서 겪은 강원도의 험한 산뿐이었다. 

그러니 산이라면 이를 갈만했다. 

산은 내게 금기어였다. 

그 후로 딱 한 번 광교산에서 청계산 쪽으로 산을 탔다. 

물론 군대 때 쌓은 체력이 남아있나 확인하기 위한 테스트였다. 

오르막길을 평지처럼 걷는 만족감을 얻으며 콧대가 산만큼 높아졌다. 

결말은 해피엔딩이 아니라 그냥 해피였다. 

험한 코스는 점차 편한 길이 되더니 광교산 너머로 내려오게 되었다. 

청계산 가는 길을 놓친 것이다. 

단단히 챙긴 배낭이 나를 보며 멋쩍게 웃었던 기억이 난다.






산 혐오자인 내가 스스로 산을 가겠다니! 

똑똑하고 뚜렷하게 나의 세상이 달라졌다. 

문득 대학 시절 가족과 함께 올랐던 북한산이 떠올랐다. 

북한산을 오르겠다고 아내에게 통보했더니 표정이 미묘하다.

“지금 혼자 오르겠다고 하는 건가? 나는 독박 육아하고?”하는 눈빛 메시지에 “친정에 가는 건 어때?”라는 말 대신 “친정”까지 입 밖에 웅얼거리다가 삼켰다. 

그래도 남자답게 두 글자까지 뱉어보았다. 

아내는 혼자 가고 싶으면 가도 된다며 등을 두드려주었다. 

이해해주는 아내가 고마웠다. 

엄마를 잃고 가슴이 막힌 것처럼 답답해서 뭐라도 도전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사실 혼자 가고 싶었지만, 터져 나올 감정을 헤아리니 두려웠다. 

산에서 부는 감정의 소용돌이에 빨려 들어가면 등산한 보람이 오즈로 도망갈 것만 같았다. 

살며시 아내의 옷자락을 잡았다. 






드디어 지긋지긋했던 산에 다시 섰다. 

마스크를 하고 산에 오르는 건 쉽지 않은데 아내가 가벼운 발걸음으로 빠르게 산을 올랐다. 

천천히 가야 한다고 말렸지만, 그녀는 그게 나한테는 더 힘든 거라고 일러주었다. 

몇 번 이야기를 꺼내면 잔소리가 될 것 같아서 묵묵히 올랐다. 

역시나 산 중턱부터 아내는 지쳤다. 

사람이 없는 틈에 마스크를 벗고 숨을 골랐다. 

단풍과 함께 붉게 물든 볼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모른다. 

풍경에 취하고 나서야 아내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제 자연이 된 것 같다. 






학창 시절 체력장 때 하는 오래달리기가 떠올랐다. 

보통 자신의 페이스대로 뛰는 친구들이 많았지만, 그중에는 특이한 친구도 있었다. 

신호와 함께 엄청난 속도로 뛰는 모습에 나는 충격을 받았다. 

일등으로 한참 치고 나가는 게 멋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때뿐이다. 

대부분 뛰다가 걷다가를 반복하다가 경기를 포기한다. 

덩달아 뛰었던 몇몇 친구도 체력을 만회할 순 없었다. 

그러고 보면 달리기나 등산은 인생과 비슷하다. 

나는 달리기 같은 삶을 원하는가? 

등산 같은 삶을 바라는가? 

달리기는 뚜렷한 목적을 향해 자신의 페이스를 조절하는 삶이다. 

그러나 풍경을 여유 있게 즐기는 삶은 아니다. 

힐끗힐끗 주변을 보긴 하지만 결국 시선은 재차 앞을 향하게 된다. 

일이나 꿈을 향한 질주에 어울리는 삶이다. 






나는 함께 등산하는 삶이 원한다. 

오르면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거나 함께 간식을 까먹고 싶다. 

걷다가 누군가 지치면 함께 산바람의 온기도 느끼고 싶다. 

산에 매달리다가도 뒤에 숨겨진 경치를 바라보며 야호를 외치고 싶다.

누군가는 등산을 달리기처럼 한다. 

등산의 목적이 과연 정상일까? 

과정 속 가치를 얻지 못하면 등산 역시 달리기에 불과하다. 

진정한 등산이라면 언제든 중턱에서 내려올 수 있다. 

그렇다면 등산하는 삶을 목표나 꿈 중심의 인생에 맞추면 어떨까? 

오히려 경쟁 지향 사회에서 주머니 속 소시지처럼 티가 나지 않을까 생각한다. 

지금도 그 생각을 내 평생의 배낭에 넣고 오르는 중이다.






언제 올라가나 했던 산에 파란 하늘이 많이 보이기 시작한다. 

경치에 절로 입이 벌어졌다. 

그래. 산은 원래 이런 곳이었다. 

우리는 왜 산을 가는 걸까? 

지극히 편파적인 중계자 시점에서 말하면 그곳에 자연이 있기 때문이다. 

증거를 보자. 

자연 속에 있을 때 사람 얼굴을 유심히 보면 대부분 밝다. 

목소리는 들떠있고 마음은 열려 있다. 

산은 사람을 바꾼다. 

그래서 산에 간다. 

심지어 모르는 사람과 이야기도 나눌 수 있는 곳이 산이다. 

마치 교복처럼 모두 같은 등산복을 입고 있으니 친밀하기까지 하다. 

만약 아파트라면 옆집에 사는 이웃에게 짧은 말이라도 걸을 수 있을까? 

초인종을 누르면 싸우자는 표정으로 째려볼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산에서 대화를 나누며 올라오는 등산객이 밉지 않다. 

고요한 산을 느끼고 싶은 입장에서 아쉽지만 사람 목소리도 자연이니 들어줄 만하다. 

그곳에서 공개수업이 다음 주라고 걱정하는 풀벌레 소리, 긴 머리를 펴고 싶었는데 여자 파마랑 가격이 같아서 삭발했다는 딱따구리 소리, 편한 길이 나오니 이제 입이 열린다며 아파트 중도금을 말했던 바람 소리가 귀를 씻고 갔다. 

그런데 크게 틀어 놓은 노래가 갑자기 나의 귀를 막았다. 

어찌 보면 노래도 똑같은 사람 소리 아닌가? 

그런데 불쾌지수가 확 높아졌다. 

왜 그럴까? 

그건 소음이기 때문이다. 

노래는 취향을 타기 때문에 당사자에게만 활력을 준다. 

이어폰으로 듣지 않고 자연에 방출하는 태도는 더 미간을 주름지게 한다. 

자연을 혼자 독차지하려는 심보가 고약하다.






어느새 산 꼭짓점에 도착했다. 

태극기와 함께 인증샷을 찍으려는 사람들이 긴 줄이 되었다. 

우리도 덩달아 줄이 되기로 했다. 

아래 세상을 보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그곳은 아이의 방처럼 장난감으로 널려있었다. 

점보다도 작은 내가 저기 있었다. 

그리고 그보다 더 작은 마음이 자기 멋대로 살고 있었다. 

괜히 손바닥을 펼쳐 한 뼘을 재본다. 

마음을 나는 어디까지 넓힐 수 있을까. 

높은 곳에서 보아야 하니 산이 필요하다. 

산을 내가 사는 곳으로 가져오고 싶다. 

다진 내 마음에 산을 쌓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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