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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창고 Nov 13. 2020

하루가 별거지|약속할까요? 신뢰할까요?

약속했었다






아산여행에서 불쾌가 쾌를 넘본 적이 있다. 

징징 떼쓰는 아이를 달래고 저녁거리를 사다가 푸드트럭을 발견했다. 

기다리는 사람이 적어서 마약김밥을 한 줄 주문했다. 

배꼽시계는 때를 거르지 않고 잘 간다. 

이어서 제법 식구가 많은 가족이 오더니 주문했다. 

긴 시간 후에 앞의 두 사람이 밝은 표정으로 나간다. 

덩달아 내 차례가 와서 나도 기뻤다. 





사장은 힐끗 내 쪽을 보더니 조금만 기다리라고 했다. 

아이는 잘 놀고 아내 얼굴은 굳어갔지만 쾌활하게 네라고 외쳤다. 

갑자기 느낌이 이상했다. 

이번에 내 김밥이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또 많은 시간이 흘렀고 내 예상은 어김없이 맞았다. 

잔뜩 싼 김밥을 들더니 식구가 많은 손님을 불렀다. 

다른 손님이 없었기 때문에 사장이 오해했다고 믿을 수 없었다. 

화가 부글부글 끓었다. 

순서를 자기 마음대로 바꾸다니. 

한 줄 김밥은 돈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건가? 

돈과 약속 중에 돈이 되는 쪽을 고른 건가? 

코가 벌름거리고 입이 열리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여행지에 와서 불쾌해지고 싶지 않았다. 





사장은 어떤 생각으로 이런 선택을 했을까? 

문득 사장의 심리가 궁금해졌다. 

나란 사람은 한 줄이니까 기다리다가 포기해도 되지만, 가족단위 주문은 놓치면 큰 손해라서 그런가? 

생각은 꼬리를 물었다. 

아! 내가 여행객이니 다시 올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내가 목소리가 큰 사람이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내 차례인데 왜 순서를 어기느냐며 화를 냈을 것이다. 

그럼 테이블에서 식사하는 큰 고객은 내 눈치를 보며 기분 나쁘게 먹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사장이 손해 아닌가? 

아! 그 큰 고객도 어차피 다시 올 것 같지 않은 관광객으로 보았나? 

어쩌면 사장은 죄송하다는 말로 때울 각오로 몇 수 앞까지 본 건지도 모르겠다.




 

지나친 내 상상은 달나라까지 갔다가 아산으로 귀환했다. 

주변을 보니 10개 정도의 푸드트럭 중 딱 두 군데만 열려있었다. 

토요일 황금 시간대에 심할 정도로 상권이 죽었다. 

뒤늦게 안타까움이 밀려온다. 

그래. 저마다의 이유가 있겠지. 

순서를 어기다가 진상 손님을 만나는 상황이 영화처럼 그려졌다. 

심히 걱정된다.

걱정이 많은 사람은 여기서도 걱정이다.





약속과 신뢰에 대한 생각이 여행을 마칠 때까지 떠나지 않았다. 

어쩌면 둘 다 긍정 언어로 쓰이고 비슷한 맥락처럼 보인다. 

하지만 불행히 약속은 악마의 언어이기도 하다. 

파울로 코엘료의 <순례자>라는 책을 보면 악마가 인간을 유혹하는 세 가지 방식이 나온다. 

협박하기, 약속하기 그리고 약한 면 건드리기. 

마치 괴테의 <파우스트>에 나오는 악마 메피스토펠레스가 파우스트 박사에게 젊음을 약속하는 대신 그의 영혼을 농락할 수 있는 권리를 받는 것처럼 우리는 약속이라는 유혹에 빠진다. 

말 그대로 어떻게 할지 미리 정하는 수준이다. 





하지만 신뢰는 다르다. 

굳게 믿고 서로 의지하는 사이가 되어야 쓸 수 있는 말이다. 

약속만 잘 지킨다고 신뢰가 생기지 않는다. 

약속은 신뢰를 포용할 수 없지만, 신뢰는 약속을 포용하는 관계이다. 

“나는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인가?” 보다 “나는 신뢰하는 사람인가?”라는 질문이 더 무거운 이유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신뢰를 쌓을 수 있을까? 

여기에는 인간다운 따뜻함이라는 팥소가 반드시 필요하다. 

그게 없다면 밀가루로 단단한 바위를 만드는 것처럼 안타까운 단계에 머물고 만다.

나쁜 사람이, 혹은 그들끼리 신뢰가 없는 이유는 역시 따뜻함이 없기 때문이리라.

 




내 주변에는 세 가지 종류의 사람이 있다. 

약속을 주고받는 사람, 신뢰를 주고받는 사람 그리고 배경에 있는 사람. 

푸드트럭 사장님 덕분에 신뢰로 묶인 사람에게 잘하고 있는지 점검하는 계기가 되었다. 

오늘 저녁은 가족을 위해 밀가루 부침개를 해볼까?















약속했었다     





여린 마음일 때는


묶는 매듭이 더 신경 쓰였다


단단히 매면 


예쁘게 매면


두 번 매면


마음도 그대로 있는 줄 알았다


부끄러운 세월이 흐르니


긴 호흡으로 풀 매듭만 남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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