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0월 초. 내 얘기를 듣고 나서 팀장님은 나에게 이렇게 물었다. “우리 회사에서 일한 지 얼마나 되었지?” “곧 5년 다 돼가요.” “그래.. 5년이면 일도 어느 정도 손에 익었고 잘 아니까, 그래서 네 머릿속에 그런 잡생각이 드는 거야.”
나는 그냥 남들이 사는 것처럼 따라 살고 또 그에 맞춰 안분지족 하는 보통의 20대 직장인이었다. 그저 그렇게 흘러가는 대로 살던 2014년 5월 어느 날, 내 기억으로는 사촌오빠의 결혼식을 일주일 가량 앞두고 있을 때였다. 퇴근하고 딴 대로 새지 말고 바로 집으로 오라는 엄마의 연락을 받고 바로 귀가했다. 도착하니 싸늘하고 무겁게 내려앉은 분위기 속에, 아버지는 거실 바닥에 주저앉아 오랫동안 끊었던 담배를 연신 태우고 계셨다. 그러다 나와 내 동생을 앉히고서는 말씀하셨다. 자신이 폐암 4기라는 얘기와 함께 시한부 판정을 받았다고.
그럼에도 나는 참 어렸고 철이 없었다. 부모님의 울타리 속에서 커왔기에, 몰랐던 현실을 서서히 마주하게 되었어도 속으로는 현실의 답답함에 벗어나고 싶어 했었다. 그때 무얼 더 생각하고 신경 써야 할지 심각하게 고민하고 생각했어야 했는데, 그렇게 흘러버린 1분 1초가 두 번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귀중한 시간이었다는 걸 나는 몰랐다.
헐떡이는 숨을 가쁘게 내쉬며 우리 딸내미가 고생이 많다며 내 손가락을 만져준 그때가 2016년 2월 초.
그리고 대략 열흘이 지나서였나 아버지의 시간은 그렇게 멈췄다.
아마 내 안의 변화의 시작은 이때부터였던 것 같다.
내 삶에서 큰 산 같은 존재가 사라져 버리기 시작하면서였다.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내 편을 들어주는 엄마, 남동생 그리고 사촌동생
남겨진 우리 가족에게 힘이 되어준 우리 집 막냇동생 까미
왜 갑자기 이런 얘기를 꺼내게 되었냐 하면 태어나 처음 겪는 영원한 이별이라는 걸 도무지 어떻게 받아내야 할지 몰랐었고, 당시 매일 밤마다 떠오르던 ‘내 손을 잡아줬던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을 무작정 지나가듯 내버려 두기엔 그 상처가 나에겐 너무나 컸기 때문에 당시 나는 주변의 도움이 필요했었다.
그러던 와중, 회사에서 업무분장과 관련된 면담을 할 일이 생겨 팀장님께는 솔직하게 털어놓자 마음먹고 말씀드렸다. 요즘 나는 현재 심리상담을 받으며 부서진 멘털을 부여잡으며 겨우겨우 버티고 있어 나에게 시간이 필요하다고. 그리고 팀장님은 말했다.
세상에 너희 부모만 돌아가신 것도 아닌데 왜 유난을 떠냐, 일이 손에 익어 일이 쉬워지니 그런 잡생각이 머릿속에 드는 거고, 지금 하는 말 모두 네가 일하기 싫어 내는 변명처럼 들린다.
김형경의 에세이 <좋은 이별>에서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 사회는 이별에 대해 말하지 않은 문화 때문에 우리의 이별 과정을 더 고통스럽게 만들고, 그 후유증이 자신과 사회까지 병들게 만들고 있다고.
그리고 뒤이어 깨달았다. 팀장님 본인도 폐암 투병을 한 친정아버지를 병간호를 했음에도, 본인의 아버지는 완치했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부하직원의 고통과 아픔 따위는 전혀 공감할 생각이 없다는 것을 말이다. 아니, 장례식 치르고 몇 달은 지났으니 이제는 완벽하게 끝난 일인데 왜 오히려 질질 끌며 과거를 잊지 못하고 끄집어내냐며 되려 나에게 성을 내고 있었다.
어른과의 대화가 지금보다 더 서툴렀던 당시 나의 의사 전달이 완벽했을 거란 생각은 하지는 않는다. 다만 나는 이별로 인한 슬픔에 절망하는 나 자신을 치유하고 싶었을 뿐이었고, 저 날의 대화를 계기로 치유에 도움이 전혀 되지 않은 팀장에게 ‘좋은 이별’을 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