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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창고 Nov 12. 2020

하루가 별거지|희로애락 중 대빵은 누구일까?

나는 분노한다. 고로 존재한다.






며칠째 집 앞에는 스티로폼 상자가 쌓여있다. 

인간답게 미룰 수 있을 때까지 미루다가 복도 청소가 있는 당일에 몸을 움직였다. 

하필 바쁜 아침에 이게 무슨 일이람. 

힐난할 사람을 찾지 못한 눈은 초점이 없다. 

머리보다 더 높이 쌓인 상자와 고장 난 소형가전까지 챙기니 아픈 팔이 신경 쓰인다. 

급히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는데 띵 소리와 함께 4층에서 멈췄다. 

등교하는 학생이 탄다. 

중간에 멈춘 적 없던 승강기가 야속했다. 

역시 가는 날은 장날이 최고다. 

그런데 2층에 또 섰다. 

이번에는 출근하는 아주머니가 탔다. 

바쁜 장날에 짜증이 스멀스멀 밀려왔다. 





곧이어 기가 찼다. 

네가 미룬 네 짐인데 엘리베이터가 두 번 섰다고 성질이 나냐! 

짐을 버리고 돌아오는 길에 얼마나 어리석은지 다시 따져주었다. 

솔직히 승강기가 멈추는 것은 삶에서 생길 수 있는 이벤트처럼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감히 내가 부정적인 뜻을 갈아 넣고 분노했다. 

그들은 단지 아침 길을 나선 것뿐이다. 

이 상황에서 위협적인 요소는 나뿐이다. 

마음이 지쳤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깨달았다. 

아마 동생들과 약속을 잡으면서 엄마에 관한 슬픔도 딸려왔나 보다. 

어떤 하루는 평온하게 1층까지 내려가고 어떤 하루는 층마다 서기도 한다. 

엘리베이터처럼 삶은 그렇게 희로애락의 이벤트로 설계되었다. 

하루가 길어서 힘들기도 하고, 행복하기도 하니 문 열리는 것 때문에 스트레스는 받지 말아야겠다.





집에 들어가 아내에게 경고 신호를 보냈다. 

“나 좀 우울한 것 같아.”

아내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커피를 마시면서 마시며 마음을 달랬다.

아파트가 미처 가리지 못한 파란 하늘을 보는데 아내가 1분 마사지라며 등을 두들긴다. 

그리고 말없이 뒤에서 꼭 안아주었다. 

급속 충전이 되었다.





영화 <분노의 윤리학>을 보면 사채업자 명록이 부하에게 희로애락에 관해 말을 한다. 

“기쁨, 분노, 슬픔, 쾌락. 이 중에 뭐가 제일 중요할 것 같냐? 뭐가 제일 형님 같아?”

나는 기쁨을 골랐다. 

나를 나답게 만드는 기쁨만큼 의미 있는 건 없었다. 

하지만 명록은 아니라고 말한다. 

“분노가 제일 형님이야. 왜? 우리 화가 나잖냐? 그러면 기뻐지지도 않고 슬퍼지지도 않고 즐거워지지도 않아요. 그런데 이게 반대는 돼. 내가 돈을 많이 벌었어요. 아이 좋아. 그런데 옆에 놈이 더 벌었어. 그러면 화가 나니, 안 나니? 기르던 개가 죽었어. 아이고, 슬프지. 그런데 그 개를 친 놈 생각하면 화가 나니, 안 나니?”





그는 마지막으로 한마디를 더한다. 

“고로 인간은 이 분노만 잘 다스리면 마음을 다 다스리는 거다. 이런 거예요.”

분노가 대빵이라니. 

잠시 멍해졌다. 

화라는 스위치가 먼저 켜지면 다른 감정 스위치가 자동으로 꺼지니 부인할 순 없다. 

그렇지만 세상이 정말 분노만 조절하면 되는 일인가? 

그 말을 반박하고 싶은 욕구가 솟구쳤다. 

나쁜 기쁨, 나쁜 슬픔, 나쁜 쾌락도 있기 때문에 마음이 무너지고 사회가 뒤틀리는 것 아니었나? 

결국 명록은 사채업자이기 때문에 분노해야 하는 일과 아닌 일을 기준으로 산 것이다. 

그리고 기쁨과 쾌락은 나의 것, 슬픔은 너의 것이라고 당연히 여겼다. 

이게 박명록, 너의 문제다. 

내 멋대로 결론을 짓고 나니 마음이 후련해졌다. 

사실 다 부질없다. 

끝판왕은 실존하는 아내 아니겠나. 

감정은 존재 후에 오는 찌꺼기일 뿐이다. 

분리수거만 잘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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