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이웃의 식탁> 구병모
*책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꿈미래실험공동주택'은 국가가 저출산 대책으로 내놓은 정책의 일환으로, 자녀가 1인 이상 있는 42세 미만의 부부 한정으로 자녀를 최소 셋 이상 갖도록 노력한다는 전제조건으로 주택에 입주권을 주는 임대 주택 사업이다. 사업의 목적은 쾌적한 환경의 공동주택을 저렴하게 제공하여, 육아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양육 부담을 줄여 출산율 향상에 기여하겠다는 것이다.
어느 날 마을의 가족 모임을 이끄는데 앞장서는 신재강, 홍단희 부부가 아이들을 한데 모아놓고 어른들이 돌아가면서 아이들을 돌보는 방식의 공동육아를 제안한다. 처음에는 육아를 수월하게 하기 위하여 공동 육아 계획을 세운 것이었으나, 공동체를 위한 협조라는 명목으로 개인의 사정은 무시되고 가정의 희생이 당연시된다.
67p 핵심은 시간을 보내는 데 있었다. 어떻게든 시간을 보내면서 체세포의 수를 착실히 불리는 거야말로 어린이의 일이었다. 그 어린이를 바라보는 어른의 일은, 주로 시간을 견디는 데 있었다. 시간을 견디어서 흘려보내고 다음 페이지를 넘기는 일. 그곳에 펼쳐진 백면에 어린이가 또다시 새로운 형태 모를 선을 긋고 예기치 못한 색을 칠하도록 독려하기. 그러는 동안 자신의 존재는 날마다 조금씩 밑그림으로 위치 지어지고 끝내는 지우개로 지워지더라도.
128p 데면데면하다 그냥저냥. 정말 그런 걸까. 이 상황이 뭐 좋은 금붙이나 된다고 그렇게 묻고 지나가 버린 다음, 훗날 기회가 닿았을 때 다시 캐내어 더 큰 구멍을 만들고. 그러려고 사는 거 맞나, 부부가. 요진은 그와 같은 식으로, 은오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묻었던 일들의 목록을 떠올렸다. 아슬아슬하게나마 유지해 온 형태를 깨기 싫어서, 시율이가 볼까 봐. 어른들이 편찮으셔서...... 해결하지 않거나 못하고 다만 안 보이게 덮어 두었던 날들의 날짜를 세었다.
... 이런 상태에서 둘째라니. 셋째는 더욱 초현실의 영역이었다. 그건 의학의 진보나 개인의 체력 및 면역력과, '그래도 아직 살 만한 세상'을 이루는 데 일조하는 공동체 의식과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직장인 남편 손상낙을 둔 조효내는 동화책 삽화를 그리는 프리랜서로 개인주의 성향이 강하며, 육아를 하면서도 커리어를 포기할 수 없는 여성이다. 그녀는 단지 공동주택에 입주하는 것이 육아 부담을 덜어주지 않을까 하여 입주한 것인데, 기대와는 달리 공동주택에서의 생활은 공동체 의식을 강조하고 안 그래도 일과 육아의 경계에서 여유가 없는 그녀의 시간을 더 빼앗아갔고, 마을 공동체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도 마음대로 고립될 수도 없이 그녀는 아이가 자라나는 시간을 '견디고' 있다.
전은오, 서요진 부부는 여성 외벌이 가정으로 이 부부를 통해 대부분의 가정에서 여성의 경제활동 여부와는 상관없이 결국 엄마가 주양육자가 될 수밖에 없는 현실을 보여준다. 특히 워킹맘의 경우에는 주변인의 도움 없이 육아를 해야 한다는 것은 초인적인 정신력을 발휘해야 함을 의미하고, 운이 좋아 아이를 맡길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본인이 원하는 양육 방식과 같을 수 없으므로, 언제 어떤 사고가 발생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버릴 수가 없다.
고여산 강교원 부부는 처음에는 이렇다 할 특징이 없는 가장 일반적인 가정의 형태라고 생각했으나, 실은 경제적인 문제로 인해 부부 관계는 곪을 대로 곪아있었고 아이 앞에서 폭력까지 행사하며 싸우는 일명 '콩가루' 집안이었다. 부부싸움으로 오밤중 주민들을 깨운 사건 이후 가정의 유지가 어려울 것이라 생각하였는데, 책의 끝부분에선 유일하게 이 부부만 주택을 퇴소하지 않고 남아 새 주민을 반겨주는 장면이 나온다. 새로 입주한 주민들이 겪을 상황이 마을을 떠난 이들과 다르지 않을 거란 것과, 앞전의 가족들과 같은 시행착오 후에 심한 경우 이혼이라던가, 힘든 서류과정을 통과하여 입주자격을 얻은 공동주택을 퇴소하게 되는 결말이 예측된다.
85p 이때 피부 흠집 정도가 아니라 어디가 부러지기라도 하면 더 말할 나위도 없이 법대로 해야 한다는 생각인데, 그러다 문득 요진은 비가시적 상처나 객관적 기준조차 없는 내상에 대해서는 어째야 하는지 알 수 없었고, ...내일 일어나면 시율이에게 전날 다쳤을 때의 기분이 어땠는지를 물어야 하나, 반대로 저는 이미 잊은 걸 되새김질씩이나 시키면 오히려 역효과일지도...
178p "꼭 이렇게 해야겠어? 이러는 거 너 정말 이해 안 가는 거 알아?"
그다음 나올 말은 이 상황을 두고 누가 옳은지 길 가는 사람들 다 붙들고 물어보라는 얘기겠지. 그렇게 일도양단이 되는 세계에서 요진은 지금껏 살아 본 적이 없었다. 혹은 지극히 단순 명료한 사안이어서 어쩌다 일도양단이 되더라도 그에 상응하는 무언가를 양쪽이 마땅히 취득하거나 박탈당하는 세계를 경험한 적이 없었다.
각 가정을 위하여, 즉 개인을 위하여 집단과 그 집단을 유지하기 위한 규칙이 존재하는 것인데, 예외사항에 대한 배려가 없이 규칙만을 강조하다 보니 집단의 이익을 위하여 개인의 희생이 요구되는 아이러니가 생긴다.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던 미묘한 부조리함은 극한의 상황에서 참을 수 없는 불편함으로 다가오고, 사소한 계기에 가정이 파탄 나고 극단적인 결정을 내리게 하며 순식간에 모든 것이 무너지게 된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개인이 먼저냐 단체가 먼저냐에 대한 나의 답은, 개인이 먼저라고 말하고 싶다. 공동체를 위하는 것이 각 개인에게 이익이 아닌 부담을 주는 것이라면 공동체는 존재 목적을 상실한 것이 된다. 육아공동주택이라는 편의시설은 주택 생활을 해보지 않은 예비 입주자들에게는 매력 있는 지원 정책일 수 있으나, 실제 그곳에서의 생활은 편리함을 보장해주지 않는다. 현실 육아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담당자가 기획한, 정책을 위한 정책이 아닐까 싶다. 이와 같은 사업은 출산 여성의 경력 단절이라는 근본적인 저출산 문제의 해결에 기여할 수 없기에, 실험주택은 새로운 가정이 들어와 세대교체가 계속 이루어지더라도 성공적인 출산 장려 방안이 되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