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밀밭의 파수꾼> 샐린저
*책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줄거리
홀든 콜필드는 고등학교에서 퇴학을 당하고 정처 없이 떠돌기 시작한다. 여자 친구에게도 연락하고 호텔의 바에도 가보고, 오밤중에 옛 선생의 집에도 찾아간다. 그 과정에서 홀든은 사람들에게 실망하고 사람들과 상처를 주고받는다. 우여곡절 끝에 홀든은 아는 이가 아무도 없는 곳으로 떠나기로 결심하고 마지막으로 여동생 피비에게 인사를 하러 간다. 작별의 시간을 보내려던 홀든은 피비를 만나고선 마음이 약해지고, 결국 떠나려는 마음을 접는다.
고전이지만 어린아이의 시선으로 쓰여서 쉽게 읽힌다. 주인공 홀든의 생각을 의심 없이 따라가다 보면 뜬금없는 결론에 도달하기도 하는데, 이런 샐린저식 유머에 미소 짓게 되는 장면들이 있었다.
67p 피를 흘린 덕인지 내 모습은 강인해진 것처럼 보였다. 난 이제까지 두 번밖에 싸워보지 못했고, 두 번 다 졌다. 난 그다지 강하지 않았다. 사실 난 평화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본인이 싸움을 못하기 때문에 평화주의자임을 인정한다.
203p 「그녀한테 안부를 좀 전해주세요. 그리고 그놈의 웨이터가 내 말을 전해줬는지 좀 물어봐 줄 수 있겠어요?」
「집에나 들어가라구. 도대체 몇 살이야?」
「여든여섯 살. 이봐요. 꼭 그 여자한테 안부 좀 전해줘요. 알았죠?」
누구도 안 믿을 말을 진지하게 한다.
홀든은 주관이 강하지만 아직 자아정체성이 확립되지 않은 나이인 만큼, 본인의 주장에 대한 객관적인 근거가 없다. 세상에 무서울 게 없다는 듯이 비행청소년인 마냥 행동하지만, 사실은 싸움도 못하고 남에게 대놓고 싫은 소리도 못하며, 탈선을 하려다가도 막상 행동을 해야 할 상황이 닥치면 무서워져서 물러나며, 어린아이들에게, 즉 자신보다 순수한 사람에게는 더욱 꼼짝 못 한다.
96p 앨리는 피비에게 꼼짝도 하지 못했다. 그만큼 그 애를 사랑했다는 말이다. 이제 내 여동생은 그때처럼 조그만 꼬마는 아니지만, 아직도 사람들을 꼼짝 못 하게 하고 있다.
217p 「내가 널 주려고 음반을 하나 샀었는데, 오다가 떨어뜨려서 깨뜨리고 말았어」 난 코트 주머니에서 깨진 레코드 조각들을 꺼내 보여주면서 말했다. 「내가 취해 있었거든」
「그 조각들 이리 줘. 내가 가지고 있을래」 그 애는 내 손에서 레코드 조각들을 받아가서는 침대 옆에 있던 작은 탁자 서랍에 넣는 것이었다. 동생은 나를 늘 감격하게 만든다.
모든 사람들을 멍청하고 한심하다며, 냉소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홀든이 똑똑하다고 인정하는 사람은 가장 어리고 순수한 인물인 여동생 피비이다. 피비가 어린아이답고, 객관적으로 그다지 똑똑하지 않은 행동을 할 때조차도 홀든은 피비를 절대적으로 신뢰한다.
229p 「… 나는 늘 넓은 호밀밭에서 꼬마들이 재미있게 놀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곤 했어. 어린애들만 수천 명이 있을 뿐 주위에 어른이라고는 나밖에 없는 거야. 그리고 난 아득한 절벽 옆에 서 있어. 내가 할 일은 아이들이 절벽으로 떨어질 것 같으면, 재빨리 붙잡아주는 거야. 애들이란 앞뒤 생각 없이 마구 달리는 법이니까 말이야. 그럴 때 어딘가에서 내가 나타나서는 꼬마가 떨어지지 않도록 붙잡아주는 거지. 온종일 그 일만 하는 거야. 말하자면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고 싶다고나 할까. 바보 같은 얘기라는 건 알고 있어. 하지만 정말 내가 되고 싶은 건 그거야. 바보 같겠지만 말이야」
홀든은 자신보다 어린아이들에게 기꺼이 파수꾼이 되어주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마음 둘 곳 없이 방황하는 그 스스로가 그를 진심으로 이해해 주고 그의 동심을 지켜주는 파수꾼을 원하고 있기 때문인 듯하다. 홀든은 자신에겐 파수꾼이 없다고 생각하겠지만, 그의 마음속에 파수꾼과 같이 자리한 존재는 오히려 그가 지켜주고 싶어 하는 대상인 피비인 듯하다. 홀든은 항상 피비의 동심을 마음의 위안으로 삼고 행복해한다.
276p 아이들은 모두 다 공짜로 한번 더 타기 위해 황금의 링을 잡으려 하고 있었다. 피비도 다른 아이들과 똑같이 하고 있었는데, 목마에서 떨어질까 봐 걱정되었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이들이 황금의 링을 잡으려고 할 때는 아무 말도 하면 안 된다. 그러다가 떨어져도 할 수 없다. 그렇더라도 아무 말도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홀든이 근거 없는 허세를 부리고 논리에 허점이 있는 주장을 하더라도 반박하지 않아야 한다. 그는 누구보다 진지하고 솔직하게 마음이 가는 방향으로 행동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스스로 세상의 이치를 깨닫고 자아를 형성하도록 내버려두어야 한다. 그러다 상처받고 여기저기 부딪치더라도 어쩔 수 없다. 그저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어 자유롭게 뛰어다니다 낭떠러지로 떨어지지 않도록 잡아주면 된다.
237p 「이제 가버리면, 내 연극 보러 오지 못하겠네」 그 애 목소리가 좀 우스꽝스럽게 들렸다.
「그렇지 않아. 보러 갈 거야. 어디 가더라도 네 연극은 보고 갈 거야. 네가 나오는 걸 어떻게 내가 안 볼 수가 있겠니?…」
271p 그렇지만 피비는 내 뒤를 따라오지 않았다. 그래서 난 혼자 휴대폼 보관함에 가서 가방을 맡겼다. 그때까지 그 애는 가만히 보도 위에 서 있었다. 그러다가 내가 다가가자 몸을 옆으로 돌아서 버렸다. 그런 짓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아이였다. 마음만 먹으면 사람에게 등을 돌릴 수 있는 아이였다. 「난 아무 데도 안 갈 거야. 마음이 변했어. 그러니까 그만 울어」 정말 우습게도 내가 이 말을 하자 피비는 울음을 그쳤다.
홀든은 과목에서 낙제점을 받고 학교에서 퇴학을 당해도 아무렇지 않은 듯 행동하고, 학교 생활에 충실할 것을 충고하는 어른들에게 매우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나, 막상 동생 피비가 자신 때문에 학교 연극에 빠지게 된다는 상상을 하니 금세 우울해진다. 그는 동생이 커가는 과정을 보며 언젠가는 자신에게 현실적인 조언을 하던 어른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현재 자신에겐 호밀밭의 파수꾼이 없다고 생각하겠지만 그가 미워하는 세속적인 가치를 요구하는 어른들 역시 그를 위해 파수꾼이 되어주는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언젠간 깨닫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