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나는 감정의 노출이 거의 없었다. 화내는 모습, 슬픈 모습은 타인에게 보이지 말아야 하는 금기와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그래서 나의 감정은 늘 하나의 틀로 정형화되었다. 늘 긍정적인 태도로 사람들을 대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갖고 삶을 꾸리다 보니, 결국 스트레스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급기야 탈이 났었다.
아픔도 명분이 필요했다. 초기 병명이 없는 상태에서 몸이 축나고 있었기 때문에, 직장에서 제대로 병가를 받을 수도 없었다. 명분이 없는 아픔은 일을 그만둘 수밖에 없는 이유가 되었다.
몸이 회복되고 나니 무조건 참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런가 하면, 나는 마음의 문을 꼭꼭 닫고 있으면서 사회적 인간으로 가면을 쓴 채, 타인의 마음을 열기 바랐다. 나는 오픈하지 않으면서 타인의 마음을 얻으려고 했고, 언젠가 그런 내가 참 이기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성찰했다. 그 후로 내가 먼저 나를 표현하는 사람이 되었다. 아프고 나면 성숙해진다는 관습적인 진리처럼, 아프고 나니 내가 나를 정면으로 마주하고 객관화할 수 있었다.
상당수의 사람들은 오래전 나의 모습처럼, 마음의 문을 잠근 채, 사회적 인간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면서 마주한 타인의 모습을 판단하면서 자신의 전문성과 위치를 한정하는 사람들이 매우 많다. 자신은 꼭꼭 닫고 있으면서 타인의 말과 행동에 눈과 귀를 열어 두고, 저 사람은 어떻고, 또 저 사람은 어떻다고 판단한다.
SNS에 오픈하는 사람들은 자랑하려는 것이 아니다.(물론 그러한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 또 어떠한 결핍과 열등감으로 '좋아요', '구독'을 원하는 것도 아니다. 각자 나라는 사람의 삶을 있는 그대로 오픈하고, 내 주변 사람들 역시 함께 오픈해 주기를 바라는 사람들일 경우가 많다. 이는 서로의 삶과 생각을 공유하면서 같은 것은 공감하고, 서로 다른 차이는 인정하는 그런 삶의 체계를 함께 공유하고자 하는 사람들인 것이다. 이는 정보만을 공유하는 것과는 전적으로 다르다. 이를테면, 서로 여러 가지 감정을 이해하고, 서로의 행복을 빌어주는 조금은 열린 사회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는 사람들일 경우가 많다.
감정에도 질서가 있다. 우리 모두는 인생의 희로애락을 표현하며, 인간으로서 인간다움과 나다움으로 살 권리가 있다. 그러면서 행복을 누릴 권리가 있다. 행복이라는 의미는 삶에서 긍정적인 감정뿐 아니라, 인생의 애환 속에서 삶의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있는 그대로의 나다움을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인생이란 긴 여정에서 기쁨으로만 충만할 수도 없다. 그것은 건조하기 이를 데 없는 길고 긴 사막과도 같다. 그러니까 누군가 타인을 의식한 관계로 여러 가지 감정을 억누르고 긍정의 감정만을 노출하고 산다면, 그는 고깔모를 쓴 피에로와 같다고 할 수 있다. 평판은 좋을지 몰라도 누구에게도 진심일 수 없는 그러한 관계는 나다움 또한 갖출 수 없고, 나다움이 없는 행복은 있을 수 없다.
삶과 죽음의 경계는 건강한 표현에 있다.(그것이 글이든, 말이든, 표정이든, 바디랭귀지든)
건강한 인간이란, 또 인간적인 것이란, 삶의 현장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정서와 감정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고, 서로 나눌 수 있는 사람이 건강한 사람이고, 또 인간적인 사람이 아닌가 한다. 이 말은 날 것 그대로를 간직한 순수한 인간성을 지닌 사람, 이러한 사람들과 마음을 표현하고 정을 나눌 수 있다면 서로 행복할 수 있고, 또 행복한 사람인 동시에 건강하고 인간적인 사람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