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널을 걷다_#4

Chapter 38.

by 콩알이

서울대병원에서 무겁게 발걸음을 돌린 이후로 출혈을 견뎌내는 일상이 더 무거워졌다.

평범한 사람들의 반복되는 일상에 더불어, 혈변의 정도를 관찰하고 역류 물로 보이는 출혈의 농도와 맥박으로 빈혈의 정도를 가늠하는 일이 나에게는 일상이 되었다.


어릴 적,
키가 작아 콩알이라는 별명 이외에
맨날 숨 이차선 쌕쌕거린다고 쌕쌕이라 불렸었다.
요즘 또다시 쌕쌕이가 되어 버렸다.

내 홈피는 너무 우울해서 들어오기가 겁난다는 이들이 많으나,
멀티가 되지 못하는 단순한 아이인지라
어디에도 신경 써주지 못하고 챙기지 못하는 나의 정신없음을 조금이나마 이해해 주었으면 하는
이기적인 바람과
나 스스로에게조차 토로할 자신이 없는 말들을 주절거릴 공간의 필요성.
뭐, 그런.....

수혈을 받아야 할 수치가
하루가 다르게 가까워져 오고 있음을 느끼는 잔인한 일상.

내가 걷고 있는 이 길이
부디, 끝이 있는 터널이길....
2009.03.18


좋은 소식 하나 없는 터라 멀리 계신 부모님께 연락이 뜸해졌고, 부모님은 혹여나 내가 더 스트레스받을까 눈치 보시느라 나에게 전화를 맘 편히 못하셨다. 무뚝뚝한 아빠는 내 안부가 궁금하더라도 굳이 엄마를 시켜 괜찮은지 확인해보라고 하시는 분인데, 그 날은 어쩐 일인지 아빠가 직접 전화를 주셨다. 종로 어딘가에 유명한 내과가 소개되었는데 예약도 안 받는 병원이라 새벽부터 줄을 선다는 인터뷰 기사를 보시고는 내 생각이 나셨나 보다. 거기 한번 가보면 어떻겠냐고 조심스레, 헛기침까지 섞어가며 어렵게 말을 꺼내셨다.

"뭐 어렵겠어요. 가보면 되죠."

자식 눈치 보는 아빠의 목소리에 마음이 불편해져서는 딱히 기대도 없이 병원을 가보겠다 했다.


인터넷으로 아빠가 얘기하신 기사를 찾아보고 위치를 확인하고 회사에 휴가를 제출하고 병원을 찾아 나섰다. 유명하긴 한가보다. 진료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대기하는 사람이 한가득이다. 연세 드신 분들 틈바구니에 끼어 어색한 대기 시간을 보내고 내 이름이 불려졌다.

긴 병의 여정을 간략하게 브리핑 후에 복부 상태를 좀 보자며 간이침대에 누우라 했다.

복부에 남겨져 있는 큰 수술 흉터를 보자마자 더 볼 것 없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형식적으로 배를 몇 번 꾹꾹 눌러보고는 침대에서 내려오라 했다.


미안한 말인데, 큰 병원 가세요.


당황스러울 만큼 앞뒤 없는 직설적인 한마디였다.

대학병원 여기저기를 다녔고, 출혈이 잡히지 않아 선생님께 온 거라 애원하는듯한 설명을 해보았지만 의사 선생님은 단호했다.

여기까지 찾아온 걸 보면 환자분의 고충도 이해는 가지만 환자분의 상태는 여기서 손댈 수 있는 상태가 아니며, 이러니 저러니 해도 환자 상태를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수술집도의이니 그분에게 기대는 것이 맞는 것이라며 설명을 이었다.

뭐라 반박할 수 없는 이야기에 다리에 힘이 풀렸다. 아빠 전화 한 통에 딱히 큰 기대 없이 한번 들러보겠노라 찾아갔는데, 크게 한방 맞은 기분이었다. 내심 뭔가 기대를 했었나 보다.


노심초사 기다리고 있을 아빠에게 전화를 걸어

"아빠, 여기도 안된데요. 수술받은데로 가래."

아무렇지 않은 듯 그렇게 전화를 끊고서는 인사동 한복판에서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한참을 울었더랬다.




요즘은 모든 일에 다음과 끝이 보여. 공연히 마음이 흔들리는 일 같은 건 이제 없을 것 같아. 때론 어떤 기대도 하지 않고 바라보는 생이 어리석음보다 더 고통스럽다는 생각도 들어. 하지만 다행인 것은, 어리석음에는 익숙해질 수 없지만 고통엔 익숙해질 수 있다는 거지.


"난 사랑을 원하지 않아. 혼란은 더 이상 원하지 않아. 이대로 직업적 커리어를 굳히면서 조금 더 버티고 싶어. 삶이 허리를 조금만 굽혀 그 오목한 자리를 내어줄 때까지 오래 바라보고 싶어. 그러면 희망 없이 황량하게, 위안 없이 묵묵하게, 그것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 겨우 그 정도의 오목함에 기대어 제힘으로 살아갈 수 있을 거야. 조금만, 조금만 더 이 공허한 거리를 혼자 걸어가야 해....."


이성이란, 자신이 장악하는 힘을 잃는 순간 그 단정함과 익숙함은 사라지고 가장 생경하고 무질서한 얼굴로 대면해야 하는 억압된 진실에 다름 아니라는 사실을. 그러므로 모든 폭력과 살인과 광기란 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달리 감정이 아니라, 냉혹한 이성이 일으키는 횡포인 것을 몰랐다.

[열정의 습관 _ 전경린]


그 시절의 나에겐 내 삶이 허락해 줄, 기댈만한 오목한 자리 하나가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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