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입사원 일기
1. 생각을 훈련하는 연습생
아이돌 무대 영상을 보게 되면 “진짜 멋지다”라는 감탄 뒤에 늘 따라붙는 생각이 있다. 내 무대는 어디일까 하는 생각. 아이돌만큼 분명하지는 않더라도 누구에게나 연습생과 같은 시절이 있고, 그때 갈고닦은 실력을 신나게 발휘할 수 있는 시기와 공간이 있을 텐데 생각하곤 한다. 내가 빛나는 순간을 알고 일하면 더욱 즐겁겠다 하는 생각에 하는 고민이다. 어렴풋하게 생각해보는 내 무대 중 하나는 ‘답 없고 어려운 순간에 모두가 막막해 하는’ 바로 그 때다. 잠깐 멈칫 서서 ‘어떡하지’를 각자 중얼거릴 때, 꽤 괜찮은 생각과 말로 안개를 조금 걷으면 그때 일을 했다는 보람을 느낀다. 언제 있을지 모르는 또 다음 무대를 위해 매일 내가 연습하는 건 ‘명료한 생각’이다.
세 번의 인턴 경험을 모두 다른 직무로 경험했던 것의 단점은 특정 분야의 전문가/시니어의 세계는 잘 모른다는 점이고, 장점은 어시스턴트/기획자/매니저와 같은 단어들이 붙고 흔히 주니어 문과 직무라고 불리는 직무들의 본질적인 공통점을 체감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직무들은 대부분 결과물이 비가시적이거나 문서 형태로 표현된다. 결국 기획서, 보고서, 설명서, 제안서 성격의 글을 문서든, 메세지든, 이메일이든, 말로든 전달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공고에서 질리도록 보이는 커뮤니케이션 역량과 논리적 사고력 등, 요구되는 기본 역량들이 비슷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회사와 산업마다 부르는 직무 이름은 천차만별이고 각각에는 맥락 차이가 존재하겠지만, 본질적으로 매우 비슷함을 인지하고서는 직무명에 크게 얽매이지 않고 ‘기획자/매니저’류의 포지션들을 두루 살펴보기 시작했다.
직군을 어느 정도 추린 후로 고민한 것은 차별화 방법이었다. 생각해보면 커뮤니케이션과 논리적 사고력은 사회생활을 하고 학창시절을 성실히 보낸 사람이라면 누구나 어느 정도 갖추고 있는 능력이 아닌가. 이런 생각에 인턴생활 도중에는 때때로 내가 지금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고민했다. 진입장벽이 낮은 직군들일 수는 있겠지만 분명히 여기에서도 실력의 편차가 발생하는 지점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결정적인 차이가 무엇인지, 주변의 훌륭한 실무자분들을 보면서 힌트를 한가지씩 얻어나갔다. 여태까지 내가 생각하는, 실력 편차가 나타나는 핵심적인 부분은 다음과 같다:
정보 압축: 쏟아지는 정보들 속에 핵심만 남기고 맥락을 살려 얘기하는 것
문제 정의: 해결 가능한 방식으로 문제를 프레이밍하는 것
설득력: 위의 모든 것들에 더해 정보 구조화와 EQ가 필요한 영역
주니어 때 이 세가지만 집중적으로 훈련해도 모자라겠다 싶을 만큼 어렵게 느껴지는 부분들이다. 첫 직무 선택의 폭은 넓게 열어놓되 이 세가지를 집중적으로 잘 훈련할 수 있는 포지션을 고민했다. 그렇게 내 첫 포지션 선택의 기준을 다음과 같이 설정했고, 그렇게 결정한 곳에서 매일 부지런히 훈련 중이다. 일을 하는 것과 훈련하는 것은 한끗 차이이기에 가끔 소진되는 기분을 느낄 땐 무대를 기다리며 훈련 중인 연습생이라고 생각한다. 간절하고 감사해진다.
정보 압축 -> 다루는 정보가 복잡하고 양이 많은 곳
문제 정의 -> 트러블 슈팅에 큰 책임이 있는 곳
설득력 -> 새로운 제안과 협력의 기회가 많은 곳
2. 모호함을 포용하기
명료하게 생각하는 것과 확신을 갖는 게 같은 건 줄 알았다. 그 생각에서 비롯된 어려움과 실수들이 많았다. 스스로도 납득이 덜 된 정보를 전달해야 할 때라든지, 부족한 정보에 기반하여 KPI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결정을 내려야 할 때면 괜히 죄책감과 부끄러움을 느꼈다. 여기서 문제는, 정보를 전달하고 결정을 내리는 사람이 그런 감정을 가지고 있으면, 정보를 전달받고 결정에 함께하는 사람들에게도 당연히 그 감정이 전달된다는 점이다. 나에 대한 신뢰도가 낮아지는 건 둘째 치고 일이 잘 될 수가 없다. 매번 확신을 가질 수는 없고 오히려 자주 확신을 갖는 건 위험하다. 내가 노력해야 하는 건 확신이 아닌, 모호함을 포용하면서도 생각을 명료히 하는 것이라는 걸 배웠다.
마인드셋을 바꾼 이후로 자주 사용하게 된 말들이 있다. “잠정적으로 이렇게 갈게요”, “지금으로서는 이 방안이 최선이네요”, “저도 판단이 안 서서, 다시 확인해볼게요”와 같은 말들이다. 항상 정답을, 더 오랜 고민을 거친 더 나은 방안을 제시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기피했던 말들인데, 내게 요구되는 것은 정답이 아닌 단기적 방향성이었던 것이다. 콘텐츠 정책을 준수했는지의 여부를 Y/N로 엄격히 판단해야 된다는 강박도 조금 내려놓고, “해석의 여지에 따라 Y/N 둘 다 허용할게요”, “특수 케이스라서 당장은 논외로 둘게요”, “이 케이스를 판단하기에는 현재 정책에 구멍이 있네요”와 같은 말도 더 자신있게 내뱉기 시작했다. 모호함을 죄악으로 여기지 않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마주볼 수 있게 된 것이다. 모호함을 핑계로 일을 미루는 것은 무책임이지만, 모호함을 포용하고 적극적으로 다루는 것이 진짜 책임이다. 모든 일에는 모호함과 한계가 존재하기 마련인데 가짜 확신으로 그걸 묻어버리지 말자고 생각했다.
3. 시점, 사람, 절차를 생각하기
복합적인 시스템 안에서 여럿이서 일할 때의 묘미는 액션을 설계하는 것이다. 단순히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고 바로 취하는 것이 아닌, 그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서 여러 각도로 고민할 때 생각을 정밀하게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예를 들어 제안이 받아들여지게 만들려면 언제 제기하는 것이 적절할지, 설득력을 높이기 위해 누구까지 개입하게 할 것인지, 어떤 소통 창구를 어떻게 활용할지에 대한 고민이다. 특히 장기적인 신뢰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한 자리에서는 내 말의 무게가 어떻게 전달될지를 생각하면서 필요 이상의 압력이나 정보가 전해지지 않도록 유의한다.
시점: 상대방과의 작업 우선순위가 교점에 있을 때가 황금기회다
사람: 실행자, 결정권자, 권력자, 잠재적 반대자를 나눠서 접근을 고민한다
절차: 얼마나 쪼개어 전달할 것인지, 얼마나 강력하게 전달할 것인지 단위와 톤을 고민한다
4. 셀프 평가
"너는 회사 다니면서 뭐가 느는 것 같긴 해? 나는 성장은 모르겠고 그냥 일하는 기분만 들어". 비슷한 시기에 회사생활을 시작한 친구가 했던 말이 가끔씩 생각난다. 회사는 엄밀히 말하면 개인의 성장을 위해서 설계된 곳이 아니지만 이왕이면 개인의 성장과 회사의 성장이 함께 갈 수 있으면 좋으니까. 열심이고 주도적으로 일하는 한 누구나 분명히 성장 중일 것이라 생각한다. 다만 성장감을 체감하고 욕심내는 것은 아무래도 개인의 몫인 듯하다. 특히 연차보다 역량으로 평가받는 문화에서는 스스로 성장감을 확인하는 일이 더욱 중요해진다.
내가 요즘 노력하는 '명료한 사고력'은 무얼 기준으로 볼 수 있을까. 가장 가시적으로는 매니징하는 프로젝트의 개수(다루는 정보량), 프로젝트의 안정도/성숙도,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의 범위와 종류 등이 있겠지만 그 변화를 인지하기엔 절대적으로 시간이 걸리기에, 실질적으로 성장감을 체감하는 건 오히려 나만 알 법한 아주 작은 부분들인 것 같다. 이를 테면 비슷한 수준의 메세지/문서 작성에 걸리는 시간이 얼마나 줄었는지, 하루에 몇 개의 미팅을 소화해낼 수 있는지, 다른 사람으로부터 나의 인풋을 요구받는 횟수가 얼마나 되는지 등. 가장 심플하게는 하루에 여유분이 몇 분 정도 생겼는지를 확인해볼 수 있고, 너무 막막했을 때는 미팅에서 발언한 횟수와 하루에 동료들과 주고 받은 메세지의 개수가 얼마나 되는지 세기도 했었다.
구체적인 상상에서 힘을 얻는 사람으로서, 내 무대는 어디고 무대 아래 평소에는 무엇을 지속하고 있는지 떠올려보길 권한다. 또 그걸 자주 상기할 수 있도록 회사에서 공식적인 KPI 외에도 스스로 의미있게 느끼는 지표를 쫓아보길. 어디에 내세우긴 부끄럽고 나만 아는 작은 성취라면 더욱이 적극적으로 칭찬해주면서 훈련을 이어가길. 날개 펼치고 뛰어놀 무대는 반드시 온다.