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매일같이 이불킥을 합니다

신입사원 일기

by 레룬

1. 두려운 데자뷰


업무적으로 어려웠던 지난 9월을 한 줄로 표현해보자면, 내가 가장 못하는 일들로만 투두리스트가 꽉 차 있는 기간이었다. 미팅에 미팅에 미팅의 연속. 즉흥적으로 큰 목소리를 내야 하고 또 확신없는 상황에서 당차게 미팅을 주도해야 하는 시즌이었다. 미팅 하나가 끝나면 ‘이렇게 말할 걸’, ‘이러지 말 걸’하는 마음이 올라오지만 한숨 쉴 틈 없이 곧바로 다음 미팅을 준비해야 그나마 억지 웃음이라도 지으며 미팅에 임할 마음의 준비가 되었다. 그렇게 미팅이 하나씩 끝나갈 때마다 삼켜 눌러둔 속상함이 켜켜이 쌓여서, 퇴근하고 이불킥하며 잠드는 밤의 연속을 지냈다.


그러다가 문득 “어, 이거 데자뷰인데" 싶은 순간이 있었다. 첫 인턴 때 세미나 발표를 끝낸 직후 긴장이 풀려 눈물이 왈칵 났던 날, 두번째 인턴 때 회의 한참 전부터 긴장하다 진이 빠져 정작 중요한 당일을 망쳐버렸던 날, 세번째 인턴 때 갑분싸로 끝났던 줌미팅의 날이 스쳐 지나갔다. 데모데이 스테이지에서 바보처럼 얼어버렸던 날, 발표 전날의 긴장감에 나오는 울음을 룸메에게 들키지 않으려 화장실 물소리를 틀어놓던 학창시절의 날들도 있었지. 그때마다 일기장엔 다신 발표나 회의 진행 같은 건 안 하고 싶다고 썼다. 사회생활 하면서 아예 안 할 수는 없겠지만 그렇다면 최소한으로 하는 직업을 갖고 싶다고까지 생각했다. 그리고서는 얼마 지나면 또 이 말더듬증과 무대공포증을 이겨내고 싶어 안달나기를 반복했다.



2. 절대적 강약점은 없다


9월엔 정말 내가 즐기고 있는 게 하나도 없다는 생각에, 왜 나는 자꾸만 내 약점을 마주해야 하는 곳에만 골라 서 있는지 한탄했다. 약점을 보완하려하지 말고 잘하는 것을 강화하는 맛에 살라던데, 난 미련한 노력을 하고 있는 건가 싶었다. 그럼 내가 잘하는 건 뭘까 생각하면서 그동안 받았던 칭찬의 말들을 사소한 것부터 떠올려보기 시작했다. 당시엔 받아들이질 않았었지만, 정말 웃기게도 말솜씨에 대한 칭찬을 많이 들었단 사실을 오랜만에 상기하게 됐다. 말해야 하는 상황을 그렇게 끔찍히 여기는 내가 말을 잘한단 평을 듣는 이 아이러니는 뭘까.


정말 싫어하는 상황에 자꾸만 얽히는 이 이상한 악연의 정체를 고민해보니, 유달리 내가 신경 쓰는 무언가가 있다는 결론이 났다. 무엇이든 어느 정도는 잘하고 어느 정도는 못하겠지. 잘함을 살려 그 실력의 기준이 높은 곳에 있다 보면, 그걸 자연스레 갈고 닦으면서 내 욕심과 눈높이는 덩달아 높아지는 거다. 그러면 누군가는 잘한다고 여기겠지만 어느새 내 기준은 더더욱 높아져 있기 때문에 스스로는 그걸 아킬레스건으로 여기기 쉬워지는 게 아닐까.


잘하고 못하고는 늘 상대적이고, 인생을 결국 무엇에 얼만큼의 시간과 노력을 들일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강약점은 하등 의미 없어진다. 강점은 약점이 되고 그건 곧 또 강점이 되기 마련이라, 그저 “내가 신경쓰고 싶은 영역”이 무엇인가 하는 사실만이 중요해진다. 자주 얽히게 되는 이 말솜씨라는 녀석은 내게 신경 쓰이는 존재라서 자꾸만 밀당을 당한다고 느끼는 걸지도 모른다. 두려운 악연이라 여겼지만, 내 예민한 감각이 발동하고 나도 모르게 무척 신경 쓰이는 무언가를 발견했다고 생각하면 감사해진다. 무서워하기보다 빨리 다가가서 친하게 지낼 고민만 하면 되겠다 싶어서.



3. 감정적인 사람의 회사생활


그토록 피해오던 것이 사실은 너무나 잘하고 싶고 이미 어느정도 잘하기도 한다는 것임을 인지한 순간 사무치게 후련했다. 계속해서 잘하고 싶은 것들을 이렇게 하나씩 찾아나가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미래의 어떤 지점을 기대하며 달려갈 때보다, 내가 중요히 여기는 것들을 꽉꽉 채워넣은 하루들을 그저 반복하면서 지낼 때 가장 활기 넘치는 사람이란 걸 알기에. 앞으로도 마음에 켕기는 것들을 잘 살펴보면서 내게 진정 중요한 것들을 수집하는 과정을 반복해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근래 가장 자주 울고 깊게 힘들었던 9월이 정말 큰 배움을 선물해주고 갔다. 그렇게 보면 여리고 눈물 많은 내 성향도 도움되는 구석이 있구나 싶다.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들을 감각하는 안테나가 되어주는 것 같아서, 유달리 힘들고, 버겁고, 불편한 감정이 들 때는 이거다 싶어 더더욱 들여다보려 한다. 단조롭고 편한 일상일 때는 눈치채기 어려운 스스로에 대한 단서 하나를 습득하는 기쁨으로.


이 다음엔 또 어떤 진짜 열정을 찾게 될지 설렌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것저것 잘해보기도 여러 번, 못해보기도 여러 번 하면서 여러 악연들을 마주해야겠지. 반짝하는 가짜 열정에 여러 번 속기도 하고 말이다. 회사는 그 작업을 너무 잘 도와줄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한다. 여러 사람이 얽혀 있는 곳에선 혼자서 만들 수 없는 온갖 복잡하고 독특한 상황들이 만들어지기 때문에 내 행동과 생각을 다각도로 바라보기 좋다. 아, 나는 이럴 때 적극적이고 이럴 땐 망설이는 경향이 있구나, 이런 종류의 작업들을 즐기고 이런 상황을 꺼리는구나. 나에 대한 단서를 수집해나가는 보물찾기 판이라고 생각하면 회사생활이 마치 게임같기도 하다. 이불킥 차는 밤을 이어가면서도 계속 해보고 싶은 게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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