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움의 미학
물건에도 하나하나 추억이 묻어 있다. 나무도 새 잎을 돋는 생명력이 있기에 고통도 느낄 수 있을 거라 생각해서 가지치기도 잘하지 않는다. 그래서 추억이 묻어나는 물건과 이별할 때 마음이 편안하지만 않다.
딸만 다섯인 우리 집은 언니에게 큰 옷을 사서 입혔고, 얼마 지나면 그 옷을 동생들에게 물려주었다. 언니는 매번 새 옷을 입었고, 동생들은 매번 물려 입었다. 어릴 때에는 매번 새 옷을 입는 언니가 좋기만 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이 글을 쓰면서 드는 생각은 '꼭 그렇지만 않았겠구나!' 싶다. 왜냐하면, 동생들은 언니보다 몸집이 컸기 때문에 늘 언니는 언니의 몸보다 한 치수 큰 옷을 입어야 했다. 언니는 어른이 되어서도 늘 넉넉하게 입어야 만족스러워했다. 언니가 왜 옷을 크게 입어야 편안해했는지 이제야 알 것 같다.
한참 예민했던 시절, 언니가 입으려던 옷을 먼저 입고 나가 옥신각신 하기도 했다. 각자 자기 성향이 굳어지기까지 서로서로 옷을 공유해 입기도 했다. 언니는 성인이 되어서도 옷 한 벌 구입하면, 얼마 입지 않은 옷을 동생들에게 물려주었다. 우리 자매는 이렇듯 취향이 비슷하거나, 비슷하지 않은 데에도 좋은 옷들은 버리기 아까우니 일정 부분 물려주고 공유했다. 지금도 비좁은 옷장은 이러저러한 사유를 달고 즐비하게 서 있다.
지나온 추억만큼 쌓여 가는 중년의 옷장, 중간중간 버리는 데에도 여백이 없다. 가볍게 버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그러나 중년이 좋은 이유는 예전보다 많은 옷이 필요하지 않은 시기라는 점에서 좋다. 몸매의 변화로 이전과 같이 예쁘게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옷 사는 일이 예전보다 줄었기 때문인데, 막연히 체중 감소를 기대하면서 옷을 사는 횟수도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시간이 예년에 비해 빨리 흐르는 것도 한몫을 한다. 초시계가 똑같은 리듬으로 흐르건만, 하루에 많은 일을 하지 못한다. 재작년이 다르고, 작년이 다르고, 올해가 다르다는 것을 조금씩 체감하면서 이것저것 매칭해서 입는 시간의 비효율성에 많은 옷이 필요하지 않다는 생각이다. 다만, 내게 어울리는 옷, 나를 돋보이게 하는 옷, 질 좋은 옷, 유행 타지 않는 옷, 깔끔하고 좋은 옷 몇 벌 소장하는 것이 중년의 옷장이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요즘 더위도 더위지만, 생각할 거리가 많아 집중하지 못하니, 이 참에 몇 년 동안 입지 않은 옷, 성향이 다른 자매들이 준 옷, 유행이 지난 옷, 자리차지만 하는 옷들을 버리고 정리했다. 이곳으로 이사 오면서 정리했것만, 여전히 옷장은 여유 공간을 두고 바람 길을 트기란 쉽지 않다. 사계절이 다른 우리나라에서 그것도 대중적인 평수에서 옷 사이사이 환기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한다는 것은 수도 생활을 하지 않는 이상 어려운 일이다. 더군다나 방 하나를 서재로 쓰고 있으니 더욱 그렇다. 몇 해 동안 손에 닿지 않고, 몸에 닿지 않았던 옷들을 정리하면서 하나하나 추억이 담긴 옷들과 이별을 했다.
어떤 옷은 생에 잊지 못할 기쁨을 주었다. 그 옷을 볼 때마다 그 기쁨, 그 장소, 그 상황, 그 추억을 소환했다. 그토록 나를 예쁘고 멋지게 표현할 수 있도록 옷이 나를 대변했고, 옷이 인생에 다시없을 한순간을 선물하기도 했다. 옷은 단순히 피부를 보호하는 기능뿐만 아니라, 나의 이미지에 충분히 기여했다. 또한 옷은 그때의 나로 돌아가 추억하게 하는 향기를 머금은 향수와 같다.
그러나 향수(鄕愁)는 기억으로 또 그리움으로 마음에 흩뿌리고 이제는 홀가분해져야겠다. 박경리 시인의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는 글이 생각난다. 건강을 회복하던 꿈 많던 시절 읽었던 이 글은 그때도 그랬고, 지금도 골똘히 생각하게 한다. 무엇엔가 얽매이지 않고 훌훌 털어버릴 수 있는 시기가 도래한다는 사실, 그럴 수 있는 순간이 사람을 참 홀가분하게 한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한다. 행복했던 순간도, 슬펐던 순간도 모두 애착하지 않으면,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것을......
아직도 비워내야 할 것이 많다. 나이를 먹어가는 만큼 조금씩 비우고 비워내야 한다. 옷도 비우고, 물건도 비우고, 생각도 조금씩 비우면서 감당할 수 있는 무게만으로 세상을 살아갈 수 있도록 심플해져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